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데스노트'는 유명 일본 만화인 '데스노트'를 원작으로 만든 작품이다. 일본에서 최단기간 100만 부 판매를 돌파했으며 12권밖에 안 되는 분량인데도 3,000만 권이 판매될 정도의 초인기작이다.
나는 원작 만화를 재미있게 읽었는데, 아시는 분이 있을는지.(혹시, 설마, 이 작품조차 이미 과거의 유물이 되어버린 걸까. 나는 요새 취향을 고백하기가 겁난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이미 다 잊혀진 것들이더라.)
2008년 MBC 가요대제전.
난 아직도 궁금하다.
당시 박진영이 정말 '류크'를 코스프레한 것인지 말이다. ('비' 또한 라이토와 비슷하지 않은가.)
'데스노트'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우연히 '데스노트'라는 미지의(?) 공책을 습득하게 된 천재 고등학생 야가미 라이토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라이토는 이름을 적는 것만으로 대상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이 노트를 사용해 범죄자들을 처단하며 자신을 새로운 시대의 신, '키라'로 칭한다. 그는 폭력 없는 이상 사회를 실현하겠다는 명분 아래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한다. 이에 맞서 정체불명의 명탐정 엘(L)이 등장하여 라이토의 행위를 저지하려 하고, 이들의 치밀한 두뇌 싸움이 벌어지는데? ('출발 비디오 여행'이 떠오르는군.)
재미있는 내용이다. 일본 만화 특유의 깊은 철학적 색채가 짙다. 정의의 실현과 절대 권력의 타락이라는 양면적인 주제 의식을 깊이 있게 탐구한다. 거기에 류크 등이 진짜 신의 눈으로 인간을 바라보는 냉소적인 시선을 던지며, 내뱉는 대사 하나하나가 나를 고민하게 만들었더랬다.
주인공 야가미 라이토는 '데스노트'라는 절대적인 살해 권력을 손에 넣고, 법으로 심판할 수 없는 흉악범들을 제거하고 이상적인 세상을 만들겠다는 정의감에 불타오른다. 하지만, 그 신념이 오염되어, 그는 점차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며 반대 세력까지도 무자비하게 제거하는 '키라'라는 독재적인 존재로 변모한다. 내가 요새 고민하는 부분과 맞닿아있다. 정치세력의 좌와 우는 과연 절대선과 악인가? 서로 짓밟아야 할 존재인 건가? 무엇이든 극단으로 치달으면 그 결과는 파국이 아닐까?
만화 '데스노트'는 과연 법을 초월한 개인의 심판이 진정한 정의인지, 그리고 범죄 없는 유토피아를 건설한다는 명목이 절대 권력자의 오만과 광기를 정당화할 수 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자경단'의 존재 의미와도 직결된다. 내가 좋아하는 '배트맨'이라는 캐릭터도 결국 이런 질문에 대해 답해야 한다. 어떻습니까 배트맨씨, 당신은 '정의'입니까?
뮤지컬을 보기 위해 신도림 디큐브아트센터를 찾았다.
디큐브아트센터는 신도림 일대의 도시 재생 사업을 통해 탄생한 복합 문화 공간이다. 신도림 디큐브시티 내에 자리했다. 잘 지어진 공연장으로, 까다로운 기술적 요건을 요구하는 대형 라이선스 뮤지컬을 주로 유치했다. ‘맘마미아!', 화려한 군무와 연출이 돋보이는 '시카고' 등이 여러 차례 이곳 무대에 올랐다. 스케일이 큰 '아이다'와 '빌리 엘리어트', 그리고 최근 '마틸다' 등 국제적인 명성을 가진 작품들도 연이어 공연된, 음향 시설과 무대 기술을 제대로 갖춘 전문 공연장이다.
뮤지컬로 탄생한 '데스노트'는 한국과 일본 공동 제작이다. (나는 요새 제작에 주목한다. 해외 오리지널과 국내 독립 제작의 차이가 크다.) 2015년 초연되었으며. 홍광호, 김준수와 같은 배우들이 야가미 라이토와 엘(L) 역에 캐스팅되면서 관객들의 사랑을 받았다. 전회차 매진이었다는 소문. 원작 만화의 팬들도 많은 데다, 워낙 유명한 배우들이 가세해 시너지를 낸 것으로 보인다.
왜 제작을 따져봤냐면 오리지널을 살렸는지 궁금해서인데, 이 작품은 일본 작품과 달리 OD컴퍼니가 논레플리카(Non Replica) 버전으로 별도 제작했다고 한다. 3면(바닥-벽면-천장)을 LED로 채운 무대가 바로 그 차이를 보여준다. 이 제작으로 2015년, 2017년, 2022년, 2023년(앵콜)에 이은 사연째이다.
실제로 공연을 관람해 보니.
3면을 둘러싼 LED 패널을 활용한 무대 연출은 새로웠다. 하지만, 딱 그 정도. 이걸 뮤지컬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대부분의 무대 장치, 배경 및 효과를 화면으로 처리했더라. 연극과 영화 그 중간의 어디쯤으로 부르고 싶다. 극도의 원가절감?이라고 본다. 이럴 거면 영화를 봤죠 제가. 무엇보다. LED가 번쩍번쩍해서 눈이 너무 아파요.
내가 뮤지컬 공연을 찾는 건, 디지털에서 벗어나 아날로그의 사람과 무대장치, 그리고 음악을 직접 현장에서 ‘진짜’로 체험하고 싶어서다. ‘화면’을 보러 간 건 아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 천재 고등학생 라이토와 명탐정 엘(L)의 팽팽한 대결 구도는 극의 서스펜스를 이끌어가는 핵심이다. 연기력과 가창력 없이는 소화하기 힘들다. 그래서 '데스노트'의 역대 출연 배우들은 캐릭터와의 높은 싱크로율과 탄탄한 실력으로 늘 호평을 받아왔다.(고 한다.)
이번 공연은 여러모로 주인공들의 연기와 가창력에서 실망스러웠다. 누구 한 명이랄 것 없이 모든 출연자가 비슷했다.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노래들이 시종일관 나 스스로에게 묻게 만들었다. 지금 이게 맞는 건가? 내가 뭘 잘못 듣고 있나.
사신 캐릭터인 류크의 특유의 음산하면서도 익살스러운 매력이 유일한 이 극의 활력이었다. 류크를 연기한 양승리 배우의 연기가 깊은 인상을 남겼다.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느낌.
뭐니 뭐니 해도 이 만화 원작의 에센스는 바로 스토리. 핵심적인 매력은 바로 야가미 라이토와 탐정 엘(L)이라는 두 천재가 벌이는 숨 막히는 두뇌 게임 그 자체다.
'키라'로 활동하며 정의를 실현하려는 라이토와 그를 잡으려는 엘의 대결은 복잡스럽다. 단순한 선악 구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두 '괴물'의 격돌이야말로 이 작품을 관통하는 가장 짜릿한 관람 포인트인데, 그 점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 둘의 대결을 유치한 어린이 감정싸움으로만 그린 점이 안타깝다.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이들의 심리전과 전략 싸움은 허술하고 힘이 빠졌다. 치밀하게 전개되며, 각자가 가진 비장의 무기인 '데스노트'와 '뛰어난 추리력'을 활용해 팽팽하게 맞섰던 만화 원작과 너무 비교가 됐다.
괜찮다. 그래도 만화 원작은 여전히 남아있으니. 모든 만화를 실사로 멋지게 표현할 수는 없는 법이다. 실제로 많은 실패작들이 있어왔잖는가. 이 작품도 마찬가지일 뿐이다. 또 혹시 아는가, 일본 어딘가에서 다시 ‘데스노트’를 제대로 실사화 한 뮤지컬이 나올 수도 있으니. 그날을 기다려 본다.
원작 만화만을 놓고 본다면, 나는 지금도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흥미롭다.
'내가 야가미 라이토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어떻게 들키지 않고 키라로서 군림할 수 있었을까?'
만약 당신에게 전지전능한 무한의 힘이 주어진다면, 무엇을 하겠습니까?
권력을 가진 스스로가 어떻게 변해갈지 궁금하지 않으신지.
오늘도 잘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