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 대해 말하기 전에, 박찬욱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다.
내가 그의 영화를 처음 만난 건 대학에 다닐 때였다. 세기말의 괴작들이 쏟아져 나오던 2000년, '공동경비구역 JSA'로 처음 만난 박찬욱은 꽤 신선했다. 그간 무겁게만 다루었던 분단이라는 소재를 긴장감 넘치는 서사와 정교한 연출력을 통해 살짝 비틀었다. 그는 이 영화로 상업적 성공과 비평적 인정을 동시에 얻었다. 스타일리스트로서의 잠재력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셈이다.
그 이후 박찬욱의 스타일은 2002년부터 2005년까지 이어진 '복수 삼부작'에서 폭발적으로 완성된다.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로 이어지는 연작은 지금은 그의 시그니처가 된 잔혹한 요소들의 향연이었다. 극도의 폭력성, 비극적 아이러니, 운명론적인 주제 의식을 교묘히 한데 모아 꼬아냈다.
나는 '올드보이'를 좋아하는데. 그것이 불교의 가치를 담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 이야기를 한 편의 불교 경전으로 보았다. 잔혹한 복수는 결국 파괴적인 순환으로 이어지고, 업의 굴레에 빠져 삶 자체를 지옥으로 만든다는 이야기로 해석했다. 우리 모두가 오대수인 동시에 이우진인 것이다. '올드보이'는 칸 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하며 결국 박찬욱을 국제적인 거장의 반열에 올려주었다.
그가 그것을 원했을지는 잘 모르겠다. 칸 영화제에 자주 초청받고, 여러 번 수상도 하며 '칸이 사랑한 남자'라는 수식어가 붙은 '깐느 박' 박찬욱이 그 별명을 좋아할는지 좀 의문이다. 그는 그런 명예를 진정 바랐던 것일까.
복수 삼부작('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이 보여준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아름다운 잔혹함'이다. 박찬욱의 영화에서 보이는 폭력은 단순한 고통의 묘사를 넘어선다. 극도로 계산되고 형식적인 완벽함의 표현을 위해 끝까지 달린다. 대칭적인 구도, 상징적인 색채 활용, 그리고 롱테이크를 포함한 카메라 움직임의 정교함 등, 익히 알려진 그의 촬영 기법을 보면 알 수 있다. 모든 장면 하나하나가 치밀하게 디자인된 결과물임을 증명한다. 그로 인해 그의 폭력은 심지어 '아름답게' 보이기도 한다. (매우 위험한 일이다.)
마치 웨스 엔더슨 감독을 떠올리는 이러한 완벽주의는 이야기의 당위성 결여마저도 압도하는 시각적 쾌감을 제공한다. 어찌 보면 냉소주의에 맡닿을 수도 있겠다. 많은 사람이, 박찬욱을 단순한 이야기꾼이 아닌 형식주의자로 규정하게 만드는 이유다. 그 고집스러운 장인정신이 내가 결국 그의 작품을 좋아할 수밖에 없는 포인트이기도 하다.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는 작은 소품이었다고 생각한다. 극단으로 치닫는 잔인한 폭력을 계속 그리다가 잠시 쉬고 싶었던 걸까. 개인적으로 아기자기한 동화 같은 박찬욱의 멜로는 그닥 땡기진 않는다.(결말은 따뜻했지만, 꽤 슬픈 내용이었다.) 팀 버튼이 떠오르기도 하는 이 작품에서, 나는 스타일 과잉의 예술가병에 빠진 부잣집 도련님의 장난스러운 탐미주의, 딱 그 정도를 보았다. 당연한 결과이지만 흥행에는 참패했다.
'아가씨'에서 그는 다시 한번 각성했다. 늘 하던 이야기인, '복수'라는 주제를 여성 캐릭터들을 통해 그려냈다. 그 연대와 해방의 서사가 진정한 페미니즘의 표현이었는지는 살짝 의문이긴 하다. 극 내에서 남성 중심의 표현이 종종 눈에 띄었고, 여성의 몸과 욕망을 표현하는 방식이 지극히 남성의 시각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나는 박찬욱을 페미니스트라고 단편적이며 평면적으로 정의 내리기 싫다.
비교적 최근작인 '헤어질 결심'은 기존 작품들과 조금 달랐다. 늘 난무했던 폭력과 피가 차지했던 자리를 섬세한 감정과 기묘한 서스펜스가 채웠기 때문이다. 물론 심미주의에 기반한 형식적 완벽함은 유지되었다. 하지만 기존처럼 파국적인 운명을 그렸다기보다는, 인물의 내면적 동요와 닿을 수 없는 사랑에 좀 더 포커싱 한 서사를 표현했다.
이는 그가 자신의 익숙한 '잔혹하고도 파괴적인 동화' 스타일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노력을 시도했음을 보여준다. 나는 '헤어질 결심'을 보고 그가 ‘예술가병’에서 벗어나고 있다고 생각했다. 꽤나 용감한 시도였다. 더 이상 칸은 그를 불러주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래서 그의 다음 작품이 더욱 기대되었다.
그러다가 이번 영화 '어쩔수가없다'가 나왔다.
드디어 내가 기다리던 박찬욱의 '변화'를 본격적으로 확인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나는 이 영화를 복싱을 하는 후배 '리까'와 함께 봤다. 내가 부러 연락해서 그와 같이 갔다. 나는 어찌 되었든 열광할 것이 분명했으니, 팬인 나의 입장과 다른 타인의 시선과 반응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리까도 나쁘지 않은 평을 내려 주었다.)
감독 박찬욱은 이번 영화에서 본격적으로 숙명적인 감정의 미로를 탐구했다. 그것도 '중년의 코미디'로 말이다. 나는 이 영화를 멜로가 2% 첨가된 '블랙 코미디'로 정의하고 싶다.
제목에서 느껴지듯, 이 영화는 인간의 의지로는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의 흐름과 비극적 아이러니에 초점을 맞춘다. 그간 박찬욱이 즐겨 그렸던 폭력이 배제된 자리는 엇갈리는 시선, 절제된 대화, 그리고 비현실적인 서스펜스가 채운다.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섬세하고 농밀한 감정의 파동을 경험했다. 그건 그간 박찬욱 감독의 영화에서 느꼈던 정체 모를 불쾌감과는 다른 감정이었다. 박찬욱 감독은 복수 대신 사랑이라는 가장 일반적인 감정을 통해, 한 개인의 삶이 어떻게 파국으로 치달릴 수 있는지 담담하게 그려낸다. (냉혹할 정도로 담담하다.)
폭발적인 감정의 분출 없이도 깊은 여운을 남기는, 가장 박찬욱다운 코미디의 탄생이라고 평할 만하다. 지금까지 그의 어떤 영화보다 대중적이다. 물론 형식적인 면에서 박찬욱 감독 특유의 미학적 완벽주의는 여전히 과하다 싶을 정도로 빛을 발한다. 장면 하나하나가 예술 작품을 보는 듯하며, 준비되지 않는 움직임이나 프레임은 단 하나도 없다고 느껴진다. 이는 나만의 착각이 아니다. 보면 알 수 있다. 모든 앵글과 색감, 소품의 배치는 서사의 긴장감을 극대화하고, 그 형식 자체가 스토리텔링의 도구로 완벽하게 활용된다. 목적 없는 배치는 단 하나도 없어 보인다.
굳이 영화 속 조용필의 음악이라던가, 배우들의 대사 하나하나까지 칭찬할 생각은 없다. 그것 말고도 이 영화에서 칭찬하고픈 점은 차고 넘치기 때문이다.
내가 극 중 주인공의 나이와 비슷해서일까. 주인공 만수의 굴욕과 슬픔, 애절함, 간절함은 절절하게 가슴속 깊이 와닿았다. 많은 중년의 남성들이 이 영화를 보며 코미디 장면에서도 울고 말았다는 후기는 당연하게 느껴진다. 젊건 나이 들건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고, 언제든 맞닥뜨릴 수 있는 불가피한 상황을 바라보며 나는 겉으로 웃고 속으로 울었다.
박찬욱 감독은 스타일 과잉이라는 비판에서 한 발 물러났다. 인정하고 자시고 할 것 없이 그저 조용히 물러났다. 대신, 그 형식적인 완벽함을 인간의 본질적인 고독과 사랑이라는 주제에 녹여냈다. 연출의 힘이 단순한 시각적 카타르시스에만 국한되지 않고, 관람객들에게 가 닿아 결국 정서적 공감으로 확장되는, 그런 경지에 도달했다.
박찬욱이 지금까지 걸어온 길은 장르의 경계를 부수고 끊임없이 자신의 스타일을 해체하며 재구성하는 한 예술가의 고뇌였다. 잔혹하고도 파괴적인 냉소주의자로 시작해 감각적인 탐미주의자를 거쳐, 탕웨이로부터 멜로를 끌어내는 영역까지 그의 시각은 확장하며 걸었다. 많은 비평가들의 지적처럼 그의 작품은 종종 형식적 완벽함의 그림자에 가려지거나, 거친 폭력 묘사의 잔혹성 문제에 직면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논쟁이야말로 그가 여전히 영화계에 가장 첨예한 질문을 던지는, 살아있는 예술적 거장임을 나타내는 방증이다. 단순한 블록버스터 흥행 감독은 이런 논쟁의 근처에도 오지 못한다. 아니 거들떠보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그들은 제발 그들의 영역에서 그냥 머물길. 스크린 속에서 철학과 예술을 담론하는 영역은 박찬욱이 굳건히 지키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무엇보다 박찬욱 감독의 1,000만 영화 흥행을 바란다. 그가 단순히 '깐느 박'을 넘어 '천만 박'으로 불리며 예술과 흥행 두 마리 토끼를 다 거머쥔, 진정한 의미의 거장이 되기를 바란다. 이번 영화 '어쩔수가없다'를 통해 그 첫 계단을 한 걸음 올랐다고 생각하고 싶다.
그의 다음 영화를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