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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홋카이도 갈래요?

10화. 질투는 너의 힘? (부제: 공유보다 더 사랑스러운 너에게)

by teaterrace

어디를 가든 중국인들이 많았다. 코로나로 해외여행이 봉쇄되었던 시기의 갈망을 해소하려는 듯 그들은 홋카이도의 어디에서든 목소리와 규모를 과시했다. 노보리베츠 역에 내려 버스를 기다리는 순간에도 그들 무리를 두세 차례 버스에 태워 보내고 나서야 지원과 한별은 버스에 오를 수 있었다. 탑승객이 많을 때 추가 버스를 배치해서 불편함을 해소해주는 버스 시스템이 있다는 사실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노보리베츠 시민들도 지원과 마찬가지로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자리에 앉자 옆에 앉은 일본인 할머니 한 분이 지원을 보고 웃었다.


“안녕하세요.”

지원이 먼저 인사를 건네자 기다렸다는 듯 한탄을 시작했다. 한눈에 보기에 중국인들과 결이 달랐던 모양이다.

“중국인들은 너무 매너가 없어요. 질서도 없고 어디에서나 시끄럽게 구네요. 코로나로도 그렇게 피해를 주더니…….”

지원은 잠시 고개를 끄덕였다. 일본인들도 중국인들에 대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게 지원은 신기했다. 국익 측면에서 중국은 그야말로 무시할 수 없는 큰손임에도 일반 시민들은 아무래도 불편함이 더 큰 모양이다. 우리들처럼. 한중일의 세 나라 국민들이 느끼는 반감과 거리감은 어쩌면 거리와 반비례하는지도 모르겠다고 지원은 생각했다. 성인 여성 한 명은 족히 들어갈 크기의 커다란 캐리어를 인당 하나씩 들고 타는 바람에 버스 안은 짐 반 사람 반으로 꽉 찼다. 그 상태로 덜컹거리는 길을 지나다 보니 커브를 돌면 짐이 한쪽으로 쏠려 서 있는 사람들의 입에서 아우성이 터졌고 ‘짐을 잘 잡아라’, ‘좁아서 어쩔 수 없다’는 말이 시끄럽게 오갔다.

사실 지원 역시 이 여행 동안 중국인들에 대해 할말이 많다. 오비히로에서 힘들게 셔틀버스 지원이 되었을 때 질서 없이 앞다퉈 몰려갔을 때도 그랬고, 오타루 텐구야마에서 야경을 보는 순간에도 필사적으로 야경 사진을 찍기 위해 좋은 스팟을 독점하여 다른 이들에게 양보 없는 그들의 모습을 볼 때도 그랬다. 처음엔 한 명씩 독사진을 찍고 그다음엔 둘씩 커플 사진을 찍고 마지막으로 셋 이상 단체 사진을 찍으며 기다리고 있는 다른 사람들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멋진 사진을 위해서라면 그들은 위험한 상황도 마다치 않을 정도로 사진에 대한 집념이 엄청나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로 체면도 배려도 없는 그들을 보고 화가 나는 순간들이 많았다. 그럼에도 지원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한별이의 한 마디 때문이었다.


“엄마. 나는 사실 그렇게 불편하지 않은데, 엄마가 중국인 때문에 너무 불편하다고 하니까 나는 중국인들을 알기도 전에 그 사람들에 대한 혐오가 생겨.”


아차. 이 여행을 출발하는 비행기 안에서 한별에게 혐오에 대해 이야기했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특정 대상에 대한 편견과 멸시. 한별이가 스스로 경험하고 싫어할 수는 있지만 엄마로 인해 싫다고 인지하기도 전에 편견이 생겨버리게 하는 건 안 될 것 같았다.

“미안해. 엄마가 실수했네. 별이는 불편하지 않았구나.”

그래서 지원은 그저 “그러게 말입니다.”라는 의례적 대답과 함께 할머니를 보며 싱긋 웃었다. 이곳에서는 오비히로에서 알게 모르게 얻은 피로감을 씻을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바라며.


버스는 지원이 묵는 호텔 앞에 정차했다. 지원이 짐을 들고 내리자, 호텔직원이 달려와서 지원의 짐을 받았다. 아직 체크인 시간 전이라 수속만 하고 두 사람은 곰 목장 구경을 가기로 했다. 직원은 곰 목장에 전화를 해서 셔틀버스를 요청했다. 머지않아 도착한 버스를 타고 두 사람은 로프웨이 탑승장에 도착했다.

로프웨이는 네 명 정도가 탈 수 있는 크기였는데 오르면서 온천마을 경내가 훤히 내다보였다. 전에도 노보리베츠에 와 보았지만, 이런 풍경을 보기는 처음이라 지원은 꽤 기분이 좋아졌다. 아이가 보고 싶어 해서 가기는 하지만 곰 목장에 대한 기대는 전혀 하지 않았으니까. 반대편 로프에는 큰 곰 인형 하나만 덩그러니 탄 운반차도 더러 보여 귀엽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즈음, 꽤 이색적으로 보이는 운반차의 모습이 멀리 보였다.

“별아. 저기 좀 봐봐. 저건 뭘까?”

외형부터가 다른 그 운반차의 정체를 궁금해하며 두 사람은 그것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계속 주시했다. 점점 가까이 오는 그것은 마치 나무 가마를 연상케 하는 외형에, 안에는 청어처럼 보이는 생선들이 거꾸로 매달려,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렸다.

“에? 생선이네? 생선을 여기에서 말리다니 진짜 재밌다.”

운반차의 겉에는 ‘노보 7호’라는 이름까지 붙어있었다. 과연 일본은 참으로 아기자기한 나라라는 생각을 하며, 곰 목장 정상에 도착했다. ‘겨울을 나는 홋카이도의 풍물시(風物詩)’라는 액자에는 방금 본 생선 운반차 사진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 옆에는 곰 형제들이 모두 모인 듯 열 마리 남짓의 곰 사진 판넬이 있었는데 어느새 한별이 그 뒤로 쓱 들어가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여느 동물원과 마찬가지로 너른 축사에 각종 놀이터와 함께 곰들이 놀고 있었다. 한별은 전용 사료를 사서 그들에게 던져 주며 즐거워했다. 조금 후에는 사육사의 먹이 주기 이벤트가 있었다. 지원의 눈엔 모두 똑같아 보이는 곰들의 각기 다른 이름을 부르며 사육사가 먹이를 던졌다. 이후 곰을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실내 축사, 곰들의 생태를 알려주는 전시관 등을 구경하다 건물의 옥상에 올랐다. 옥상의 문을 여는 순간, 지원은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정말 후회했겠다 싶었다.


그런 풍경이었다.


‘굿타라’라고 불리는 대규모의 원형 칼데라 호수가 보였다. 지원은 그 호수를 보고 잠시 말을 잃었다. 평소에는 분명 나무들로 빼곡했을 호수의 테두리는 지금 눈이 소복이 쌓여 있다. 그 모습이 마치 슈가 파우더를 잔뜩 뿌린 진한 코코아 팡도르 케이크 같았다. 말로만 듣던 칼데라를 눈앞에서 보니, 지원은 더없이 황홀해졌다. 파란 하늘을 그대로 품은 파란 호수. 춥지만 맑았던 날씨 덕에 호수는 더욱 푸르게 빛났다. 차가운 공기마저 푸르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런 장관을, 지금껏 모르고 지나쳤다는 게 아쉬울 지경이었다.

“역시 오길 잘했지?”

제 엄마가 호수에 반해있는 모습을 보자 한별이 으쓱하며 말했다.

“응. 너무. 별이 덕분에 엄마가 진짜 좋은 구경한다. 고마워, 별아.”

한별도 기분이 좋은지 제 몫의 밀크티를 호로록 마시고는 엄마를 올려다 보며 씩 웃었다.


몸을 조금 녹인 후 다시 구경을 이어갔다. 곰 모형 옆에서 같은 모양으로 네 발로 엎드려 보기도 하고 곰 동굴 모형에 기어들어가 보기도 하고 곰 가족의 이야기를 읽기도 하며 두 사람은 곰 목장에서의 입장료가 아깝지 않을 만큼 충분히 즐겼다. 4시 반이 되자 찬란하던 햇빛이 황금빛에서 주홍으로 슬그머니 그 색을 바꾸었다. 로프웨이를 타고 내려오는 풍경은 오를 때와는 전혀 다른 찬란함으로 바뀌어 있었다.


저녁 식사는 뷔페식으로 대게를 포함한 해산물들이 푸짐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작년에 남편이랑 함께 왔을 때는 가이세키 정식으로 방 안에서 식사를 했는데, 융숭한 대접에도 불구하고 밍밍한 음식맛 때문에 한별이 식사를 거의 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뷔페를 택했는데 역시 탁월한 선택이었다. 아이는 직접 가위질을 해보겠다고 대게 다리와 가위를 붙들고 한참을 씨름했고 카이센동도 직접 만들어 먹었다.

방 안에 돌아오니 ‘푸톤’이라 불리는 푹신한 이불이 정갈하게 깔려있었다. 침대도 아닌 그 폭신한 요를 지원은 참 좋아한다.


노보리베츠의 온천 수질은 홋카이도 내에서도 유명하다. 짧게라도 온천을 즐기기 위해 유카타로 갈아입고 노천탕으로 향했다. 사실 지원은 대중탕을 좋아하지 않는다. 중학교 때 이후로 간 적이 없었다. 발육이 워낙 좋아서 남들이 쳐다보는 몸매가 된 것이 그 이유였다. 지원은 그게 너무 싫었다. 거리에서는 아저씨들이 노골적으로 힐끗거렸고, 목욕탕에서는 아주머니들이 그랬다. 외출을 안 할 수는 없으니, 선택할 수 있는 선에서 피하자. 그래서 대중탕은 정말 오랫동안 가지 않았다. 그러다가 작년 홋카이도 가족여행에서 용기를 낸 것이 첫 시작이었다. 물론 이곳에서도 신경이 쓰이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한국인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그냥 마음이 편했다. 노골적으로 힐끗거리는 사람도 없고, 타인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는 공간이 정말 편안했다. 그래서 때때로 탕에서 더워지면 테두리 돌 위에 홀짝 올라앉아 풍경을 감상하기도 하고, 다리만 담근 채 상체는 그냥 벌거숭이로 두기도 했다. 물론 아무도 없는 순간에도 팔짱은 꼈다. 최소한의 보호장치였다.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것 같아서 정말 좋았다. 꿈에서조차 부끄러워서 할 수 없었던 일들을 이제는 아무렇지 않게 해낸다는 것. 그 자체로, 아주 작지만 확실한 해방이었다.


그렇게 짧게 노천 온천을 즐긴 후, 매점에서 사 온 사이다를 따서 한별과 함께 ‘건배’를 하며 뜨끈해진 몸을 식혔다.

“엄마, 우리 술 마시는 거 같아. 크크. 너무 신나고 재밌어.”

남편은 덜렁이 둘이 잘 먹고 잘 즐기며 다니는 것 같아서 조금 안심이 된다고 했다.

“이번엔 사슴이랑 마주치진 않았어?”


지원은 작년 노보리베츠에서의 밤을 떠올렸다. 근처 지옥 계곡을 보고 숙소로 돌아오는데 적어도 성인 여성의 키 정도는 되어 보이는 사슴 한 마리가 그들 앞에 딱 나타났다. 사슴도 놀라고 그들도 놀랐다. 사슴과 그들은 서로를 주시하며 한참을 제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 혹시 사슴을 놀래키기라도 하면 그가 우리 중 누군가 한 명을 들이받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지원은 자신의 배가 사슴뿔에 들이 받쳐 구멍이 뚫리는 상상을 했었다. 얼음처럼 굳은 그들 셋을 한참 지켜보던 사슴은 방향을 돌려 건물 사이로 유유히 사라졌다. 그렇게 큰 사슴을 눈앞에서 목도한 세 사람은 두고두고 이 이야기를 했었다. 노보리베츠를 떠올리면 지옥 계곡보다 먼저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 그 사슴 이야기였다.


“응. 다행스럽게도. 아니, 아쉽게도.”


그렇게 노보리베츠의 첫 밤이 지났다.


다음 날은 지다이무라(時代村)라 불리는 마을 민속촌에 가기로 했다. 그 전에 아침 산책을 나섰다. 마을 위쪽으로 걷다 보니 도깨비 부자상이 나타났다.

“작년에 이 도깨비 상 보고 별이 삐쳤던 거 기억나?”

“응. 기억나. 그때는 왜 그렇게 질투가 났었는지.”

그렇게 이야기하는 한별을 보니 많이 자라있다.

“아빠 때문이라니까. 엄마는 한마디도 안 했어.”

드라마 도깨비를 너무 좋아했던 지원은 그 당시 여섯 번인가 일곱 번인가를 반복해서 봤다. 너무 자주 보다 보니, 남편과 아이는 “공유가 그렇게도 좋아?”하고 놀리곤 했다. 물론, 공유라는 배우를 좋아하는 건 맞지만, 지원에게 그 드라마는 단지 ‘배우’ 때문만은 아니었다. 유쾌하면서도 절절한 스토리, 멘트 하나하나가 곱씹을 만했고, 볼 때마다 새로운 장면과 대사와 표정이 보였다. 그래서 봐도 봐도 질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아이는 공유를 질투하기 시작했다. 장난처럼 시작됐지만, 점점 진심이 묻어났다. 외동이다 보니 질투가 많았다. 동네 강아지를 귀여워해도, 지나가는 아기를 예뻐해도 한참을 토라져서, 지원은 종종 진땀을 빼야 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겪을 나이도 지났는데 왜 이럴까 싶다가도, 아무래도 외동이란 게 이유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둘째를 고민한 적도 있었다. 질투가 심하니, 동생이 생기면 마음이 넓어지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한별은 단 한 번도 동생을 갖고 싶어 한 적이 없었다. 다른 아이들이 ‘동생! 동생!’ 하며 노래를 부를 때, 한별은 오히려 불안해하며 말했다.

“엄마, 난 동생 갖기 싫어. 정말 싫어.”

확인하듯, 다짐하듯. 진심을 꾹 눌러 담은 표정이었다.

그랬던 한별이, 이번에는 공유를 그리도 질투했다. 그런 아이에게 남편이 눈치 없이 “어? 여기 공유다.” 하고 말한 것이다. 부자(父子) 도깨비 상 앞에서 남편과 아들의 단란한 사진을 찍어주려던 지원은, 한별이 삐쳐버리는 바람에 아무것도 못 하고 지나쳐야 했던 그날을 떠올렸다.

“맞아. 아빠 때문이야. 아빠가 공유라고 먼저 얘기했어.”

없는 사람을 탓하는 게 두 사람의 관계에 좋다는 것을 둘 모두 알고 있었다. 지원은 남편이 출근해서 귀를 후비고 있는 모습을 잠시 상상했다.


“지금은 괜찮지?”

지원이 한별의 마음을 확인하듯 묻자, 한별은 잠시 고민하는 듯 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때보다는. 근데, 지금도 엄마가 좋아하는 대상에게는 여전히 질투가 나. 나도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별이는 강아지도 귀여워하고 그러면서 엄마한테는 너무 엄격한 거 아냐?”

지원이 투정하듯 말했다.

“엄마. 그 노래 몰라? ‘나는 바람 펴도 넌 절대 피지 마.’ 넌 나만 바라봐, 그거라니까.”

남편과 동갑인 지원은 남편이랑 그 세대 노래를 자주 들었다. 그랬더니 한별이도 90년대에서 2000년대 초반의 노래를 참 많이 알고 있다. 그렇지만, 이렇게 말하는 한별이를 보니 참으로 가관이다 싶다.

“강아지도, 아기들도 보면 괜히 마음이 간질간질해져. 별이처럼. 그냥 귀엽다는 감정은 본능처럼 솟아나는 마음인 걸. 그건 별이를 사랑하는 마음이랑은 엄청나게 달라. 별이 사랑하는 마음이랑은 비교도 할 수 없어. 그래서 별이가 질투하는 게 기분이 좋으면서도 이해가 안 가. 엄마의 사랑을 부족하게 느끼나 염려도 되고.”

“그런 건 아닌데. 그냥 질투가 나. 그치만 작년보다는 나도 조금 덜 하지 않아? 나도 요즘에는 아기들 귀여워하고 그러잖아.”

듣고 보니 그랬다. 괜히 내 말투나 태도가 아이에게 불안을 준 건 아닐까, 마음 한편이 무거웠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작년 같았으면 이 상황에서 심통부터 부렸을 아이가, 지금은 스스로 감정을 말하고 풀고 있었다.

아, 다행이다. 조금은 자라고 있구나.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은 마음과, 사랑을 나눌 줄 아는 마음 사이에서, 아이도 이렇게 천천히 자라는 중이구나.

지원은 그런 한별이 대견하고, 참 애틋했다. 한별의 마음이 자라나는 게, 괜히 눈물 나도록 고마웠다.

“그렇네. 우리 별이도 점점 아기들이 귀여워지고 있다고 했었지. 이제 슬슬 버스 탈 시간인데 우리 돌아갈까?”

한별이 고개를 끄덕였다.


호텔에 맡긴 짐을 찾아 버스정류장 앞에 섰다. 아침이라 다행히 버스 안에 승객이 많이 없었다. 호텔에서 이십 분이 채 걸리지 않아 지다이무라에 도착했다. 다행스럽게도 매표소 옆에 커다란 라커룸이 있었다. 지원과 한별의 커다란 캐리어도 보관이 가능한 크기였다. 600엔을 넣자 달칵- 소리와 함께 라커 문이 잠겼다.

지다이무라는 닌자, 요괴 등 한별이가 좋아할 만한 요소들이 많은 곳이었다. 민속촌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일본식 기와 건물들이, 입구에는 옛날 일본의 백성들이 입었을 법한 시대 의상을 걸친 사람들이 서 있었다.

마침 사무라이 결투 쇼가 시작이라 지원과 한별은 서둘러서 극장으로 들어갔다. 입구에서 안내서와 함께 습자지 같은 하얗고 얇은 종이를 나눠주었다. 안내서에는 극이 끝나고 팁을 무대로 던져 주는 데 사용하는 종이라고 쓰여 있었다. 에도시대 연극 구경의 기분을 체험하기 위한 것이며 강제는 아니라는 안내까지 친절하게.

“엄마, 나도 이거 해볼래.”

지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지갑에 들어있는 동전을 한별에게 내보였다. 아이는 그중 몇 개를 집어 종이 위에 얹어 오므려 감쌌다.

드디어 극이 시작되었다. 목검을 든 남녀 주인공이 대련하는 장면으로 시작되는 복수극이었다. ‘검은 상대를 베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대의 힘을 저지하기 위해 존재한다’라는 극 중 스승의 대사대로 여주인공은 결국 상대를 죽이는 대신 칼등으로 때려눕혀 오빠의 복수를 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오- 엄마. 검도라는 게 되게 절도 있고 멋있어 보여.”

“그러게 말이야. 진정한 복수는 죽이는 게 아니라 제압하는 거라는 메시지도 멋졌어.”

“응응.”이라고 대답하며 한별이 지원을 잡아끈 곳은 닌자 미로라는 곳이었다. 거울과 착시를 이용해서 길을 찾아 나오는 것인데 어른인 지원도 꽤 재미가 있었다. 평평한 바닥이 비스듬하게 기운 것처럼 보인다던가, 문을 열어 들어간 곳이 결국 제자리이던가 하는 식으로 아리송한 미로였다.

미로를 탈출하자 밖에 서 있던 닌자 복장의 청년 세 명이 이제 곧 닌자 활극이 시작된다고 알려주었다. 한별은 기대를 감추지 못하고 지원의 손을 끌고 콩콩 뛰었다. 한별 또래의 남자아이들에게 있어 자객은 악당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닌자라면 그럼에도 멋진 존재인 듯했다. 무대 위에서 정말 빠른 속도로 이리저리 날고, 숨고, 튀어나오는 통에 지원과 한별은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실제 닌자들이 존재하는 시대에 살았다면 지원은 한숨도 편히 잠들지 못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극이 끝나고 나니 포토타임이 있었다. 닌자와 함께 찍는 사진이라니 한별은 사진을 찍기도 전에 이미 뿌듯한 얼굴이었다. 배우들은 포즈를 바꿔가며 다양한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배려해 주어 두 사람은 근사한 사진 몇 장을 건졌다.

그다음엔 ‘깜짝 오두막’이라는 요괴의 집이었다. 한국의 ‘귀신의 집’의 일본판으로 일본의 다양한 요괴들이 툭툭 튀어나와 긴장을 더하는 곳이었다. 귀신의 집에 비하면 전래동화 속 귀신들처럼 정감 있었지만 그럼에도 한별은 지원의 손을 꽉 잡고 놓지 않았다. 평소에 요괴 이야기를 좋아하면서도 막상 그들과의 대면은 무서운 모양이었다. 우산에 눈이 달리고 긴 혀가 늘어져 있는가 하면, 김 나던 탐스러운 호빵이 손을 가까이 하면 똥으로 변하기도 했고, 불공을 드리는 스님과 양 옆의 동자승의 얼굴이 180도 돌며 눈이 하나인 요괴로 변하기도 했다. 그 밖에도 천정에 닿을 만큼 목이 길게 늘어나는 여인, 거미줄로 여인을 감아 댕그르르 당겨 잡아가는 커다란 거미, 풀 속에서 갑자기 고개를 들며 물을 뿜는 갓파까지 어느 것 하나 사소한 게 없어 지원과 한별은 지루할 틈 없이 그 재미를 만끽했다.

‘오이란 쇼’라는 것도 재미있게 봤다. 미모와 기예가 뛰어난 에도시대 유곽에서 최고 높은 여성을 의미하는 ‘오이란’의 무대라는 뜻인데, 관광객 참여형 쇼이다 보니 모든 관객이 깔깔 웃었다. 접대를 받는 당시 일본 통치자 역할을 하는 남성으로 한국인 아저씨가 자원을 했다. 쇼군으로서 견습 소녀들로부터 정성스러운 대접을 받으며 담배와 술을 대접받고 일본의 전통 놀이인 도센쿄에 도전하기도 했다. 부채를 던져 목표물을 맞히는 게임인데 아저씨가 재치 있게 참여를 해서 장내 모든 사람들을 웃게 했다. 마지막으로 오이란과 재회를 약속하며 ‘유비키리겐만’ 의식을 하고, 관객들은 다함께 그들이 리드하는‘산본지메’라는 연회 마지막에 치는 박수를 리드미컬하게 연습하기도 했다. 오이란들의 춤을 끝으로 모두가 활기찬 무대를 끝이 났다. 일본어를 알아듣지 못해도 워낙 유쾌하게 극을 이끌어 모두가 즐거운 시간이었다.

매점에서 간단한 기념품을 사고도 버스 시간이 여유 있게 남았다. 지원과 한별은 튀김우동으로 추위와 허기를 달랜 후 식당 옆 휴게실에 들어가 버스를 기다렸다. 휴게실은 다다미가 깔려 있는 전통식 방으로 안에 난로가 피워져 있어 따뜻했다. 버스는 시간에 맞춰 도착했다. 노보리베츠 역에서 기차로 갈아탔다.


카페의 많은 사람들이 예찬하던 바닷가 마을 하코다테에서는 무엇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으려나. 어제까지만 해도, 눈 속에 갇혀 세상이 멀게만 느껴졌던 두 사람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조용히 다음 여행지로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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