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시 20분에 문 여는 한의원
한국인의 대부분이 그렇듯 나 또한 다리가 짧고 허리가 긴 체형을 타고났고, 입시를 준비하는 중고등학생 시절에는 하루에 12시간을 책상에 앉아있었다. 짝다리를 짚기 좋아했고 다리 꼬는 건 의자에 앉아있는 기본자세이며 좌식생활의 여파로 아빠다리가 너무 편해 지금도 사무실에서 의자에 앉아 아빠다리를 하고 업무를 본다. 분명 내 생활습관에 공감하는 한국인이 꽤 많을 것이라고 장담한다. 우리 사무실에도 꽤 보이거든.
소녀시대의 'gee'가 한창 거리 곳곳에서 울려 퍼지던 시절, 유행에 따라 구매한 스키니진을 입으면 항상 오른쪽 바지가 좀 더 짧았다. 아니, 사실 바지 길이는 양쪽이 똑같은데 골반이 돌아가있어서 바지 길이가 차이나 보이는 것이었다. 싸구려 바지라서 길이가 다른 줄 알았는데 내 몸이 싸구려라 모든 바지를 싸구려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동안 죄 없이 수감된 나의 바지들에게 사과의 말을 전한다.
타고난 체형, 오랫동안 지속된 바르지 않은 자세는 당연하게도 내 몸을 조금씩 조금씩 망가뜨렸다. 짝짝이가 된 내 다리가 그 증거다. 하지만 그 심각성을 별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고 엄마의 잔소리에 마지못해 한의원을 방문하게 되었다. 처음 내원한 한의원의 기억은 썩 나쁘지 않았고 골반 교정에 탁월하다는 추나 치료는 정말로 내 다리의 길이를 똑같이 맞춰주었다. 우드득 부드득 뼈가 부딪히는 소리가 나고 나면 몸이 똑발라진다. 참 신기한 치료법이다. 한의원 원장님은 치료하지 않으면 척추측만증이 올 것이라고 경고하였고 나도 어느 정도 심각성을 인지하고 생활습관을 바꾸었다. 라는 결말이었다면 아직도 내가 한의원을 다니진 않았겠지.
몇 년, 아니 최소 10년 이상 길들여진 편한 자세, 그러니까 앞서 서술한 바르지 않은 자세들이 나는 너무 편했고 나름 의지를 가지고 교정하고자 하였으나 쉽지 않았다. 잠깐이라도 의식하지 않으면 바른 자세에서 이전의 자세로 너무 쉽게 돌아갔고 나는 또 조금씩 포기하고 있었다. 대신 한의원을 지속적으로 갔다. 원장 선생님은 추나 치료를 너무 많이 받는 것도 몸에 좋지 않으니 운동을 해서 몸의 중심 부분 근육을 키워 몸이 바른 자세를 유지할 수 있는 힘을 기르라고 당부하셨다. 나도 그 의견에 동의하였고 필라테스, 플라잉 요가, 폼롤러 스트레칭 등 운동을 하며 힘써보았지만... 결과가 썩 신통치 못했다. 잠깐 깔짝인 것도 아니고 나름 1년 이상 꾸준히 운동을 하였는데도 나는 여전히 한의원에서 추나 치료를 받았어야 했다. 이쯤 되니 골반 틀어짐은 만성 질환이 된 것 같았고 평생 한의원에 다녀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 지역 저 지역 이사 다니는 동안 나는 계속 추나 한의원을 찾아다녔고 이윽고 이 천혜향 한의원까지 오게 된다. 물론 한의원 이름은 가명이다.
나의 한의원 고르는 철칙은 간단하다. 집에서 최대한 가까운 곳. 한 때는 골반에 유명하다는 한의원을 찾아다닌 적도 있었는데 이름값이 높다고 치료가 효과적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리고 꾸준히 다녀야 하는 병원은 집 근처에 있는 편이 좋다. 다행히 여러 번의 이사를 거쳐오는 동안 늘 집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동네 한의원 한 곳은 있었다.
작년 12월에 또 이사를 하게 되었고 집 바로 앞에 추나 치료가 가능한 한의원이 두 곳이 있었다. A 한의원은 대로변 1층에 위치해 있고 네이버 리뷰도 많고 규모가 상당히 커 보이는 곳이었고 9시 30분부터 진료를 시작한다. B 한의원은 대로변 2층에 위치했으며 네이버 리뷰가 상대적으로 매우 적었다. 하지만 리뷰 하나하나가 환자들의 만족도가 높은 듯했다. 그리고 좀 특이하다고 생각한 것은 9시 20분부터 진료 시작이었다. 그래서 내가 어느 한의원에 갔냐고?
나는 보통 토요일 오전에 한의원 가는 걸 좋아한다. 모든 직장인들이 그렇듯이 평일에 시간을 내기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는 늦잠꾸러기라 10시에 출근해서 보통 7~8시 정도에 퇴근해야 하는데 그 시간까지 운영하는 한의원을 찾기란 어렵다. 그래서 고른 게 토요일 오전. 동네 한의원일수록 나보다 부지런한 어르신들이 한의원에 일찍 내원하시기 때문에 최대한 나도 이른 시간에 가는 편이다.
한의원에 가기로 마음먹은 날 나는 9시 15분경에 집에서 나섰고 9시 20분 즈음에 두 개의 한의원 사이에서 선택해야 했다. 하지만 큰 고민 없이 9시 20분에 오픈이라 이미 문이 열려있을 B 한의원으로 결정하였다. 고작 10분 차이나는 진료 시작 시간이 나의 선택을 결정해 준 것이다. 이럴 거면 위치가 어떻고 리뷰가 많고 적고는 왜 봤냐고? 그래도 모르고 가는 것보단 낫지 않은가.
한의원 문을 열자 여느 한의원과는 사뭇 다른 느낌의 인테리어에 젊은 데스크직원이 나에게 인사해 주셨다. 보통 한의원의 이미지는 따듯한 우드 인테리어에 한약 냄새가 솔솔 나는 전통적인 느낌이 대부분이었는데, 이곳 천혜향 한의원은 내가 치과에 왔나 착각이 들 정도로 새하얀 인테리어가 눈에 먼저 들어왔다.
"예약하고 방문하셨나요?"
"아니요, 첫 방문이에요."
"잠시만요, 저희 한의원이 예약제라 보통 예약이 꽉 차있는데... 지금 확인해 보니 취소하신 분이 있어서 자리가 비네요. 바로 접수 도와드릴게요. 신분증 가져오셨죠?"
"네, 여기요."
이런, 전화라도 해보고 올 걸. 하마터면 헛걸음할 뻔했는데 행운이었다. 필요한 정보들을 기입한 뒤 접수했다. 물도 안 마시고 나온 터라 정수기 앞에 갔는데 작은 온장고가 있었다. 온장고 앞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있었다.
저희 한의원을 선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의 표시로 따뜻한 음료를 무상으로 제공합니다.
그냥 정수기 물을 마셔도 되지만 날씨가 춥기도 했고 괜히 음료를 마시고 싶어지기도 했다. 온장고 안에는 따뜻한 레쓰비캔과 보리차캔이 들어있었다. 보리차캔을 하나 따서 마시고 있는 동안 내 차례가 왔다. 안내를 받아 물리치료를 먼저 받으러 들어갔는데 놀랍게도 환자 한 명이 치료실 하나를 쓰는 구조였다. 내가 이때까지 다녔던 한의원들은 보통 큰 치료실 하나에 베드가 여러 개 있고 환자의 프라이버시 보호를 위해 커튼이 쳐져 있는 모양새였다. 근데 여기는 벽이 쳐져있다고. 내부에 캐비닛도 있어서 편하게 옷도 갈아입고 소지품을 보관할 수 있었다. 바스켓에 대충 넣어서 침대 밑에 넣어두지 않아도 되었다는 의미다. 그리고 이쯤 되면 직감한다. 아, 이 한의원 가격이 비싸겠구나라고.
추나 치료는 1년에 10번 건강보험 적용이 되기 때문에 물리치료와 침치료, 추나치료 등을 전부 받아도 보통 2만 원 안쪽 선에서 끝난다. 한 번은 TV에도 나오고 미리 예약을 하지 않으면 내원 자체가 안 되는 유명한 한의원에서 치료받은 적이 있었는데, 간호조무사도 한의사도 너무 바빠서 대충대충 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추나 자체도 몸을 좀 주무르다가 마는 느낌이 들 정도였으니 이름값에 비해 매우 실망스러웠다. 결정적으로 한의사가 나에게 아무 고지 없이 약초침을 놓아주었는데 그 약초침이 보험이 안되어서 그날 내 치료비는 7만 원이 넘게 나왔다. 사회 초년생이었던 나에게는 1회 치료로는 꽤나 부담되는 가격이었고 후속 진료 예약을 하지 않음은 물론이요, TV에 나왔다, 라디오에 나왔다, 행사를 한다 등등 계속되는 광고문자에 결국 한의원 번호를 차단하게 되었다.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며 살짝 걱정이 되었지만 이미 들어온 걸 다시 돌아 나갈 만한 배짱은 없는 사람이다. 얌전히 누워서 다른 한의원에서도 똑같이 진행하는 찜질, 물리치료 등을 먼저 받은 뒤 원장실에 들어갔다. 원장님 첫인상은 한의원 원장보다는 체육 쪽 일을 하시게 생겼는데? 였다. 그리고 치료를 받은 뒤 알게 되었지. 원장님 몸이 왜 그렇게 좋으신지...
추나 치료 하는 한의원에 가면 무조건 추나용 테이블이 있다. 이 위에 환자가 올라가면 몸의 균형 상태를 진단하고 또 이 테이블을 이용하여 어긋난 몸을 바르게 맞춘다. 나는 오늘이 첫 내원이었고 내 몸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테이블에 올라가 누웠다. 원장님이 증상을 물어보셨다.
"어디가 아프세요?"
"예전부터 골반이 틀어져 있어서 계속 한의원을 다녔는데 어제는 걸을 때 왼쪽 다리가 아팠어요."
"다리 좀 볼게요. 어휴... 2.5cm나 차이 나네."
몇 달 바빠서 신경 쓰지 못한 사이, 내 다리길이는 2.5cm나 차이 난 상태였다. 원장님의 말투가 살짝 무거워졌다.
"목 한 번 만져볼게요."
원장님의 양손이 양쪽 어깨에서부터 뒷목, 머리까지 꾹꾹 누르며 올라갔다. 오른쪽보다 왼쪽이 훨씬 아팠다.
"왼쪽이 아프죠?"
"네, 왼쪽이 아파요."
"왼쪽이 많이 굳어있네요."
원장님이 손목에 손가락을 얹고 맥을 짚으셨다. 그리고 평소 생활 습관 및 변비는 없는지, 생리통이 심한지 등등 건강 상태를 확인하는 원장님의 질문이 이어졌다. 원장님 소견으로는 내 몸은 차가운 편이라 소화가 안 좋은데 그걸 제외하면 내 몸은 썩 나쁘지 않다고 하셨다. 뒤틀린 몸을 제외하고.
"환자분, 몸 이대로 방치하면 척추측만증 와요. 측만증은 한 번 오게 되면 수술하기도 어렵고 다시 정상 몸상태로 돌아가기 힘들어요."
덜컥 겁이 났다. 교정이 잘 안 된다고 내 몸인데 내가 너무 무심했던 걸까? 척추측만증이라니. 눈물이 날 것 같진 않았지만 늘 사서 걱정을 하는 나에게 태산만 한 걱정을 끼얹는 말이었다.
원장님은 내 몸 상태를 내가 이해하기 쉽게 비유를 사용하여 설명해 주셨다. 나는 단순하게 골반이 틀어진 게 아니며 왼쪽 골반쪽에서 계속 당기는 힘을 가하고 있으니 척추가 휘고, 내가 아무리 바른 자세를 하려 해도 이 왼쪽 골반이 풀려 있지를 않으니 다시 몸이 돌아간다는 것이었다. 활시위를 아무리 당겨도 다시 놓으면 되돌아가는 것처럼.
"다리 꼬기, 아빠 다리 같은 자세가 편한 건 이미 몸이 틀어져서 그래요. 바른 자세로 앉아 있기 힘드시죠?"
"네..."
"이 근육이 경직되어 있는 건 운동으로 풀 수 없는 근육이라 그래요."
진찰이 끝났으니 이제 추나 치료를 할 차례이다. 그런데 원장님 멘트가 심상치 않았다.
"저희 한의원은 다른 곳이랑 추나 치료 하는 방식이 조금 달라요."
보통 추나 치료라고 하면 추나 테이블에 환자가 올라가 있고 추나 테이블을 이용해서 덜커덩 덜커덩 꾹꾹 누른 뒤 다리 길이를 재어보고 맞을 때까지 그걸 반복한다. 내가 한의사가 아니라서 정확한 설명인지는 모르겠는데, 몇 년 간 내가 받아온 추나 치료는 한의원이 달라도 대강 저 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원장님의 치료는 확실히 달랐고 나는 한의원에서 소리를 지를 뻔했다. 대신 아프다고 징징댔다.
"조금만 참으세요, 하나, 둘, 셋."
"선생님 너무 아파요."
"네, 몸이 안 좋아서 그래요. 조금만 더 버텨볼게요."
PT선생님과의 대화 같기도 한데, 원장선생님과 나의 대화였다. 치료 방식은 내가 서술해도 되는지 판단이 서지 않아서 생략한다.
추나 테이블에서의 치료가 끝나고는 다시 물리치료를 받았던 방으로 돌아갔다. 골반과는 전혀 상관없는 곳에 침을 맞았고 나는 또다시 아픔에 몸을 흠칫흠칫 거리며 비명을 참았다. 침치료까지 끝나고 원장님이 맨 처음 해주셨던 것처럼 양 어깨에서부터 뒷목, 머리까지 꾹꾹 누르셨다. 신기하게도 왼쪽 뒷목이 이전만큼 아프지 않았다. 우리 몸이란 게 참 신기하다. 목이 아픈데 비전공자의 상식에서는 전혀 상관없는, 예로 들어 발바닥 같은 곳에 침을 놓는데 목의 통증이 사라진다. 이래서 한의원이 21세기에도 살아남은 것 아닐까?
"아까보다 훨씬 낫죠?"
"네! 너무 신기하네요."
"이제 바른 자세가 더 편한 몸이 되도록 해드릴게요. 2-3달은 꾸준히 내원하세요."
"넵."
안마 의자로 마무리까지 하고 나니 나의 긴 첫 치료가 끝났다. 약 한 시간 반 정도 소요되었다. 예상했듯이 치료 가격은 비쌌지만 이전과 달리 나는 그 값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꺼이 카드를 내밀어 결제한 뒤 다음 내원날짜를 예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