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시대에 학교가 생존하는 법
온라인 수업인데 출근해?
교사로서 꽤 자주 듣게 되는 질문이다.
너무 당연하게도 우린 매일 출근한다.
그 당연한 사실을 의아하다는 듯 묻는 사람들에게 “그럼요.”라고 웃으며 대답하지만, 아이들이 없는 학교니까 교사 또한 학교에서 할 일이 없는 것으로 치부되는 것 같아 달갑지는 않다.
우리도 학교로 출근해
다른 직장인들과 똑같이 일한다.
아침에 일어나 교육부에서 만든 ‘건강상태 자가진단’ 앱을 이용해 열이 있는지 해당하는 증상은 없는지, 함께 거주 중인 가족 중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은 사람이 있는지 등을 체크해서 전송한다. ‘출근이 가능함을 안내드립니다.’ 문구가 뜨는 걸 확인하고 출근길에 나선다.
여기서부터 담임교사들은 아침 전쟁을 치른다.
아이들의 자가진단 여부를 실시간으로 체크하면서 출근해 가방을 내려놓기도 전에 아이들에게 일일이 전화해 자가진단을 독려한다. 한 반 평균 인원은 스물다섯 명. 그 모든 아이들을 매일 체크하고 전화를 돌리고 통화가 되지 않으면 부모님에게 전화를 해서 아이의 상황을 확인해야 한다. 그와 동시에, 정해진 조례 시간에 맞춰 화상으로 아이들을 만난다. 그러나 아이들은 카메라도 마이크도 켜지 않는다. ‘고요 속 외침’. 아이의 이름은 둥둥 화면을 떠다니지만 이름을 애타게 불러야 겨우 대답이 돌아온다.
십여 분 정도 조례를 마치면 1교시를 알리는 종이 친다. 저마다 노트북과 교과서를 안고 해당 교실로 들어간다. 교실에 들어가 참가한 아이들 이름을 하나하나 호명하며 출석을 체크한다.
수업 콘텐츠를 제작해서 올리는 수업은 아이들과의 소통 부재를 야기하고, 학생에 대한 관리 부실을 초래할 수 있다는 교육부의 우려에 힘입어 하나둘 교실에 입성해 수업을 진행하지만 동시 접속하는 인터넷망이 원활하게 돌아갈 리 만무하다. 심지어, 무려 ‘실시간’으로 풀가동해야 할 노트북은 2012년에 제조된 유물로, 2020년을 따라가는 데 무리가 있어 결국 사비를 털어 노트북을 장만했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교사는 교사대로 답답한 수업을 진행하고 수업이 없는 시간엔 수업 콘텐츠를 제작한다. 그리고, 각자 맡은 업무를 처리하느라 공강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른다.
교사의 업무라는 게 ‘수업’ 말고 뭐 대단할 게 있을까 수많은 ‘오해’들 앞에 일일이 열거하며 말하기도 수고스러우나 학교라는 조직이 돌아가기 위해 해야 하는 일들은 무궁무진하다.
진로진학과 관련한 일을 시작으로 학생 전출입, 인사 및 표창 업무, 교육과정, 생활기록부, 학생지도, 다양한 교육 사업, 수업과 고사 관련 업무에 경쟁 시대에 걸맞은 학교 홍보 업무, 학생 생활 전반(각종 자율활동, 동아리, 봉사, 진로 관련 활동 등) 관련 업무 등등. 업무의 경중에 따라 내가 수업을 하러 오는 건지 업무를 하러 오는 건지 헷갈릴 정도로 업무 과중에 시달리기도 한다.
아이들은 점점 줄어드는데 그에 맞게 교원 수나 교사들의 급여도 조정이 되어야 하는 게 아니냐는 목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학교의 실정을 모르고 하는 소리들이니 그러려니 하다가도, 잘못되면 모든 것을 학교 탓으로 돌리는 사회적 분위기와 몇몇 부적합한 학교와 교사들이 일으킨 사건 사고가 요즘 교사와 학교의 전반적인 분위기인 것처럼 매도당할 때, 학교 현장에서 최선을 다하는 교사들은 맥이 풀린다.
수많은 부정부패와 비리, 뇌물 수수 혐의 등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는 사건들까지 더해 교사들은 청렴 교육을 정기적으로 받아야 하고, 김영란법까지 등장해 아이들이 주는 초콜릿 하나 사탕 하나도 못 받는 교사들에게 스승의 날은 이미 무의미해진지 오래다. 재량휴업일 혹은 다른 행사들로 채워버린 스승의 날 즈음엔 여지없이 어떤 선물도 받지 말라는 공문이 내려온다. 아이들에게 받아봐야 뭘 받겠냐 만은, 사제 간의 소소한 정을 나누고 감사하다는 말로 소통할 수 있는 기회조차 박탈당한 듯해 씁쓸한 5월을 맞이하기 일쑤다.
학원 강사 생활을 시작으로 학교가 좋아 교단에 선지 12년째. 가끔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그런 소리들을 들어가며 버티고 있나 싶은 회의감에 피로해진다.
무엇보다, 감사함을 나눌 줄 모르고 선생님을 봐도 인사하지 않고 그냥 지나치는 아이들의 모습을 마주할 때면 그 회의감은 배가 된다. 온라인에서라도 아이들 하나하나 목소리를 듣고,
“선생님,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선생님, 다음에 봬요.”
라는 말을 꼭 들어야겠다는 마음으로 오늘도 하나하나 이름을 불러주면서 수업을 시작하고 마쳤다.
“얘들아, 수업 들을 만해? 실시간 온라인 하니까 어때?”
“학교 가고 싶어요. 선생님 수업 직접 듣고 싶어요.”
그러나, 선생님 수업을 직접 듣고 싶고 선생님이 보고 싶다는 아이들의 말 한마디에 그 회의감도 와르르 무너진다.
뭐가 됐든 정답은 아이들이다.
그래서 또 결국
내가 있어야 할 곳은 학교인 셈이다.
시대가 변했고, 아이들의 자기표현은 강해졌고, 깍듯한 예의범절보다는 친근함이 우선인 요즘 아이들은 나 때와는 많이 다르다. 교무실로 선생님이 오라고 하면 발발 떨던 우리가 몸을 잔뜩 웅크리고 교무실로 들어서면서 느낀 건 어쩌면 선생님에 대한 공경보단 두려움 아니었을까. 교무실에 들어오길 꺼리지 않고, 선생님이 보고 싶어 교무실에 오는 아이들은 우리를 ‘선생님’이 아니라 ‘쌤’이라 부른다.
그 1음절의 호칭이 나는 그렇게 좋다.
‘백년지대계’여야 하는 교육이 솔바람에도 흔들리기를 자주 하는 갈대 마냥 이리저리 휘청일 때 우리는 늘 위험 신호를 감지하지만 이제 그 아슬아슬한 위험마저 일상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늘, 그 변화의 기류에 서서 방황하고 휘청하는 장본인은 아이들이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결론은, 수많은 오해와 변화에도 이상한 사명감을 안고 나는 학교로 출근한다. 변변찮은 이 글로 조금이나마 오해가 이해로 변화되길. 더불어, 따뜻한 온정이 가득한 학교를 꿈꾸며 시작한 나의 교직생활이 오래도록 아이들의 따스한 온기로 가득하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