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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교자, 시간을 넘어 남을 따뜻한 국물의 기억

by 이서


시청 근처에서 근무할 때, 점심을 혼자 먹었다.


나는 대부분 회사 점심은 혼자 먹는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연차가 쌓여서 좋은 점은, 점심 식사에 억지로 따라가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왜 직장인은 점심을 혼자 먹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따로 글을 하나 써도 될 정도인데, 그건 나중에 이야기해 보자.


회사 근처 식당이 지겨울 때면, 나는 걸어서 명동에 갔다. 딱히 맛집을 찾으러 간 건 아니다. 그저 걷고 싶었을 뿐. 마침 명동에는 유명한 칼국수 집이 있는데 그게 바로 '명동교자'다. 칼국수를 좋아했던 나는 '명동=명동교자'라는 공식을 세우고, 명동에 혼자 갈 때마다 으레 습관처럼 칼국수를 먹었다.


명동 칼국수는 나 어릴 적에 아버지가 가족들에게 소개해 준 가게다. 아버지는 젊은 시절 명동에서 근무했었는데, 그 덕에 근처 맛집을 적잖이 알고 계셨다. '하동관'도 아버지가 나를 데리고 가서 곰탕을 사주셨던 가게다. 당시엔 그 맑은 국물이 왜 맛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이젠 잘 안다.)


명동교자는 혼자 먹기에 좋은 가게였다. 혼자 왔다고 말하면 자연스레 1인석으로 안내하고 자리에 칸막이를 쳐준다. 1인석이 흔치 않았던 그 당시에, 나는 칸막이 시스템에 마음이 편해졌다. 그래서 그런지 더 맛있게 칼국수를 즐길 수 있었다.




명동교자는 1966년 '장수장'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1970년, '명동 칼국수'로 상호를 변경했다. 명동 칼국수가 인기를 얻자, 한국의 모든 칼국수집이 너도나도 상호를 도용하였다. 싸구려 이미지를 그대로 둘 수 없었던 가게는, 1978년 '명동교자'로 어쩔 수 없이 상호를 변경하였다고 한다. 대한민국에 흔하디 흔한 표절, 도용의 역사다. 나는 이 문제가, 한국에서 한 분야의 장인이 탄생하지 않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국민성 이야기까지 더 나아가진 않겠다.)


당시만 해도 칼국수는 서민들의 끼니를 책임지는 소박한 음식이었다. 고급재료를 써서 끓일 수 없었기에, 국물은 멸치나 조개 등으로 우려내어 맑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명동교자는 달랐다. 명동교자의 칼국수는 '명동교자 칼국수'라는 하나의 장르를 구축했을 정도로 독특한 개성을 지니고 있다. 일반적인 칼국수가 해물 베이스의 시원하고 맑은 맛을 낸다면, 명동교자는 정반대의 길을 걷는다.


당시로선 파격적이었다. 사골이나 닭고기를 푹 고아낸 듯한 불투명하고 진한 육수로 칼국수를 만든다. 마치 곰탕처럼 깊고 고소한 맛이 입안을 감싸며, 든든한 포만감을 선사한다. 명동교자의 육수는 단순한 국물이 아니라 '진국'의 정수를 보여준다. 한국인이 사랑하는 바로 그 국물이다. 이 진한 육수 덕분에 쌀쌀한 날씨에도 속을 따뜻하게 채워주는 힘이 있다. 그래서 겨울에 먹으면 더 맛있고 힘이 난다.


명동교자 칼국수의 맛을 완성하는 화룡점정은 바로 김치다. 마늘이 잔뜩 들어간 겉절이 스타일의 이 김치는 다른 식당에서는 맛볼 수 없는 강렬한 개성을 자랑한다. 젓갈과 고춧가루가 듬뿍 들어가 매우 맵다. 게다가 생마늘의 알싸함이 가히 폭탄급이다.


이 마늘 김치는 칼국수와 완벽한 대비를 이룬다. 서로 반대되는 색이 서로를 더 강하게 부각시키며 채도를 높이는 '보색 효과'처럼 '칼국수'와 '김치'가 좋은 팀웤을 이룬다. 마치 의도된 듯하다.


자칫 진하고 느끼할 수 있는 고기 육수의 칼국수를 한 입 먹고, 이 강렬하고 자극적인 김치를 베어 물면 입안의 느끼함이 한순간에 정리된다. 이처럼 진한 칼국수와 매운 김치가 서로의 단점을 보완하며 시너지를 내는 조합은, 명동교자가 수십 년간 미식가들의 사랑을 받아온 이유를 명확히 보여준다.




아내와 아들, 지금 우리 가족 모두 명동교자를 좋아한다. 잊을만하면 가서 먹는다. 분점을 내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명동교자인데, 명동을 제외한 유일한 지점이 이태원에 있다. 오늘은 세 가족이 명동교자 이태원 점을 찾았다.


비가 내리는데도 이미 대기 줄이 길다.


1층뿐만 아니라,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도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2층으로 안내받았다.

많은 사람들이(주로 가족 단위) 삼삼오오 모여 앉아 진한 국물을 즐기고 있었다.


우선 칼국수가 나왔다.

예의 그 걸쭉한 국물이 반갑게 인사한다.


고기 국물이란 걸 바로 알 수 있다.

점도 자체가 다른 칼국수집과 다르다.


손칼국수는 아니다.

기계로 뽑아냈는데, 두껍지도 얇지도 않은 딱 적당한 사이즈다.

뭉친 밀가루의 식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여긴 부드럽고 쫄깃한 그 '적절한 포인트'를 잘 잡아냈다.


예전에는 김치를 더 먹으려면 직원분께 따로 부탁해야 했다. 그래서 김치통을 들고 매장 내를 돌아다니는 직원분이 계셨다. 근데 요새는 이렇게 김치를 덜어먹을 수 있게 마련해 놨더라. 잘 바뀐 정책인 것 같다. 먹는 사람에게도 서빙하는 사람에게도.


바로 그 마늘 폭탄 김치다.

나는 어쩌면 칼국수보다, 이 김치를 먹고 싶어서 여길 찾는 것일 수도 있겠다.


칼국수와 김치의 조합은 가히 완벽하다고 할 만하다.

별 것 없는 재료들의 만남인데, 어디서 이 시너지가 나오는 걸까.


비빔국수도 시켜봤다.

새콤달콤한 양념의 우리가 아는 그 비빔국수 맛이 맞다. 비빔국수에도 마늘이 엄청나게 들어가 있다. 양념에서 고기가 씹히는 점과 클로렐라 해초를 넣어 반죽한 면(면이 초록색인 이유)이 차별점이 되겠다.


은근히 별미라, 여럿이 와서 한 그릇 시켜 나눠먹으면 딱 알맞다.


'명동교자'의 교자는 '소를 넣은 만두'라는 뜻인데. 상호답게 만두가 유명하다. 모양을 보면 알겠지만 한국식 만두보다는 중국 정통 교자를 계승한 것으로 보인다. 속이 비칠 정도로 얇은 피에 돼지고기와 부추와 채소 등이 들어가 있다.


열심히 즐기다 보니, 어느새 다 먹었다.

완료


가족이 모두 함께 가서 즐기는 식사는 단순한 끼니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내 아버지가 언젠가 이 메뉴를 나에게 알려 준 것처럼, 이제 내가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 아들에게 칼국수를 소개해준다.


진한 육수와 코끝을 찡하게 하는 김치의 강렬한 맛은 결국 추억의 매개체가 된다. 언젠가 먼 훗날 이 식탁에 내가 없더라도, 아들은 이 식당의 문을 열고 들어설 때마다,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칼국수를 마주할 때마다, 우리 가족의 소중했던 시간과 대화의 조각들을 떠올릴 것이다.


이 자리에 함께 앉은 아들이 진한 칼국수를 먹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가족이 함께 먹는 이 뜨거운 한 그릇이 오늘 우리의 대화와 웃음소리를 담아, 아들에게도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가족의 맛으로 기억됐으면 한다.


추억은 남는다.

나는 그랬으면 좋겠다.


오늘도 잘 먹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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