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에서 살다 보니, 이따금씩 인연이 닿는 사람들과 연락처를 주고받게 된다. 이때 저장할 이름으로, 한국이라면 이름 석 자를 자연스럽게 말하면 되지만, 이곳에서는 이야기가 조금 다르다.
내 이름을 알파벳으로 적으면 무려 열한 글자나 되어, 현지인들에게는 발음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나는 그들이 부르기 편하도록 세 글자 정도로 줄인 이름을 사용한다.
이번에는 내가 이름을 물어볼 차례가 되면,
“모하메드라고 저장하면 돼.“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는 김춘수 시인의 말대로 나 또한 그들의 이름을 정확하게 저장하고 싶어서 다시 물었다.
“오 고마워, 풀네임도 알려줄 수 있어? 최대한 기억할 수 있게 잘 저장하고 싶어서.”
“하마드 모하메드 살라 알라리 하무드 만수르.“
아랍 원어민 발음으로 나에게 돌진하는 저 아름다운 이름을 한 번에 기억할 수는 없기에 나는 다시 물어본다.
“미안, 뭐라고?”
“모하메드라고 그냥 부르면 돼”
“고마워 그게 낫겠다.”
이미 모하메드라고 처음부터 말해준 그것이 그들의 배려였다는 것을 늦게나마 깨닫고, 그렇게 내 휴대폰에는 점점 아랍식 이름들이 하나 둘 늘어갔다.
7명의 모하메드
2명의 아흐메드
2명의 압덜라
2명의 하무드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어느 날 아흐메드에게 오랜만에 연락이 왔는데 도대체 어느 아흐메드인지 모르겠는 것이었다. 다행히 일상 안부를 묻는 연락이었기에 큰 문제없이 지나갔지만 문제는 그다음에 있었다.
연락을 받은 지 한 일주일쯤 지났을 까, 여느 때처럼 출근을 하고 브리핑실로 가니 남자 캐빈크루 한 명과 여자 캐빈크루 한 명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간단하게 인사를 하고 내 할 일 하며 나머지 크루들을 기다리는데 그중 남자 승무원이 이상하게 낯이 익었다.
어디서 봤지, 같이 비행을 했었나, 지나가다가 그냥 마주친 건가, 아무리 고민해도 딱히 떠오르는 생각이 없었다.
비행 중, 아까 낯이 익었던 승무원이 칵핏에 들어왔다.
“뭐 필요한 거 없어?”
“괜찮아. 고마워. 아까 제로콜라 받은 거 아직 다 안 마셨어.”
칵핏에 앉아 좀 쉬었다 가겠다는 그가 나를 보며 말했다.
“망고야, 잘 지냈지?”
순간 이거 기억 못 하면 진짜 실례인데, 그렇다고 아는 척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나에게 주어지는 운명을 그저 받아들이기로 했다.
“응 잘 지냈어. 근데 우리 같이 비행한 적 있었지? 낯이 익은데.”
“그때 나 파일럿 하고 싶어서 너가 궁금한 거 있으면 연락 달라고 연락처 줬잖아.”
사실 파일럿이 되고 싶다고, 궁금한 게 많다며 연락처를 교환했던 남자 캐빈크루들이 꽤 있었기에 그때까지만 해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 그렇지?”
“얼마 전에 우리 연락도 했잖아.”
“아흐메드!?”
“그래. 아흐메드.“
이미 옆에서 빵 터져버린 기장과 미안해하는 나, 그리고 그걸 놀리고 싶은 아흐메드. 볼만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이어서 머릿속에 스치는 궁금한 질문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근데 아흐메드, 궁금한 게 있는데.”
“어려운 것만 물어보지 말아 줘.”
“내가 여기서 살다 보니 아흐메드, 모하메드, 하무드, 압덜라, 하마드 이런 이름을 많이 보거든. 휴대폰에도 여러 이름이 저장되어 있는데 너는 어떻게 구분해? 솔직하기 고백하면 얼마 전에 너랑 연락할 때 기억이 정확하게 안 났어. “
내 질문을 들은 아흐메드는 빵 터지며 좋은 질문이라 말한 뒤 고민하기 시작했다.
“내 휴대폰에도 수많은 모하메드, 아흐메드가 있는데 우선 나는 다음 순서로 기억해 “
이야기를 들어보니
우선 본인은 성(Last name)까지 저장을 한다고 한다. 아무래도 나보다 풀네임을 듣고 저장하는 게 훨씬 용이할 테니 좋은 방법이었다.
두 번째로는 특징을 적어 놓는다고 했다. 언제 봤는지, 키가 어느 정도인지 등.
세 번째로는 지난 대화를 복기하면서 누구였는지 떠올리는 방법이 있다고 했다. 이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생각이 이쯤 되자,
“근데 만약 그래도 구분을 못하면?”
내 질문을 들은 아흐메드가 조금 생각하더니,
”음... 최후의 방법으로는 그냥 사번을 옆에 써놓고 나중에 회사 사이트 가서 얼굴 찾아봐.“
처음 간 맛집을 갔을 때는 많이 가본 사람이 시키는 메뉴를 똑같이 시키라고했던 내 친구 JJY의 말마따나, 그곳의 문화권에 적응하고 싶다면 이미 적응한 사람의 발자국을 따라가면 된다.
그날 이후로 나도 메모를 남기기 시작했다.
사실 이 글을 쓰면서 연락처에 남겨진 메모를 보면서 얼굴이 바로 떠오르진 않지만 같은 아흐메드도 다르게 보이는 걸 보면 조금씩 나도 적응해가고 있다는 뜻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