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어떻게든 되는 중
노보리베츠가 먼저냐, 하코다테가 먼저냐.
지도상으로 보면 홋카이도의 서남쪽이 하코다테이다. 거기에서 일본의 본섬으로 이어진다. 지원은 숙소와 이동 편을 비교해가며 순서를 정하려고 홋카이도 지도를 펼쳐두고 가만히 바라보았다.
도동(道東). 지도상에는 이곳을 하나의 덩어리로 칠해두었다. 유빙이 아직인 관계로 포기한 지역.
“광활한 홋카이도의 대자연을 느낄 수 있는 지역으로 아바시리와 몬베츠의 유빙이 유명한 겨울과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이 위치한 시레토코! 그리고 원시 호수들이 위치한 아칸 먀슈호의 여름여행은 이제 전용 차량으로 달려봅니다. 최동단인 노샤푸미사키에서 러시아 북방영토도 눈으로 확인해 보세요.”
지원 말고도 카페에서 많은 사람들이 유빙 소식을 기다리고 있어서 주기적으로 이와 관련한 문의와 안내글이 올라왔다. 여전히 유빙은 무리였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도동도동 하고 싶어요’라는 제목의 글을 올려 지원 역시도 자꾸 미련이 남았다. 유빙은 못 보더라도 도동의 땅이라도 밟아야겠다는 생각이 자꾸 지원을 붙잡았다.
아침을 먹고 지원은 한별과 가볍게 동네를 산책한 후 기차에 올랐다. 그리고 20분 후 가미후라노 역에 내렸다. 역 앞에서 하루 3번 셔틀이 운행하기 때문에 지원은 꼼꼼하게 시간을 체크한 후 가미후라노 역으로 온 것이다. 가미후라노가 도동이냐고? 그럴 리가. 가미 후라노는 후라노의 일부이다. 도동의 땅이라도 밟겠다는 다짐은 여전했다. 그런데 여행책자를 요리조리 뒤지던 지원의 눈에 ‘도카치다케’라는 다이세쓰 산의 한 자락이 눈에 들어왔다. 카페에서 숲속 정원 풍의 노천탕으로 유명하다는 하쿠긴소(白銀荘백은장), 그리고 원조 도카치 온천으로 홋카이도에서 가장 높은 표고에 위치한 료운가쿠(凌雲岳능운각)에 대한 글을 봤던 것이 기억이 났다. 전화로만 숙소 예약이 가능해서 어려움을 겪었다는 글도 있었고, 이제는 유명해져서 예전의 고즈넉함은 없어서 아쉽다는 글도 있었다. 백은장은 게스트하우스 형식으로 운영되어 두 사람에게는 무리였고 료운가쿠는 단독룸이 있어 지원은 얼른 공실을 조회했다. 마치 그들을 기다려 준 것처럼 단 하나의 룸이 남아있었다. 그래서 지원은 얼른 석식과 조식을 포함해서 예약을 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 결정이 나중에 지원에게 있어서 최고의 홋카이도의 기억으로, 생애 손꼽을 기억으로 남을 것을 그때는 몰랐다.
역 앞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니 마을 버스 크기의 버스가 한 대 왔다. 본래는 일반버스이지만, 겨울 기간에만 무료 셔틀로 운행을 한다. 이 역시 얼마나 행운인가. 다만, 버스의 규모에 비해 타는 사람의 수와 짐의 크기는 어마어마했다. 지원은 커다란 캐리어는 운전사 옆 짐칸에 올려두고 백팩은 무릎에 올린 채 가야 했다. 그럼에도 중간 의자까지 펼쳐서야 겨우 모두 앉게 되었다. 버스는 굽이굽이 산길을 올라갔다. 얼마나 높은지 와이파이가 끊기는 구간이 더 많았다. 무슨일이라도 나면 정말 큰일이겠다 싶은 생각이 들 무렵, 하쿠긴소에 도착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곳에서 모두 하차했다. 이제 여유롭게 앉아서 갈 수 있게 되자 운전기사에게 말을 걸었다.
“료운가쿠까지 여기에서 먼가요?”
“15분 정도면 도착합니다.”
“아. 그렇군요. 멀지 않은 거리네요. 내일 아침에 걸어서 하쿠긴소까지 가보려고 하는데 괜찮을까요?”
“에? 걸어서는 1시간도 훨씬 넘게 걸립니다. 특히 눈이 많이 내려서 위험할 겁니다.”
이왕 도카치다케 온천 마을에 온 이상 하쿠긴소의 정경도 궁금하던 차였다. 하루에 3번 운행하는 버스 시간에 맞추기 쉽지 않을 것 같아 차로 15분 거리라면 충분히 걸어갈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물었던 것이다. 뭐 어떻게든 방법이 있겠지. 버스는 머지않아 종착역인 료운가쿠에 도착했다.
갈색 지붕에 아이보리색 벽인 료운가쿠를 보며 정말 집처럼 생겼다고 생각했다. 료운카쿠는 우리가 어려서 집을 그리라고 하면 하나같이 같은 모양으로 그리는 딱 그 형태로 생겼다. 옆으로 긴 직사각형 네모에 시옷 모양 지붕이 얹어진. 숙소 뒤쪽으로 마을 아래가 내려다 보였다. 좋은 날씨는 좋은 징조이다.
두 사람은 2층 숙소로 안내받았다. 공용 화장실과 주방이 있는 숙소였다. 대신 방 안에 간단히 씻을 수 있는 세면대가 있었다. 이곳 역시 열렬히 뜨거운 공기를 내뿜는 라디에이터가 있었다. 한별은 더위를 많이 타서 더운 곳은 쥐약이다. 지원은 레버를 가장 약한 쪽으로 돌려두고 가습기에 물을 채워 튼 후 유카타로 갈아입고 방 한가운데 벌렁 누웠다. 한별도 지원을 따라 곁에 누웠다. 침대 만큼 푹신한 이불이 두 사람을 감쌌다. 잠시만 쉬고 온천을 하러 가기로 했다.
“별아. 근데 정말 괜찮겠어?”
한별은 남자아이라 엄마와 혼욕이 불가능하다. 이 때문에 지원은 가급적 온천이 있는 숙소는 가지 않았다. 그런데 이곳은 온천이 아니면 굳이 묵어야 할 이유가 없는 곳이었다. 물론 당일치기 온천이 가능하기는 하지만, 두 사람은 짐도 많고 자가용이 없어 버스 시간대로 움직이려면 숙박 만이 답이었다. 그렇다면 온천을 해야 한다. 하지만, 한별에게는 필수가 아니다. 그런데 한별이 도전해 보겠다고 하는 거였다.
“응. 해볼게. 대신 오래는 어려워.”
“그럼 그럼. 엄마는 이곳 온천이 워낙 좋대서 그냥 체험 정도만 해도 만족이거든.”
“가볼까 그럼?”
한별이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나왔다. 무엇이 이토록 아이를 용감하게 만드는가. 두 말 할 것 없이 여행이었다. 지원이 온천을 하고 오는 동안 아이는 방에서 TV를 보면서 쉴 수도 있다. 그럼에도 한별은 해보겠다고 하는 것이다. 물론 지원이 한별에게 이곳 온천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며 자극을 한 이유도 있겠지만.
“별아. 이곳이 홋카이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온천이래. 무려 1,280m. 여기 노천탕에서 도카치다케 봉우리를 감상하면서 온천 할 수 있대. 별이 작년에 아빠랑 노천탕 가봤지? 거긴 땅에 있는 온천, 여긴 산꼭대기 온천. 진짜 근사하겠다. 그치?”
그 말의 의도에 한별이 온천욕을 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없었다. 그럼에도 한별은 이처럼 용기를 내서 도전하겠다고 아니 지원은 반갑고 기특하고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타월과 속옷을 챙겨 온천장으로 내려갔다. 체크인 시간에서 오래지 않아 탕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건너편 남탕 부근에서도 인기척이 들리지 않아 지원은 한별의 이름을 불렀다.
“별아. 괜찮아?”
지원의 목소리가 탕 안에서 울리며 건너갔다.
“응. 엄마. 여기 아무도 없어.”
“엄마도. 여기도 아무도 없어. 되게 좋다.”
지원은 한별에게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할 것과 탕 안에 들어가기 전에 가볍게 샤워할 것 이 두 가지를 당부했었다. 건너편에서 들리는 물소리는 아마 한별이 가볍게 샤워를 하는 소리일 것이다.
온천물은 흙탕물 색깔과 유사하게 진갈색을 띠었다. 지원은 조심스레 발을 담갔다. 꽤 뜨거운 온도에 다시 탕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바가지를 이용해서 온천수를 떠서 몸에 뿌렸다. 지원의 체온도 덩달아 올라가는 듯 했다. 다시 탕에 발을 넣자 이제는 견딜 만한 온도인 것처럼 느껴졌다. 여기서 몸이 달궈져야 노천에 나갔을 때 춥지 않다는 것을 지원은 경험상 안다. 녹슨 쇠 냄새 비슷한 것이 났다. 바깥 풍경이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어 서둘러 노천탕 문을 열었다. 이곳도 아무도 없다. 동굴처럼 생긴 바위가 덮고 있는 내탕과 외탕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몸을 덜 달궈 나온 탓에 지원은 몸이 달달 떨렸다. 얼른 내탕으로 들어가서 목까지 몸을 잠그고 있었다. 외탕 바깥으로 눈산과 전나무 숲이 보였다. 마치 누군가 슈가 파우더를 뿌려놓은 것처럼 하얗게 반짝이고 있었다.
“별아. 어때?”
이번엔 실내가 아니라 울리지 않고 또렷한 목소리가 건너갔다.
“엄마. 여기 정말 환상이야. 아까 엄마가 말한 봉우리가 보여. 산 꼭대기 온천이 맞나봐.”
한별의 감탄이 전해져왔다. 지원은 한별의 말을 듣고 외탕으로 넘어갔다. 한별이 말한대로 과연 도카치다케의 연봉이 보였다. 뭐라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전래동화 속 선녀들이 이런 풍경 속에서 목욕을 했을까. 황홀하기 그지 없었다. 지원은 노천탕 가에 쌓인 눈을 집어 작게 눈사람을 만들었다. 온천수 색깔 때문에 하얀 눈사람이 점점 차색(茶色)으로 물들어갔다. 몸통 아래 발끝부터 서서히 누런 색이 올라오더니 결국 부서지듯 눈사람이 오른쪽으로 기울었다. 지원은 손에 온천수를 떠올려 눈사람에 부었다. 눈사람은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그것을 몇 번 반복하다 보니 한별의 목소리가 건너왔다.
“엄마. 나 이제 나갈래.”
“그래. 엄마도 이제 씻고 나갈게. 입구에서 만나.”
한별 덕분에 황홀한 풍경을 보게 된 것이 감사했다. 아침에는 남탕과 여탕이 교체가 된다. 내일 아침 일찍 한별이 경험한 다른 쪽 탕도 경험해 보리라 다짐했다. 저녁은 신선한 해산물과 생선회, 생선구이, 야채 미소 장국, 돼지고기 조림, 과일과 케이크 디저트 순서로 나왔다. 방에 돌아와서 비에이 역에서 샀던 주전부리를 먹다가 잠이 들었다.
그리고 새벽 6시 반. 창 밖에 붉은 기운이 올라와 지원은 놀라서 눈이 떠졌다. 커튼을 걷으니 산 너머로 새벽 여명이 붉게 밝아오고 있었다. 하늘을 물들인 붉음이 너무 찬란하여 경외로웠다. 지원은 곤히 자고 있는 한별을 흔들어 깨웠다.
“별아. 별아. 저것 좀 봐. 저건 꼭 보고 다시 자면 좋겠어.”
한별이 비비적 눈을 떴다. 지원은 한별을 부축해서 창가로 데리고 갔다.
“여명이야. 정말 근사하지 않아?”
한별은 잠에 취해 대답은 못했지만 고개는 여러 번 끄덕였다.
“이제 다시 자도 돼. 그리고 엄마는 온천 한 번 더 하고 올게.”
이번에도 한별은 이불 속에서 고개만 끄덕였다. 지원은 큰 타올과 작은 타올 하나씩 챙겨 온천장으로 갔다. 어제 노천탕보다 크기가 두 배는 컸다. 그리고 도카치 연봉이 더 가깝고 크게 펼쳐졌다.
하아- 정말 신의 선물 같다.
지원이 이렇게 중얼거렸다. 잠시 후에 여성 두 명이 들어왔다. 화장을 곱게 하고 번 헤어, 일명 똥 머리를 한 채로였다.
“우와- 진짜 대박.”
예상대로 한국인이었다. 두 사람 역시 조금 전의 지원처럼 감탄을 금치 못했다.
“언니, 나 진짜 눈물 날 것 같아. 이거 안 보고 갔으면 정말 후회할 뻔 했다. 그치?”
제 말이 그 말입니다. 지원이 속으로 대답했다. 지원 역시 그간 노천 온천 중에 단연 최고였다. 조금 더 고급스럽고 단정한 노천탕이 있을 수는 있어도 이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지원은 탕 가외로 가서 팔짱을 끼고 그 위에 머리를 기댔다. 시원한 기운이 목 뒤를 스쳐 갔다. 그럼에도 탕 안이 따뜻해서 추운 줄을 몰랐다. 뒤쪽에서 두 여성의 속닥이는 소리가 들렸다.
“하- 어떡하지. 이제 식사 시간인데.”
“포기할까? 그냥 나가?”
두 사람은 지원이 나가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런 대사를 말하지는 않았지만, 지원은 체감으로 알았다. 그들도 온천장 안에서 사진 촬영이 안 되는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지원만 없다면 그들은 근사한 풍경 속에 있는 자신들을 찍을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지원은 고민했다. 눈치껏 비켜줄까. 하지만, 이 풍경을 자신도 오래도록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마음 속 고민들이 핑퐁하고 있었다. 만약에라도 그들이 ‘이 여자는 왜 이렇게 안 나가는 거냐’는 류의 말을 했다면 지원은 그들의 바람을 모른 척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녀들은 그런 바람에도 불구하고 입 밖으로 그 말을 내지는 않았다. 젊음들의 열망을 모른 채 할 수 없어 지원이 용기를 냈다.
“사진 찍으셔도 돼요.”
두 사람은 경악을 하는 듯 했다.
“어머! 한국인이셨어요?”
지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자신들의 대화를 알아듣고 있었다니 놀란 모양이었다. 하지 않았을 말들도 혹시 불쾌하게 여겼을 말이 없었을까 재빨리 자기검열에 들어갔을 것이다. 지원이라도 그랬을 터였다. 그럼에도 그녀들은 얼른 사진찍기에 돌입했다. 지원에게 감사를 표하며. 둘 중 하나가 먼저 바깥쪽 탕의 맨 앞으로 가서 도카치 연봉을 바라보며 등을 돌렸다. 나머지 하나가 그 뒷모습을 풍경과 함께 담았다. 그걸 둘이 돌아가며 반복하더니 지원에게 인사를 하고 나갔다. 지원은 자신도 한 번 찍어달라고 할 걸 그랬나 잠시 고민을 했다. 하지만, 그냥 눈에만 담기로 했다. 그녀들만큼 아름다운 뒤태는 아닐 거라고 위로하면서.
다시 고요가 찾아왔다. 해가 이미 산 위로 올라와 주변이 완전하게 밝아졌다. 지원도 몸을 헹구고 나와 한별과 함께 아침 식사를 했다. 아침은 뷔페식이라 원하는 자리에 원하는 음식을 들고 가서 먹으면 되었다. 커피도 무료로 마실 수 있다고 직원이 알려주어 지원은 커피 한 잔을 따라서 창가로 갔다. 오늘의 날씨도 기가 막히다. 마침 료운가쿠에서도 스노우 워킹이 가능하다 해서 두 사람은 오늘 도카치다케를 걸을 작정이다.
숙박객에게는 절반의 가격으로 스노우 슈즈와 폴대를 대여해주었다. 짐을 프런트에 맡긴 후 숙소 밖으로 나섰다. 직원은 스노우 슈즈를 신는 방법, 스노우 워킹을 하는 루트 등을 친절하게 안내해 주었다. 스노우 슈즈를 신고 걸으니 바닥에서 딱딱 소리가 났다. 눈이 많은 곳에서 신어야 하는데 숙소 바로 앞은 아무래도 언 바닥이다 보니 걷기가 쉽지 않았다. 직원이 알려준 대로 언덕을 올랐다. 가파른 눈 언덕인데도 미끄러지지 않고 쉽게 오를 수 있었다. 과연 스노우 슈즈가 큰 역할을 하고 있었다. 언덕을 올라 조금 더 걸어가니 광활한 설원이 눈 앞에 펼쳐졌다. 손에 닿을 듯한 거리에 눈 봉우리들이 불쑥불쑥 솟아있었다. 지원은 그만 벅찬 기분이 들어 눈물이 왈칵 솟아졌다.
“엄마 괜찮아?”
“어. 괜찮아. 너무 감격스러워서. 이런 대자연 속을 걸을 수 있다는 게 너무 감사해서. 이 풍경을 아빠랑 같이 봤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어서.”
“나도 그 생각했는데. 아빠도 정말 좋아했을 것 같아. 다음엔 꼭 아빠랑 같이 오자.”
한별의 달램에 지원은 더 울 수가 없었다. 스키어들이 유유히 그들을 지나쳐 올라갔다. 그들이 낸 길을 따라 지원과 한별도 부지런히 걸었다. 앞서 가던 한별이 다시 또 벌러덩 눈 위에 누웠다.
“하아- 엄마 진짜 상쾌해. 몸은 땀이 흐르는데, 얼굴은 차가운 공기가 지나가. 그러니까 너무 기분이 좋아.”
지원은 한별의 목소리를 들으며 눈 위에 누워있는 진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 남편에게 보냈다.
-별이랑 트래킹 중. 여기 진짜 너무 멋지다. 꼭 같이 오자.
분명 손끝에 닿을 거리에 있는데 걸어도 걸어도 봉우리들 중 어떤 것도 둘에게 가까이 오지 않았다. 광활함이란 이럴 때 쓰는 말인 듯 했다. 지원도 한별의 곁에 누웠다. 구름 없는 파란 하늘이 이곳 눈산과 분명한 경계를 이루었다. 오겡끼데쓰까- 아마 히로코도 이런 기분이었을지도 모른다. 대자연의 위대함에는 인간은 무력하다. 왜 내 사랑하는 사람을 삼켜버렸냐고 따지고 싶었을 그녀는 이 대자연의 광대함에 ‘왜’라는 말조차도 꺼내지 못했을 것 같았다.
지원이 있는 곳에서 가장 가까운 산언덕에서 스키어가 애써서 그곳을 오르고 있었고, 그 옆에는 또 다른 스키어가 길을 내며 내려오고 있었다. 지원이 보기에 경사가 족히 70도는 되어 보이는 날 것의 산을 나무들을 피해 요리조리 내려오는 광경을 보고 입이 딱 벌어졌다. 한별이도 나중에 커서 친구들과 저렇게 스키여행을 다니며 살면 좋겠다는 바람이 들었다.
걸어도 닿지 않는 봉우리를 뒤로 하고 지원과 한별은 뒤돌아 나왔다. 꼬박 두 시간을 걸었다. 봉우리에 도달하지 못한 아쉬움이라고는 없었다. 그냥 대자연의 품을 허락해 준 그날을 지원은 평생 잊지 못할 것만 같았다. 호텔에 들어서니 예의 그 직원이 온천을 하고 가라고 권했다. 하지만, 지원은 어제 생각해둔대로 하쿠긴소에 가보는 것으로 했다. 그러니 짐을 한 번 더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파마머리에 턱수염이 가득한 직원은 흔쾌히 그러라고 했다.
3번의 셔틀 중에 두 번째 버스에 올랐다. 오래지 않아 도착한 하쿠긴소에는 어제처럼 사람들이 많았다. 입구에서 입장권구매와 수건 대여를 한 후 준비한 수영복으로 갈아입었다. 이곳은 혼욕이 가능한 노천탕이 있었다. 카페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찬양했었다. 도미토리 숙박은 어려울 것 같아 포기했지만, 당일치기 온천은 가능한 곳에 묵었으니 한 번 가보고 싶었다. 그러나. 고요는 커녕 아산이나 도고에 있는 실외 스파랜드의 풍경과 다르지 않았다. 가족 단위로 연인끼리 와서 시끌벅적 여기 좀 와보라고 소리치는 곳. 심지어 대놓고 사진 촬영까지 하는 통에 지원은 얼른 그곳을 나가고 싶었다. 그런데 한별은 의외로 엄마와 함께 하는 온천이 너무 좋다며 지원에게 찰싹 붙어있는 통에 한참을 머물렀다. 한 사람이라도 좋으면 될 일이었다. 한별과 씻고 입구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고 지원은 여성 노천탕에 가보았다. 그곳도 혼탕보다 상황이 조금 나을 뿐 비슷해 보였다. 아마도 이곳이 여전히 좋다는 사람들은 분명 다른 시간대를 이용했을 거라고 지원은 짐작했다. 그랬다면 숲속 온천 같은 고즈넉함이 분명 있을 것도 같았다.
입구에서 한별을 만나 2층으로 올라갔다. 휴게실에서 쉬면서 라면을 먹으며 버스를 기다릴 작정이었다. 한별의 얼굴에 로션을 바르며 문득 버스 시간까지 얼마나 남았나 싶어 지원은 시계를 봤다. 그런데 손목에 시계가 없었다. 어? 분명 탈의장까지 가서 시계를 벗었다. 그리고 옷을 입을 때 바구니에 아무 것도 없는 것을 확인했다. 그렇다면. 옷을 갈아입을 때 바닥에 떨어졌거나 도난이다. 남편에게 생일 선물로 받은 스마트 워치였다. 가격도 가격이지만 선물로 받은 거라 지원은 마음이 콩닥거렸다. 서늘한 기분도 들었다. 핸드폰에서 찾기 버튼을 눌렀지만 근처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별아. 잠깐만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을래? 엄마가 시계를 잃어버린 것 같아서.”
지원은 탈의실을 향해 걸음을 서둘렀다. 지원이 옷을 벗어두었던 바구니를 살폈으나 그 안에는 이미 다른 사람의 물건이 들어 있었다. 주변에 떨어졌거나 올려둔 시계는 더욱이 없었다. 다급한 마음에 곁에 있는 사람에게 물었다. 다짜고짜 한국어로.
“혹시 이 안에 스마트 워치 없었나요?”
그녀의 감대로 대답한 사람 역시 한국인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없었다고 했다.
“안에 한 번 살펴보실래요?”
역시 아무것도 없었다. 허탈한 마음이 들었다. 헐랭이 두 명이 얼마나 잃어버리고 다닐지 걱정하던 남편의 목소리가 떠오르는 것만 같았다.
“프런트에 한 번 가보세요. 일본에서는 웬만하면 잘 찾잖아요.”
지원은 기대하지 않고 프런트를 향해 계단을 올랐다.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다시 한 번 찾기 버튼을 눌렀다. 그때 어디선가 맹렬하게 삐-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프런트였다. 지원의 시계가 프런트 데스크에 얌전히 놓여있었다. “저어- 이게 제 시계인데요.” 직원이 미소 지으며 건네줬다. 안도감에 순간 울컥했다. 한별도 엄마의 얼굴을 보고 안심한 듯, “나도 깜짝 놀랐어.” 라며 숨을 돌렸다.
둘은 맛있게 컵라면을 먹고 밖으로 나와 버스를 기다렸다. 버스는 시간에 맞춰 도착했고 두 사람은 빈 버스에 올랐다. 오래지 않아 한별이 잠이 들어버렸다. 짐만 챙겨 나와 다시 타면 될 일이지만 그래도 혹시 버스가 기다리지 않고 내려가 버리면 아주 큰 낭패이다. 버스가 도착하자 지원은 기사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아이를 버스에 둔 채로 료운가쿠로 짐을 가지러 잠시 다녀왔다. 직원은 “하쿠긴소는 어땠나요”라고 물었고, 지원은 “좋긴 했지만, 여기가 훨씬 좋았어요.”라고 답했다. 직원은 담담하게 그렇냐고 말했다. “신세 많이 졌습니다. 정말 감사했어요.”라는 인사에 직원은 손사래를 치며 다시 또 방문해 주기를 바란다고 인사했다. 그렇게 마지막까지 친절한 배웅을 받은 후, 지원은 다시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는 아래로 달려 아까 그 하쿠긴소에서 많은 사람을 태웠다. 마지막 버스라 정말 많은 인파가 버스에 올랐다. 하쿠긴소로 짐을 챙겨가지 않았던 것은 그 이유 때문이었다. 이 인파 속에 큰 짐을 들고 아이와 타는 게 보통 일이 아닐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래서 출발지에서 여유롭게 앉아 출발하려고 했는데 역시 잘한 선택이었다. 버스는 다시 산 속 굽이굽이 돌아 가미 후라노로 내려갔다. 저녁 시간이다 보니 시내에 차가 많아졌다.
“혹시 역까지는 아직인가요?”
“곧 도착합니다. 기차 시간이 임박한 가요?”
“네. 버스 시간이 6시 18분인데 예약을 하지 못해서요.”
“그렇군요. 그 전에는 도착하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기사의 말대로 버스는 6시 10분을 조금 넘겨 도착했다. 지원은 짐을 들고 한별의 손을 잡고 달렸다. 버스 정류장은 기차역에서 걸어서 3분 정도의 거리에 있었는데 예약을 하지 않은 터라 미리 가서 기다리지 않으면 타지 못할 수도 있다. 만약에 버스를 타지 못하면 아사히카와 쪽으로 이동해야 숙소를 잡을 수 있다. 비에이나 후라노 쪽은 역 근처에 숙소가 거의 없다는 것을 지난 번 검색에서 알았기 때문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다행히 정류장에는 6시 18분 전에 도착했다. 정류장 표지판이 쌓인 눈에 가려져 끝만 겨우 보였다. 이미 까만 어둠이 내려앉았고 주변엔 가게 조차도 보이지 않는 시골 동네의 밤거리였다.
“엄마. 조금 무서워.”
지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아이 앞에서 내색할 수는 없다.
“괜찮아. 엄마 있잖아. 버스 금방 올 거야. 그때까지만 기다려보자.”
하지만, 버스는 18분이 되어도 오지 않았다. 어젯 밤에 예약을 해두려다가 아침에 예약을 해도 괜찮을 것 같아 그냥 잠든 것이 화근이었다. 당일 예약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몰랐다. 예약자가 없어 그 시간대 버스가 운행이 취소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특히, 일본은 버스 시간을 철저하게 준수한다. 기차도 지하철도 아닌데 신기할 정도로 버스 시간을 잘 맞춘다. 그런데, 버스가 오지 않았다. 혹시 눈 때문에, 혹시 퇴근 시간이라 늦는 건 아닐까.
“별아. 버스 시간이 지났는데 버스가 안 오네. 어쩌지.”
“그래? 그럼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30분까지만.”
멀리서 차의 불빛이 비춰오면 두 사람은 기대를 했다. 하지만, 그냥 큰 차가 올 뿐이었다. 지원은 핸드폰으로 아사히카와 숙소를 찾았다. 기차시간도 맞아야 하는데. 핸드폰과 도로의 끝을 번갈아가며 바라보는데 ‘오비히로’라고 쓰여진 버스가 들어오는 게 보였다.
“왔다!”
지원이 반가워서 크게 외쳤다.
“정말? 진짜 다행이다. 것 봐, 엄마. 기다리길 잘했지?”
“응. 정말 잘했다. 별이 말 듣길 정말 잘했어.”
버스가 그들 앞에 멈춰 섰고, 기사는 문을 열고 내리면서 둘에게 사과를 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눈 때문에 차가 많이 밀렸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지원은 버스를 탈 수 있다는 사실 자체로 안심이고 기뻤다.
“아닙니다. 탈 수 있어서 다행인 걸요. 예약을 하지 않았는데 괜찮은가요?”
기사는 좌석이 아직 남아 있어서, 내릴 때 현금으로 버스비를 내면 된다고 했다. 기사는 지원의 캐리어를 버스에 올려주었다. 두 사람은 자리로 가서 앉았다. 이제 3시간만 가면 오비히로 역에 도착한다.
“아까 엄마가 온천에서 도카치다케 보면서 진짜 행운이라고 생각했거든? 그 행운이 지금까지 이어지나 봐.”
한별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원은 진심으로 도카치다케의 행운이 그들을 편안하게 이끄는 거라고 생각했다. 분명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기분이 아침 내내 그녀를 감쌌다. 버스 안에서 지원은 봐뒀던 호텔을 예약했다. 이제 우리도 도동도동 한다. 유빙은 못 보지만, 스위츠(sweets)의 도시로 간다. 이것만으로 설레었다. 분명 잘 풀려나가고 있었다. 한별과의 ‘어떻게든 되겠지 여행’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