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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신의 날개를 딛고서

포츠담 광장의 '베를린 승리의 여신상'

by 루씨

지난달에 유럽의 여러 도시를 여행했다.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거쳐 독일로 가는 여정이었는데, 독일로 출발하던 날, 우리는

네덜란드 레이덴에서 렌터카를 픽업하고 난생처음 '아우토 반'을 달리는 경험을 했다. 시속 120km를 달리는데도 좌우로 추월하는 '선수'들 때문에 차 안에 있는 내내 머리에 쥐가 날 지경이었다. 레이덴에서 베를린까지는 약 700km. 아침 10시쯤 출발해 베를린에 도착하니 오후 5시쯤 되었다.

우린 지독한 속도에 질린 뇌와 허기진 위를 달래기 위해 먼저 브란덴부르크 문 근방에 즐비한 아시안 레스토랑에서 쌀국수를 먹기로 했다. 보행로에 테이블을 내놓고 영업하는 레스토랑에는 베트남 음식을 즐기는 베를리너(Berliner)들로 가득했다.


뜨끈한 쌀국수 국물과 짭짤한 닭고기 튀김이 들어간 '포(Pho)'로 배를 채우고 나니 긴장과 피로가 날아갔다.

6시가 넘었지만 해는 아직 넘어가지 않았다. 우리는 아무 데나 서서 사진을 찍다가 '티어가르텐(Tiergarten, 사냥 공원)'이라는 넓은 공원을 걷기로 했다. 공원 서쪽으로 '베를린 동물원'이 붙어있어서 냄새가 좀 났다. 16세기에는 이 공원이 제후의 사냥터였다는 설명을 읽고 나니 당장이라도 울창한 숲과 호수 곳곳에서 동물들이 나타날 것만 같았다.


드넓은 녹색 숲을 따라 걷는 내내 우리가 나침반 바늘처럼 바라보며 따라오게 만든 조형물이 있었다. 그건 바로 '베를린 승리의 여신상'.

포츠담 광장 주변은 고층 빌딩이 별로 없어서인지, 땅거미가 지는 하늘을 향해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 날개를 펼치고 있는 황금빛 '승리의 여신'은 베를린 스카이라인의 화룡점정이었다..


이번에 베를린을 방문하기 전에 이 조각상을 꼭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던 건 빔벤더스 감독의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 때문이었다. 이 영화는 내가 대학을 졸업하던 해인 1993년 무렵 국내에 소개되었지만, 독일에서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전인 1987년에 개봉됐었다. 사실 세월이 지나면서 영화의 줄거리는 듬성듬성해졌지만 첫 장면만큼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았다. '승리의 여신' 날개 위에서 황량한 도시를 무력하게 내려다보는 천사. 당시 이 흑백 포스터는 센세이셔널한 반응을 일으켰다.

사람들의 마음을 읽을 수는 있지만 누구도 구원할 수 없는 존재였던 다미엘은 서커스단원 '마리온느'를 사랑하게 되면서 날개를 버리고 땅으로 떨어지기로 결심한다. 부유하는 천사의 장에서 몸과 감정을 가진 인간의 삶으로 뛰어든 것이다.

나는 이번 여행에서 영화 속 '다미엘'이 승리의 여신상에서 땅으로 떨어졌던 것과 반대로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 사람들의 삶을 내려다보고 싶었다.

수많은 감정과 욕망이 소용돌이치는 인간의 마음을 가만히 내려다보기만 하고 싶었다.


꿈이 이루어지지 못한 건 순전히 그날 오후의 허기 때문이었다. '베를린 승리의 여신' 조망대에 오르려면 늦어도 6시에는 도착해야 했으나, 7시간 넘게 아우토반을 달려온 우리에게 조망 욕구는 허기보다 훨씬 아래 순위였다.


여행을 떠나기 전, 내가 맺고 있는 인연들을 떠올려보다가 깜찍 놀란 적이 있었다. 맺어온 평균 연차가 30년이 넘어가는 것이다. 그런데도 새록새록 또다시 맞추어야 할 일들이 생겨나다니. 하지만 그건 노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너무 오랜 시간을 함께 했기 때문이고, 여전히 서운함이 올라온다면 긴 세월의 변화무쌍함을 받아들이는 데도 지쳤기 때문인 것 같았다.

이때가 저 높은 곳에서 빛나고 있는 여신의 날개 위에 올라갈 타이밍이라고, 여행에서 돌아온 후에도 자주 그 날개 위에서 지금 이곳을 내려다보는 나를 상상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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