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살 즈음부터 전조증상 없이 주기적으로 (2~3개월마다) 심장이 엄청나게 뛰고, 식은땀을 흘렸다(한겨울에도 땀이 뚝뚝 떨어졌다). 밤새 잠을 10분도 못 자고 울면서 안아달라고 하는 증상을 자주 보여서 병원에 입원해서 MRA, 뇌파검사를 해봤지만 결과는 정상이었고 원인도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일주일 정도 힘겨운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더 평온해지는 패턴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런데 예기치 않게 긴 여행을 떠나기 5일 전, 바로 그 증상이 나온 것이다.
며칠을 못 자고 ‘망했다’는 불안감을 가지고 공항에 도착했다. 최대한 컨디션을 좋게 만들기 위해서 아들이 가장 좋아하는 스파게티를 사주고 익숙하게 보안검색대를 통과했다.
전날, 캐리어를 꺼내 짐을 챙길 때부터 컨디션이 괜찮아진 것 같았는데 의사표현을 못 하니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다. 그저 아이의 보여주는 모습으로 판단할 수밖에...
손해를 감수하고 예약을 취소할까 며칠을 고민한 것이 우스울 만큼 평온하게 세부공항에 도착했다.
세부에 오면 가장 먼저 먹고싶었던 졸리비 망고파이를 포장해서, 예약해 둔 렌터카를 탔다.
바삭하고 달콤한 망고파이 너무 먹고 싶었어~!
세부 시티를 빠져나와 졸다 깨다를 반복하며 서너 시간을 달려 모알보알에 도착했다.
휴~이제 아이의 불안도가 낮아졌고 우리의 여행이 잘 시작됐다는 생각이 드니 긴장이 풀리고 안도감이 몰려왔다.
비행기도 타고, 자동차도 오래 타야 했는데 오늘 정말 잘했어!
힘든 내색 없이 긴 이동시간을 버텨낸 아이에게 폭풍 칭찬을 하고, 간단하게 저녁을 먹고 모두 일찍 잠이 들었다.
아침 7시가 되기도 전에 온 가족이 일어나 마을 산책을 나갔다.
늦잠 자고 조식당이 끝나기 전에 겨우 가서 먹거나 조식을 못 먹는 날도 많았던 우리 가족인데 아침산책이라니?! 이게 무슨 일인가?! 이번 여행 느낌이 정말 좋았다!
매일 아침, 점심, 저녁 산책하는 골목길과 바다
거짓말처럼 컨디션이 좋아진 아이랑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보며 마을의 골목을 산책하다 보니 “꼬북이?!” 하며 호객하는 분들이 다가왔다. 수영을 잘하지 못하는 나와 아이를 케어해 줄 수 있는 분이 있으면 안전할 것 같아서 아침을 먹고 만나기로 약속했다.
허리 높이의 바다인데 정말 거북이들이 마실 오듯 놀러 왔다.
최대한 접촉을 피하면서 거북이랑 수영을 하다가 용기를 내 조금 더 멀리 나아갔다.
조금 더 들어가니 갑자기 절벽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바다 절벽 사이를 은빛 정어리떼가 줄지어 다니고 있었다. 배를 타고 깊은 바다로 나아간 것도 아닌데 이렇게 황홀한 바닷속 풍경을 볼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수영을 좋아하는 아이가 계속 깊은 바다로 가고 싶어 해서 아빠와 가이드에게 부탁하고 물을 무서워하는 나는 밖으로 나왔다.
모알보알 거북이와 수영하기
은빛 물결을 만드는 정어리떼
하루전날까지 흐느끼며 잠들던 아이인데 세상 무해한 표정으로 바다수영을 하고 있다니
“너 여행 가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야?!”
무엇이 이토록 어린아이 마음을 힘들게 하는 걸까? 자기의 마음을 표현할 수 없는 아이가 너무 안쓰럽다.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이나 동영상을 찾아보는 걸 좋아하는 걸 보면 아이도 여행을 떠나면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 같다.
최대한 일상처럼 경험하려고 떠나는 여행이라 이동도 자주 하고 고급 숙소에 머무는 것도 아니다. 멋진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는 것도 아니고 저녁에는 평소처럼 조금씩이라도 매일 일정 분량의 학습도 해야 하는데 얼굴에 미소가 떠나질 않는다.
"그렇게 계속 웃다가 잇몸 안 마르니??"
그래, 실컷 먹고 많이 웃자. 그거면 되지
어쩌면 일상에서 벗어나는 게 행복이 아니라, 더 진하게 일상을 공유하고 부대끼며 경험하는 게 너에게는 더 즐거운 일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