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에게 진심인 나라!
“사장님 나빠요...”
한때 개그프로에서 외국인을 채용해서 무임 노동 착취와 인권에 대한 내용을 패러디한 내용의 주인공이 바로 스리랑카 인이었다.
여행하기 전, 나는 스리랑카의 위치만 보고 이런 상상을 했었다. 스리랑카는 불교국가이니 본래는 인도령에 속해 있었으나 파키스탄이 종교적인 이유로 분리되었듯이 스리랑카도 종교적인 이유로 분리된 나라일 거라 생각했다. 이런 내 생각은 여행 가기 전에 그 지역에 대한 공부를 하면서 완전히 틀렸음이 드러났다. 스리랑카는 수시로 인도의 침략을 받으면서 인도반도의 영향을 받기는 했으나 자체 왕국을 유지해온 완전히 별개의 나라였다. 여행 프로그램이 남인도 지역과 함께여서 나라 분위기도 비슷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남인도 지역도 북인도와는 분위기가 달랐지만 스리랑카는 남인도와도 확연히 다른 나라였다.
그렇지만, 인도와는 떨어져 생각할 수 없는 나라이긴 하다. 가장 가까운 나라가 인도이고 인구의 15% 이상이 인도에서 건너온 민족(타밀족)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스리랑카에는 두 민족, 싱할라 족과 타밀 족을 모르고는 이해하기 어려운 나라다. 과거에는 남쪽은 코테왕국(싱할리족), 북쪽은 인도에서 건너온 지프나 왕국(타밀 족)으로 대립해 왔고, 19세기까지 계속된 영국의 식민지 시절에 건립된 홍차농장을 위해 인도 남부 노동자(타밀 족)들이 대거 이동하면서 타밀족 숫자가 더 많아졌다. 1948년 영국의 지배를 마지막으로 서구 열강이 물러간 다음에도 싱할리 족과 타밀 족은 계속 대립해 왔는데 정부의 무능으로 경제가 악화되면서 인종 차별주의가 더해져 내전이 발생하여 30년 동안 두 민족 간에 수많은 사람이 죽게되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2009년 타밀 반정부 조직이 항복하면서 민족 갈등 문제는 일단락 되어 안정을 찾았지만 그후 코로나를 거치면서 스리랑카 산업의 15% 이상 차지하는 관광산업이 중단되어 국가 부도 위기까지 겪다가 최근에야 관광이 재개되었다 한다.
스리랑카는 우리나라 제주처럼 인도반도 밑에 떨어져 있는 나라다. 그래서 스리랑카 사람들은 듣고 싶지 않은 표현이지만 ’인도의 눈물‘이라고도 불리는 나라다. 당연한 얘기지만 스리랑카 사람들은 ’인도양의 진주‘라는 표현을 더 좋아한다. 스리랑카는 아라비아해, 인도양, 뱅골만를 끼고 있어 무역로의 중심지가 될 수밖에 없는 그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가까이 있는 인도뿐 아니라 세계 열강들의 먹잇감이 되었다. 중동과 중국 사이의 중개지로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맨 먼저 16세기 포르투칼, 이어 17세기 네덜란드 그리고 프랑스를 거쳐 18세기 후반 영국에 이르기까지 스리랑카를 점령하고 그들의 식민지로 삼으려고 했다. 스리랑카의 또 다른 이름인 ’실론‘은 포르투칼이 명명한 것이라 한다.
스리랑카는 대한민국 면적의 65% 정도 되고 인구는 2,283만(‘22)으로 우리 나라의 40% 정도 되는 나라이다. 인구의 70%가 불교를 믿고 힌두교를 믿는 사람이 12%, 이슬람교도가 10%, 그 밖에 서구 열강의 침입의 영향이라 볼 수 있는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이 7% 정도 된다. 스리랑카를 이루는 민족은 크게 두 민족인데 불교를 믿는 75%는 싱할리족이고 힌두교를 믿는 민족은 타밀족이 15%이다. 외부에서 보면 민족의 구성으로 보지만 현지인들은 싱할리 족만 스리랑카 국민으로 생각하는 듯 했다.
스리랑카 여행을 마친 내 느낌은 정말 꼭 한번 여행해 보라고 추천하고 싶은 지역으로 “최고”라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좋은 기억으로 남는 지역이었다. 스리랑카에서 전략적으로 한국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한국인들에게 우호적이었다. 최근 한국에서 스리랑카 청년들을 대상으로 4천 명의 산업연수생을 뽑아 교육시키고 있는 것도 그런 대접의 원인이 아니었을까 싶다. 마침 귀국 길 공항에서 만난 하얀 상의의 유니폼을 입은 스리랑카 연수생들은 연신 웃음을 지으며 우리들에게 말을 걸어 오기도 했다. 스리랑카 청년들에게 한국은 그들의 꿈을 이룰 수 있는 장소로 통하는 듯 했다(평균 임금이 10배 수준). 특히, 문재인 정부 이후 외국인에게 동일한 처우를 하는 한국은 외국인에게 차별적인 다른 주위 국가들에 비해 더 우호적인 나라가 되고 있었다.
남인도 여행을 마치고 도착한 스리랑카는 인도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먼저 거리가 깨끗했다. 남인도는 북인도에 비해서는 낫다고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지저분하고 도심은 정리되지 않은 무질서한 느낌이 있었던데 비해 스리랑카는 정돈되고 깔끔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만나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친절하고 여유로웠다. 이 지역 사람들의 평균 수명이 77세라는 데서 엿볼 수 있듯이 잘사는 것은 아니지만 좋은 날씨와 자연 탓에 기본적으로 먹을 것이 풍부한 나라란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좋은 환경과 풍부한 자원의 나라지만 지금까지 지도자를 잘못 만나 국민들이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다는 가이드의 푸념이 설득력 있게 들렸다.
첫 여행지를 가기 위해 중간에 들렀던 음식점에서부터 우리들을 특별히 대우한다는 강한 인상을 받았다. 음식점 지배인을 비롯한 종업원들이 미리 나와 안내를 하는가 하면 음식도 다양하고 정갈하였고 서비스도 좋았다. 식사 후에는 음식서비스에 대한 평가서를 건네면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어 인도에서 출발하여 하루만에 도착한 호텔은 정문에서부터 입구까지 거리가 상당할 정도로 규모가 큰 호텔이었는데 도착하니 종업원들이 시원한 물수건을 건네면서 우리를 환영했고 머무는 동안 무사고를 비는 안전 점화행사와 더불어 체크인을 하는 동안 호텔 카페에서 음료 서비스를 제공해 주었다. 호텔 앞 넓은 수영장에는 백로가 오가고 있었고 조금 더 먼 쪽에는 커다란 호수가 자리잡고 있었다. 호텔 객실은 빌딩형이 아니라 lodge 형태로 가구별로 숲 속 펜션 형태였는데 최고의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나중에 보니 오성급 숙박시설이었다. 패키지 여행 특성상 먹고 자는데 지출할 수 있는 비용이 제한될 것을 감안했을 때, 최고의 숙박과 식사 그리고 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는 지역이 바로 스리랑카 란 생각이 들었다.
우리들은 4박 5일 일정으로 스리랑카를 봤지만, 스리랑카 여행을 제대로 즐기려면 스리랑카만 일주일 이상 둘러봐야 한다. 실제 오는 길에 비행기에서 만난 분들은 스리랑카만 18일 동안 여행하기 위해 간다고 했다. 스리랑카 여행에서 꼭 봐야할 것은 네댓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불교 왕국 스리랑카를 보는 관광이다. 기원전 인도 마우리아 왕조 아쇼카 왕 때 불교가 전래된 이래 전 국민의 75%가 믿고 있는 불교의 유적지를 둘러보는 것이다. 부처님이 세 번이나 오셨다고 하고 부처님의 치아를 모신 사찰을 비롯하여 곳곳에서 부처님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둘째로 스리랑카 역사를 보여주는 유적지로 중세시대의 폴론나루와 유적군화 세계 8대 불가사의에 해당한다는 거대한 바위 산 위에 건설한 고대 왕국인 시기리야 같은 유적을 둘러 보는 일이다. 셋째로는 이 나라 이름이 실론이었다는 데서 알 수 있는 차의 나라다. 실론 중북부 중심으로 펼쳐져 있는 차 밭을 방문하고 차 재배과정을 경험해 보는 관광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스리랑카는 때묻지 않은 자연환경을 경험할 수 있는 곳이다. 이 나라 자연경관을 만끽할 수 있는 기차여행과 국립공원에서의 사파리 체험을 들 수 있다. 우리는 짧은 일정으로 인해 불교 사원과 시기리아 관광으로 구성되었으나 일정을 조정해서 사파리 체험까지 추가하며 짧은 스리랑카 여행을 즐겼다.
스리랑카는 불교의 나라다. 우리가 스리랑카에 머물면서 가장 많이 둘러 본 곳이 불교 사원이다. 스리랑카의 1, 2대 도시인 콜롬보, 캔디에는 불교사원뿐 아니라 힌두 사원, 이슬람 사원, 기독교 건물이 곳곳에 산재되어 있었으나 가장 많은 건물은 불교 사원이었다. 기원전 377년에 스리랑카의 싱할리 족이 세운 아누다다푸르 왕국이 천 년이상 지속되는데 이때 인도 반도의 마우리아 왕이었던 아쇼카 왕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이고 그때부터 스리랑카는 불교 국가가 되었고 부처가 세 번이나 다녀간 곳이 되었다 한다.
우리가 방문한 불교 사원은 불치사, 즉 부처님의 치아를 모신 사찰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스리랑카 2대 도시인 캔디에 위치하고 있어 캔디사원이라고 한다. 요란한 과정(신발 벗고, 긴 팔 입고...)을 거쳐 흰옷을 입고 불공을 드리러 온 불교신자들과 함께 긴 줄을 선 끝에 스치듯(사진 찍을 사이도 없이) 본 불치 보관함은 황금빛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그 앞에 수 많은 신자들이 정성스레 준비한 꽃 접시나 예물을 드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하도 정중해서 나도 조심스레 경건한 마음으로 그곳을 지나오긴 했으나 과연 부처님이 이런 모습을 원했을까 하는 것에 대해서는 의문스럽다. 뿐만 아니라 나는 그곳에 있다는 치아가 정말 부처님의 것인지? 정말 있기는 한 것인지? 역시 믿음이 가지 않았다. 모든 종교에서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그렇게 믿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중요할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려와서 함께 있는 박물관을 구경하고 때마침 불교 공휴일(무료 월 1회)을 맞아 흰옷 입고 방문한 수많은 사람들이 설법을 듣고 있는 현장을 지나면서 문화적인 생경함을 느꼈다. 남인도에서 힌두 사원을 가면 신자들 대부분이 붉은 옷을 입고 오는 것과 대조적이었다.
다음으로 방문한 불교 사원은 담불라 황금사원이었다. BC 1세기 경 신할라 왕조 19대 왕이 건립하였다는 곳인데 이곳에는 거대한 바위 아래 다섯 개의 방으로 이루어진 곳에 수많은 불상이 놓여져 있었고 천정에는 불화들이 그려져 있었다. 특히 어마어마한 와불을 비롯하여 다양한 모양의 불상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불상이 160개 천정 그림이 1000개에 이른다고 한다. 불상 집단수용소(?) 같은 곳이었다. 과연 스리랑카는 불교의 나라구나란 생각을 들게 한 장소였다.
돌아오는 날 콜롬보 공항으로 가기 전에 방문했던 사찰, 켈레니야 사원은 부처님이 세 번 째 방문한 사찰로 유명하다고 했다. 이곳에는 본 사찰 본사 옆에는 흰색의 커다란 역깔때기 모양의 불탑이 자리잡고 있었다. 무엇이 들었을까 궁금했는데 물어볼 사람이 없어 그만 뒀다(가이드는 잘 몰랐다.) 이곳은 부처님이 콜롬보 항을 통해 들어와 이곳을 방문한 장면의 불화가 있었는데 직접 이곳에서 설법을 하셨던 장소라고 했다.
스리랑카에는 고대 천 년 이상 지속된 아누다다푸르 왕국이 있었는데 서기 500년에 가장 융성하게 되고 이때 이 지역의 가장 유명한 유적지인 시기리야가 건립된다. 시기리야는 5세기 경 인도의 지배를 받을 당시 평민 어머니를 둔 장남 카사퍄가 왕족 출신 어머니를 둔 차남에게 자리를 빼앗길 것을 염려해 아버지를 죽이고 차남 목갈나이를 피해 180미터의 사자 바위 위에 세운 요새 도시다. 시기리야는 멀리서 보면 사자의 형상을 가지고 있다 해서 사자의 암석 뜻을 가지고 있는 이름이다. 수많은 관광객이 줄을 지어 시기리야 꼭대기를 향하고 있었는데 중간 쯤에 큰 사자 발톱 모양의 바위가 문 양쪽에 조각되어 있는데 과거에는 문이 사자의 입으로 들어가는 형태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사자 입에 해당하는 문을 통과해 전체 1000여 개의 계단을 오르니 과거 왕궁과 도시의 흔적이 나타났다. 이 꼭대기에 왕궁을 짓고 안심하고 살았을텐데 인도로 잠시 피신해 힘을 기른 목날나이가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 오자 패하고 자살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과연 8대 불가사의에 속한다는 이름이 붙을 정도로 이런 곳에 어떻게 왕국이 존재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지금은 흔적만 남았지만 180미터의 높이의 화강암 바위에 만들어진 왕궁뿐 아니라 목욕시설 등 연회시설 등이 믿기지 않았따. 바위 곳곳에는 당시 궁내 사람들이 오르내릴 수 있도록 바위 계단이 패여져 있었다. 궁전과 성곽과 떨어진 곳의 회전 계단(인공적으로 설치된)을 올라가니 동굴이 나타났는데 그 동굴에는 21명의 작은 미인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이 그림은 아잔타 벽화에 가깝다 하는데 스리랑카에서 가장 오래된 그림이라고 했다.
스리랑카의 자연을 경험하려면 북부 차밭 경험이나 기차여행을 했으면 좋았겠지만 우리는 콜롬보에서 담불사 지역 그리고 캔디, 캔디에서 콜롬보를 오가는 동안 간접적으로 스리랑카의 때묻지 않은 자연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오가면서 길에서 만난 코리리 모습만으로 아쉬워 급히 추가된 사파리 체험에서 다소 그 아쉬움을 떨칠 수 있었다.
스리랑카에서는 사파리 체험이 가능한 곳이다. 스리랑카에는 사파리 체험을 할 수 있는 장소가 몇 군데 있었는데 우리가 묶는 호텔 근처에 민네리아 국립공원도 사파리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라 일행이 함께 경험할 수 있었다. 짚차 당 4명씩 탑승하여 민네리아 국립공원을 약 2시간 돌아보며 야생 동물을 보는 프로그램인데 기대한만큼 다양한 동물을 체험할 수는 없었다. 다만, 야생 코끼리 떼는 여러 번 짚차가 근접한 상태에서 목격하며 즐길 수 있었다. 그 외 물소 떼, 공작은 볼 수 있었지만 그리 많지 않았고 가끔 눈에 띈다는 표범이나 사슴 무리들은 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시원한 밀림 공기를 가로 지으며 개방된 차 위에 서서 대자연을 만끽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그리고 캔디에서 들렀던 ’보태니컬 가든‘은 거대한 자연 식물원이었는데 걸으면서 이곳 열대지방의 다양하고 신기한 식물을 관람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내국인 보다 터무니없이 높은 15배인 18,000원 정도였으나 그리 아깝게(?) 느껴지지는 않을 정도로 좋은 시간이 되었다.
귀국 길에 들렀던 이곳 수도 콜롬보는 해변을 끼고 있는 200만 인구의 도시였는데 과거 포르투칼 점령 시절의 흔적과 더불어 불교, 힌두교, 이슬람교, 기독교 등 각종 종교가 혼합된 도시로 새로운 스리랑카 건설을 위한 역동적인 도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번 여행에서 미처 경험해 보지 못한 기차여행, 스리랑카 남부 여행, 스리랑카 중북부 차밭 여행 등 기회가 되면 좀더 여유를 갖고 다시 한번 찾고 싶은 힐링 여행지라 생각되었다. 여행하면서 만난 어떤 부부가 자신들은 지금까지 70여 개국을 여행했는데 그중 최고의 여행지는 스리랑카였다는 말이 괜한 말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