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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화려한 날들>, 도전하는 노년

feat. 덕질 유전자가 노년을 구원할 거야

by Agnes

최근 즐겨 보는 드라마가 있다.

KBS 주말드라마 <화려한 날들>. 나에게는 영원히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으로 기억될 배우 정일우가 주인공인데 3대가 한 집에 사는 전형적인 주말 가족 드라마다.


드라마를 집중해서 보지 못하는 나는 텍스트에 특화된 종이다. 영상을 보고 있으면 어김없이 책이 보고 싶어져서 집중력을 잃고, 그 무엇을 할 때보다 핸드폰이 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집안일 할 때는 꼭 드라마를 켜 놓는다. 외출 준비할 때, 빨래를 갤 때, 요리를 할 때. 그럴 때만은 온전히 드라마에 집중한다. 화면을 잘 보지 못하고 주로 소리로 들으니 '온전히'는 아니지만. 그렇게 집안일 하면서 보기에 딱 좋은 장르가 주말드라마다. 너무 강렬한 스토리 또는 스펙터클 한 화면은 반드시 화면을 주시하고 집중해서 봐야 하기 때문에 일단 패스. 주말드라마는 아는 맛이어서 편히 볼 수 있다. 아기자기하고 뒷이야기가 궁금하고 가족이 사는 이야기가 나온다.


<화려한 날들>에는 두 노인이 나온다. 아니, 지난주부터 할아버지가 안 나오시니까 한 노인이 나온다. 극 중 나이 88세, 배우의 실제 나이는 84세. 42년생 반효정 배우님이다. 할머니는 얼마 전부터 시니어 모델 스쿨에 다니고 있다. 지난주에는 긴 드레스를 입고 워킹 연습을 하는 모습도 나왔다. 손녀의 유튜브에 나가서 할머니 패션을 선 보였던 것이 계기가 되어, 시니어 모델 제안을 받게 되었다. 두근두근 하는 마음으로 화장을 하고 워킹을 하는 할머니. 할머니의 화려한 날들이 88세인 지금인 것 같아 보는 내내 마음이 좋았다.


드라마 <화려한 날들> 이야기를 글로 쓰고 싶다고 생각하던 차에 그 책이 생각났다. 출판사 백화만발에서 나온 시니어 그림책 <결코 늦지 않았다>. 백화만발의 '시니어 그림책' 시리즈는 5090 세대를 독자로 하는, 5090 세대의 삶을 이야기로 담은 책이다. <결코 늦지 않았다> 속 주인공은 은퇴 후 삶의 의미를 잃는다. 뭘 먹어도 맛이 없고 뭘 해도 재미가 없다. 그러다 결국 병이 나는데, 젊은 의사가 이런 말을 한다.


이젠 좀 쉬시면서 마음을 옴팍 쏟을 곳을 찾아보세요.

<결코 늦지 않았다>, 신현수 글 오희령 그림 (2020), 백화만발


이 나이에 마음을 옴팍 쏟을 곳을 어디서 찾느냐고 한탄하던 할아버지였지만, 젊은 시절의 꿈이 떠오른다. 보디빌더. 가족들은 탐탁지 않아했지만 손주들은 할아버지의 꿈을 응원했고 할아버지는 롤펠로의 시 <결코 늦지 않았다>를 되새기며 서서히 보디빌딩을 시작한다. 그리고 발견한다. 세상에서 제일 재미난 일 보디빌딩을. 그리고 액티브 시니어, 보디빌더가 된다.



마음을 옴팍 쏟을 곳. 그건 어디에 있나.

생각해 보니 즐겁고 신나게 잘 사는 사람들은 다 덕질 유전자가 있는 사람들이다. 덕질 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은 청소년기에도 청년기에도 중년기에도 각 시절마다 덕질의 대상이 있었다. 그게 가수이든 배우이든 운동선수이든. 아니면 어떤 취미이든 대상이든. 그런 유전자는 태어날 때부터 갖고 태어나는 것인지 아니면 개발되는 것인지. 어쨌든 덕질에 마음을 옴팍 쏟으면서 사는 삶은 절대 심심하지도 무료하지도 외롭지도 않을 것이다. 내가 읽기와 쓰기에 마음을 옴팍 쏟은 것과 비슷한 건지도 모른다.


드라마 <화려한 날들> 속 할머니는 패션과 무대에 마음이 옴팍 쏠리는 유전자를 갖고 태어난 것이다. 그걸 88세에 발견한 것일 뿐. 그림책 <결코 늦지 않았다> 속 할아버지는 몸으로 하는 무언가에 마음이 옴팍 쏠리는 재능 보유자였던 것이고. 60대에 발견하다니, 5090 세대의 초반부다. 할아버지는 앞으로 또 어떤 운동에서 재능과 재미를 발견하게 될까.


드라마 <화려한 날들>을 보면서, 문득 노래가 배우고 싶어졌다. 목소리는 꽤 늦게까지 변하지 않는다고 들었다. 그래서 성가대에 노년 단원이 많다고도. 한 사람의 인생을 내내 즐겁게 했던 덕질 유전자는 그 사람의 노년까지 책임 진다. 어쩌면 노년기에 가장 필요한 것은 덕질 유전자, 단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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