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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곱씹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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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까치 Nov 27. 2015

동전 빨래방

보통은 머쓱하고, 왠지 모르게 안쓰러운

독립해 나온지 만 4년이 다 되어가지만, 본가에 있는 내 이불에서는 여전히 볕 냄새가 난다. 50이 넘도록 늘 바지런했던 엄마는 주인 없는 이불이며 베갯잇을 주기적으로 빨아 햇볕에 바싹 말려 놓아두신다. 많아봐야 한 달에 한두 번이지만, 본가에서 하룻밤을 지내는 날이면 나는 늘 누워 이불에 코를 부비적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볕 냄새는 내게 행복감을 준다. 잠도 잘 온다.


자격 조건


자취를 시작하면서, 나는 햇볕 냄새가 나는 이불을 덮는다는 게 얼마나 특별한 일인지 알게 됐다. 이불 깊숙한 곳에 붙은 자격 조건을 뒤늦게 발견한 셈이다. 그 자격 조건은 이랬다. 우선 적당한 용량의 세탁기가 있는 자. 하다못해 욕조라도 있어야 한다. 그것들을 들여놓을만한 크기의 세탁실도 있어야 한다.  그다음은 마당이나 베란다가 있는 자. 줄곧 원룸에 살며 옵션으로 붙은 작은 드럼세탁기를 사용해 온 나는 실격이었다.


물론 시도는 해봤다. 햇볕에 바싹 말린 이불까지는 아니더라도, 깨끗하게 잘 마른 이불을 덮고 싶었다. 적어도 계절에 한 번은 그렇게 하고 싶었다. 평소 빨래를 하듯이 세탁기에 이불을 구겨 넣고 돌렸다. 그런 다음, 원룸 바닥에 이불을 넓게 펴고 보일러를 풀가동했다. 이불은 아주 천천히, 그리고 대충 말랐다. 바스락 거리는 행복감은 없었다. 눅눅한 섬유유연제를 덮는 느낌이었다. 심지어 난방비도 많이 나왔다.


볕 냄새 비슷한



이불의 눅눅함을 그럭저럭 버텨나가던 자취 2년 차의 어느 날. 동네에 새로 들어선 동전빨래방을 발견했다. '이불 빨래, 편리하게 한 방에!'라고 적힌 현수막이 내게 오라 손짓했다. 이불을 걷어들고 빨래방으로 향했다. 저렴하지는 않았지만(건조까지 대략 9천 원),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이불은 바싹 말랐고, 향긋한 바운스(페이퍼형 섬유유연제) 향도 났다.


그 날 이후로 분기에 한 번은 이불을 걷어들고 빨래방에 간다. 볕 냄새에 비할 바는 못되지만, 몇 주 정도는 그럭저럭 '비슷한' 포근함을 느낄 수 있다. 물론, 현수막에 적힌 것처럼 편리하지는 않다. 이불을 짊어지고 빨래방까지 가야 하고, 그곳에서 1시간을 멍 때린 후 다시 짊어지고 돌아와야 한다. 나는 보통 이불을 포개서 가슴에 안고 가는데, 어쩐지 보여주면 안 되는 것들을 온 동네에 내보이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보통은 머쓱하고



보통 빨래방은 무인으로 24시간 운영된다. 손님을 반기는 주인도 없고, 구성도 단출하다. 대여섯 평 정도 되는 공간에 세탁기 몇 대와 건조기 몇 대, 동전 교환기나 바운스 자판기 같은 것들이 들어차 있다. 들고나는 사람들을 위한 물건들은 서너 사람이 앉을 수 있는 좁은 의자와 공중에 매달린 TV 정도다. 무인 운영이라 그런 건지 형광등은 유난히 밝고, 벽은 통유리로 되어있다. 천장에 CCTV도 수 없이 달려있다.


덕분에 빨래방에서는 보통 머쓱하다. 안이 훤하게 들여다보이는 빨래방에 주인도 없이 혼자 앉아있노라면 좀 머쓱하다. 다른 손님과 좁은 의자에 앉아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를 듣고 있는 것도 그렇다. 그 손님이 이성이라면 더 그렇다. 한 번은, 이불을 꺼내 펼쳐 들고 덜 마른 곳이 없는지 이리저리 확인하는 젊은 부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밖에서 타인들의 구깃한 이불이나 빨래를 보는 일은 역시 낯설다.


왠지 모르게 안쓰러운


그럼에도 주말의 빨래방은 늘 만원이다. 온갖 이불이며 빨래들이 빙글빙글 돌고 있다. 빨랫감 같은 차림의 사람들도 종료음을 기다리며 가게를 빙글빙글 돈다. 대부분은 젊은 사람들이고, 이불을 짊어지고 온 혼자 사는 남녀들이다. 어쩌면 나처럼 이불에서 나는 볕 냄새가 그리운, 하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는 이들이겠지 싶다.


햇볕에 바싹 말린 이불을 덮으면 행복하다. 간단하다. 이불을 빨고, 햇볕에 널고, 밤에 덮으면 된다. 그럼 행복하다. 이런 소소한 행복감마저 점차 어려운 일이 되어가는 것 같아, 가끔은 짠하고 안쓰러운 마음이 드는건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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