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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INFJ 여행기

걷기, 강남역에서 인천까지

걸으면 많은 것이 해결됩니다

by 이서


도시는 ‘빠름’의 상징이다. 도로 위를 쌩쌩 달리는 자동차, 약속 시간을 맞추기 위해 뛰어가는 사람들, 모든 것이 효율과 속도를 외친다. 나는 가끔 그 빠른 흐름을 거부하고 두 발로만 걷는다. 자동차나 버스를 타면 몇 분이면 도착할 거리를 굳이 느릿느릿 걷는다. 도시를 눈에 담는다.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혼자 천천히 걷는다. 수련이다. 고집스러운 행동이다.


걸으면서 도시를 새롭게 본다. 복잡한 내비게이션의 안내는 잠시 잊어버리고, 발로 직접 땅을 밟으며 도시의 진짜 모습을 하나씩 다시 관찰한다. 사람들은 차에 타, 내비게이션을 켜고, 바쁘게 목적지만을 향해 달린다. 나는 그 앞에서 잠시 멈춘다. 그리고 걷는다.


그럴 때 나는, 모두가 바쁘게 움직이는 곳에서 혼자 멈춰 서서 구경하는 사람 같다. 이 멈춤의 순간, 크고 복잡했던 세상은 작고 재미있는 관찰 거리로 바뀐다. 흥미진진하다. 모두가 지나쳐 가는 도시의 일상을 홀로 지켜보는 재미다.




마침 인천에 갈 일이 있다.

잘됐다. 걸어가 보자.


일단 네이버 지도상으로, 31km 거리. 8시간 23분 예상이다.

좀 먼데. 갈 수 있을까?

일단 해보자. 나는 할 수 있다.



아침 일찍 가야 여유 있게 걸을 수 있다.

06:00에 출발한다. 아직 깜깜하다. 온도는 영하. 살짝 춥다.

공기가 맑고 시원하다. 깊게 심호흡하며 걷는다. 폐가 깨끗이 청소되는 기분이다.

강남역 앞은 인적하나 없이 조용하다.

가보자.


교대역을 지난다.


서초역을 지나는데도 여전히 깜깜하다.

나 무사히 갈 수 있겠지.


해가 뜬다.

현충원을 지난다.


흑석역을 지난다.


노량진역을 지난다.

노량진역은 예전 학교 다닐 때 매일 왔던 곳인데, 수 십 년 만에 다시 찾는다. 저 좁은 개찰구와 계단도 여전하네. 저리로 뛰어나와서, 마을버스를 탔었다. 당시에 나는, 당연히 유명 건축가가 될 줄 알았었지.(하지만 현실은.)


대방역을 지난다.


너무 춥다. 따뜻한 커피 한잔 샀다.

따뜻하게 마신다. 손에 들고 있으면 핫팩 용도도 된다.

커피를 얻었다 (+1)


신길역을 지난다.


영등포역을 지난다.


아래 사진의 '베아링' 처럼, 외국어 단어가 우리말처럼 변해서 자리 잡은 말들을 들으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따뜻해진다. 원래 영어 단어인데, 옛날 어르신들이 편한 대로 소리 내어 부르면서 만들어진 정겨운 말들이기 때문이다. 물론 표준어는 아니다. '오도바이', '츄리닝', '잠바' 모두 마찬가지. 이런 한국식 외래어들은 공식적인 말은 아니지만, 어릴 적 놀이터에서 뛰놀던 기억처럼 친근하고 정겨운 느낌을 줘서 개인적으로 좋아한다. 마치 오래된 앨범을 보듯 따뜻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간판의 '베아링'이 정겹다


양평역을 지난다.


안양천을 건넌다. 생각보다 넓다.

새가 있을까 해서 기다려봤는데, 새는 없더라.


양천구에 들어왔다.


오목교 역을 지난다.


간판 덕후로서, 이렇게 잘 정비된 간판은 예술에 가깝다고 본다.

건물주의 의지가 느껴진다. 한참을 쳐다봤다. 마음에 안정을 가져다준다.


목동역을 지난다.

새삼, 겨울이 가까워졌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또 한 해가 간다.


경인 고속도로 진입하는 신월 IC 근처다. 슬슬 서울 외곽 느낌이 난다.

그나저나 차가 정말 많다. 정체가 심하다. 이 많은 차들은 대체 어디로 가는 걸까.


진짜 흥미로운 이야기는 큰길을 벗어난 주변 골목에서 시작된다. 골목에서 발견한, 아주 오래되어 색이 바랜 세탁소 간판이나, 벽돌 틈 사이로 용케 뿌리내린 풀 한 포기, 혹은 옥상에서 이불을 털다가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는 이웃의 모습 등을 발견한다. 이런 평범한 장면들은 도시의 공식적인 역사에는 기록되지 않는다. 숨겨진 이야기들이다.

알록달록 예쁘다


날씨가 걷기에 좋다. 적당히 시원하다. 공기가 차다.

폐 속 깊게 날카로운 산소가 들어온다. 숨을 깊게 쉬면서 걷는다.

감사한 날이다.


크리스마스가 가깝긴 한가 보네.

두 팔 벌려 나를 환영해 주는구나.

(하지만 가게로 들어갈 생각은 없어요.)


배고프다. 점심시간 상관없이 그냥 걸으려고 했는데, 지나치게 배가 고프다.

길가에 있는 홍콩반점에 그냥 들어왔다. 동네 어르신들이 삼삼오오 모여, 짜장면에 소주를 즐기고 계신다. 낭만 있다.

나는 짜장면+군만두 반접시 세트가 있어서 주문했다. 이런 적당한 조합의 메뉴가 많이 있으면 좋겠다. 걸어야 해서, 즐길 새도 없이 얼른 먹고 나왔다.

회복 (체력+10)


배가 부르니 힘이 난다.

열심히 걸어, 부천에 진입한다.


김포공항 옆이라서 계속 비행기가 뜬다. 사진에는 잘 표현되지 않는데, 실제로 비행기가 가까이 뜬다. 소리도 크다. 동네 주민들은 피곤하겠다.


갈대숲. 그나저나 비 내릴 것 같은 날씨다. 얼른 걸어보자.


이런 풍경들은 너무 평범하다. 차를 타고 지나가면 눈여겨볼 수 없다. 하지만 걷는 사람은 다르다. 속도를 포기한 덕분에, 나는 이 무심한 풍경들 속에서 흥미로운 미감을 발견한다. SNS나 유튜브 같은 건 끼어들 틈이 없다. 시간의 흔적만이 남아 있다.


경기둘레길이라는 길이 있나 보다. 제주올레길 같은 개념인가.


부천 들어와서부턴 길이 심심하다

편의점 하나 없는 길이다. 간식 하나 사 먹고 싶은데, 아무것도 없다.

밤늦게나 여자 혼자는 위험할 것 같다.

나에겐 오히려 좋다. '아무 생각 없이' 걷을 수 있다.

이런 길이 계속된다.


굴포천을 건넌다. 공단 근처라 그런지 수질이 좋지는 않다.


드디어 인천에 들어간다.


계양 경기장을 지난다.

약간 동대문 DDP 하위호환 버전 같은데. (알아보니 '삼우'가 설계했단다.)


드디어, 작전역에 도착했다.


9시간 조금 넘게 걸렸다.

마지막에는 다리가 아팠다. 그래서 자주 벤치에서 쉬었다.

총 걸은 거리는 32km를 살짝 넘었다. (실제로 걸어보니 네이버 지도보다 조금 더 나오네.)


나에게 걷기는 도시의 빠른 속도와 효율에 일부러 맞서는 방법이다. 느린 방식으로 즐기는 나만의 오락이라고 부르면 이상하게 보이려나. 이른 새벽이라도, 길에 아무도 없어도, 나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도시가 보여주는 작은 드라마들을 감상한다. 수많은 거리를 지나며, 내 눈은 기억을 담는다. 그 사이의 모든 순간을 발로 충실히 걸어왔다는 증거를 남긴다. 그때, 도시의 풍경들은 나에게만 특별한 이야기를 건네준다.


30km 이상을 걸으면, 근육통이 온다는 것도 배웠다. 다리의 어느 부분이 고통을 호소하는지 정확한 지점도 알았다. 나는 아직 이 정도 거리를 감당할 수준은 아닌가 보다. 괜찮다. 계속 단련하면 몸이 익숙해진다. 그렇게 성장하는 법이다. 계속 걸어보자.


오늘도 잘 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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