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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가 되면, 아무도 지적해주지 않는다

by 이서


무라카미 하루키는 한 소설에서 말했다.


‘모든 중년은 추하다'


왜 ‘중년은 추하다’고 하는가. 그야말로 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추해지는가. 그렇게 행동하기 때문이다. 무례하고 몰지각한 행동을 하기 때문이다. 중년이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지, 혹시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나도 중년에 접어든 지 이미 한참이다. 나이가 들어서 가장 슬픈 점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아무도 나에게 피드백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40대가 되면 주변에서 우리의 아주 사소한 실수나 부족한 부분을 지적해 주는 사람이 사라진다. 젊을 때라면 잔소리처럼 들렸을 말들이 온데간데없다.


나이가 들면 몸의 노화와 함께 지력과 체력이 떨어진다. 그 결과, 젊은 시절에는 명확했던 사리분별이 점점 어려워지고 판단력이 흐려진다. 이성을 통제했던 지력이 약해지면서 본능적이고 동물에 가까운 욕망이 더 큰 자리를 차지한다.


체력이 약해지니, 예의고 뭐고 편한 게 장땡이다. 새치기도 하고, 인파가 많은 곳에서는 손으로 사람들을 마구 밀치며 나아가기도 한다. 지력이 떨어지니 회사에선 젊은 직원들한테 자기가 할 일을 얼레벌레 떠넘긴다. 내가 힘든데 뭐 어때라는 마인드. 나이가 들수록 품위를 지켜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중년은 점점 추해진다.


우리 어릴 적 청소년기에도 물론 그랬다. 그때도 이성의 힘이 약해서 본능적으로 행동하기도 했다. 무례한 일탈도 하고. 하지만 그때는 괜찮았다. 왜? 누군가 우리에게 잔소리하고 지적해 주었기 때문이다. 어릴 때 카페에서 뛰어다니면, 엄마가 '사람 많은 데서 그러는 거 아냐'라고 설명해 주고 고쳐주셨다. 수업시간에 친구들과 떠들면 선생님이 '그러지 말라'라고 지적해 주셨다. 그래서 우리는 괜찮았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 중년이 되면 달라진다.


아무에게나 막말을 내뱉는 무례함, 기침할 때 입을 가리라는 사소한 충고, 공공장소에서 크게 떠들지 말라는 당연한 예절, 심지어 회사에서 자기 일을 부하직원에게 떠넘기지 말라는 것까지. 이제 아무도 그런 것들을 당신에게 직접적으로 지적해주지 않는다.


젊은 사람들은 그런 중년들을 그냥 피한다. 멀리 돌아간다. 거리를 둔다. 그냥 그렇게 살라고 내버려 둔다. 그럼 중년은 착각하게 된다. ‘아, 나 그럭저럭 괜찮군'이라는 큰 착각. 우리는 그저 '적당히 괜찮은' 어른처럼 보이는 줄, 그렇게 스스로를 믿고 착각 속에 살아가게 된다.


그런 착각이 쌓여, 중년은 추해진다.




뭐 그렇다고, 아무에게나 지적받으란 말은 아니다. 동네 북이 되는 게 정답은 아니니까. 모든 지적을 환영해야 할 필요는 없다. 당신이 원하는 피드백이란 게 꼰대처럼 구는 직장 상사나, 당신의 성공을 질투하는 동료에게 듣고 싶은 지적은 아닐 것이다. 지적은 내가 지적받고 싶은 사람에게만 받아야 한다.


지적은, 내가 지적받고 싶은 사람에게만 받아야 한다.


우리가 찾아야 할 지적은, 내가 진정으로 어려울 때 조언을 구하고 싶은 사람, 내 성장을 진심으로 돕는 사람, 삶의 자세 자체가 존경스러운 사람에게서 오는 피드백이다. 이 원칙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내가 의견을 구할 수 있는 수준의 사람에게만 귀중한 시간을 내어 그들의 지적을 경청해야 한다. 그 수준을 벗어난 인간의 지적은 성장의 밑거름이 아닌 그저 소음일 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이가 들어서도 좋은 멘토나 조언자를 곁에 두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훌륭한 사람이 40대가 되었다고 내 삶에 뿅 하고 갑자기 나타나진 않는다. 그들은 이미 20대, 30대부터 꾸준히 서로를 찾고 관계를 맺어왔기 때문이다.


동서양, 과거현재를 막론하고 모든 부유층들이 기를 쓰고 좋은 모임과 네트워크에 참여하려고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맹모삼천지교와도 연관이 있고, ‘좋은 학군'의 학교에 아이를 보내야 하는 것과도 일치한다. 당신 역시 늦어도 20대부터 선별적인 관계를 맺으며 좋은 사람들을 찾고 인연을 만들어 나갔어야 한다.




잘 안될 거다. 나보다 뛰어난 사람을 찾으려 해도 잘 찾아지지 않을 때가 많다. 왜냐하면 '유유상종(類類相從)', 즉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끼리 어울리기 때문이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의 평균이 바로 나의 수준을 나타내는 지표인 것이다. 내가 수준 이하라면, ‘좋은 사람들'은 귀신같이 그것을 알아채고 나를 피할 것이다. 그러니 주변에 좋은 사람이 없는 거다.


좀 역설적이긴 하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 그런 사람을 찾지만, 그들은 나를 피한다니. '경력 같은 신입' 뭐 그런 건가. 하지만 어쩌랴, 그게 세상의 이치인 걸. 결국, 나보다 뛰어난 사람을 만나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은, '내가 먼저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 방법 밖에 없다.


내가 먼저 좋은 사람이 된다.


다정하고, 예의 바르며, 겸손하고, 친절해서 누구나 편안하게 다가와 의견을 물어볼 수 있는 사람. 끊임없이 배우고 성장하려는 자세를 가진 사람. 이런 모습으로 조금씩 차근차근 좋은 어른이 되어가는 것이다.




내가 먼저 존경할 만한 사람이 되어가면, 당신의 주변은 신기하게도 바뀐다. 당신이 의지하고 지적받고 싶어 했던, 그런 좋은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게 된다. 둘러보면, 어느새 당신은 당신과 비슷한 결을 가진, 서로를 격려하고 지적할 수 있는 훌륭한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게 될 것이다.


이 모든 것 중 가장 중요한 곳은 바로 직장이다. 우리는 하루의 대부분을 그곳에서 보내기 때문이다. 그 공간이 나를 성장시키는 사람으로 가득 차 있는지, 아니면 나를 정체시키는 사람으로 가득 차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


지금 출근해 이 글을 읽고 있다면, 잠시 주변을 한번 둘러보라.

당신은 지금, 어디에 앉아 있는가?

혹시, 서서히 ‘추한 중년'이 되어 가고 있진 않은가?


결정은 당신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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