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근 식탁에 차린 하늘의 만찬
베를린에 도착한 지 사흘째 되던 날 유명한 베를린 돔 근처를 걷다가 또 하나의 푸른 돔을 발견했다. 돔은 남태평양의 바다처럼 파랬고 꼭대기엔 아무런 장식도 없었다. 작은 그리스 신전 같은 건물과 돔은 좀 따로 노는 듯한 느낌이었지만 그냥 지나쳐갈 수 없게 만드는 묘한 힘이 있었다.
가던 길을 멈추고 무거운 청동 문을 밀고 들어가니 극한의 미니멀리즘을 구현한 듯한 공간이 펼쳐졌다. 고대 로마의 판테온을 닮은 건물 외부와는 달리 안쪽은 마치 미래 도시의 회관에 들어오기라도 한 듯한 기분이었다. 잠시 후 벽에 설치된 파이프오르간과 중앙의 십자가를 보고서야 이곳이 교회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제단을 마주 보고 있는 벽엔 은빛 파이프 오르간이 설치되어 있고 그 아래엔 진회색 양모 펠트가 깔린 나무의자들이 설교대를 향해 놓여있었다. 대부분의 교회나 성당 신도석은 나무 벤치 형태인데 반해 헤트비히 성당은 원형 극장의 객석처럼 일인용 의자가 제대를 빙 둘러싸고 배치되어 있었다.
사실 미사나 예배는 사제가 주도하는 한 편의 연극을 떠올리게 한다. 사제는 복사들을 이끌고 제단에 올라 미사를 집전하는데, 신도석보다 한참 높은 제대는 밝은 조명과 초로 장식되어 사제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춘다. 비종교인의 시각에서 보자면, 미사나 예배는 객석에 앉아있는 신도들 앞에서 사제가 이끄는 영적인 '퍼포먼스'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가톨릭 미사의 성찬전례는 예수님과 한 식탁에 앉아 빵과 포도주를 나누었던 최후의 만찬을 재현하는 드라마의 절정이다.
독일은 종교개혁의 발원지이니만큼 개신교도가 주류일 것 같지만 의외로 루터교와 가톨릭이 각각 전체 인구의 20%남짓 차지하고 있다. 이번 여행에서도 독일의 여러 도시와 시골 곳곳에서 크고 작은 성당들을 자주 만날 수 있었다. 이웃 네덜란드에서는 오래된 성당들이 대부분 레스토랑이나 카페로 이용되거나 폐쇄되었던데 비하면 독일은 훨씬 덜한 편이었다.
루터교가 주류를 이루었던 프로이센 왕국에 성 헤트비히 성당이 지어지게 된 배경에는 실용 군주 프리드리히 2세의 종교관용정책이 있다.
18세기에 접어들어 프로이센 왕국은 오스트리아 일부지역을 합병했을 뿐 아니라 폴란드와 보헤미아 지역으로부터 많은 가톨릭 이민자들을 받아들였다. 실용적인 군주였던 프리드리히 2세는 이들에게 예배공간을 마련해 줌으로써 국가를 통합하고 주변 가톨릭 국가들과 외교 전에도 적극 활용할 수 있었다.
당시 프로이센으로 유입된 가톨릭 신자들 다수가 폴란드 출신이었기 때문에, 폴란드에서 존경받던 성녀 '헤트비히'의 이름이 따 지어졌다.
헤트비히 성당은 1773년 로마 판테온을 본떠 건축된 이래, 여러 차례 보수 공사를 거쳤다. 대표적으로 제2차 세계 대전 중 연합군의 폭격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은 후 내부를 모더니즘 스타일로 전면 재설계하였고, 극도로 간결한 현재의 디자인은 6년의 리노베이션을 통해 작년 11월에 새롭게 공개되었다.
성당 안을 둘러보니 긴 창문에는 화려한 스테인드 글라스 대신 엷은 빛깔의 색유리가 끼워져 성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고, 그 아래에는 열두 사도의 조각상과 마리아상이 놓여있어 신자들이 자연스레 묵상할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졌다.
보석이 박힌 황금 십자가는 제대를 장식하는 유일한 성물이었다. 순교자의 피를 상징하는 호박과 마노, 터키석이 들어간 이 십자가는 신앙공동체의 핵심이 무엇인지 또렷이 보여주는 것 같았다.
나는 신자석에 앉아 이 성당에서 펼쳐지는 성찬 전례를 상상해 보았다. 서열 없이 둥글게 둘러앉은 신자들과 두 손을 들어 하느님을 경배하는 사제, 그의 이마에 떨어지는 푸른 돔의 햇살.
성 헤트비히 성당은 누구나 신에게 한걸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성소임에 틀림없어 보였다.
■St. Hedwig Cathedral
https://maps.app.goo.gl/MtKSJ8Fj7ViCdhxG9
월요일~금요일: 오전 10시 ~ 오후 5시
토요일: 오전 10시 ~ 오후 4시 30분
일요일: 오후 1시 ~ 오후 5시
https://youtu.be/JFFQrR1 mDCc? feature=shared
이 곡은 에스토니아 작곡가 '아르보 패르트(Arvo Pärt)'의 작품 <Berliner Messe>로 '성 헤트비히 성당'에서 처음으로 발표되었다.
이 곡은 1990년 베를린에서 열린 제90회 가톨릭 대회(Katholikentag)를 위해 작곡되었으며, 헤트비히 성당의 오르간과 합창단을 위한 곡으로 구성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