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무덤덤함이 주는 막연한 두려움
꽤 오래전, 읽었던 글도 아닌 한 문장이 아직도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다.
방송으로 유명한 사람의 에세이에 나온 글이었다.
"가족은 가족에게 폭력적이다"라는.
그 말이 내내 마음에 걸려 한동안 알 수 없는 먹먹함을 견디며 지냈다.
그리고 익숙해지려는 찰나, 다시금 그 원인모를 혹은 외면하고 싶은 먹먹함이 찾아왔다.
부모가 늙는다는 건 참 무섭다.
내 부모님이 늙을 수 있다는 걸 깨달았던 때는 고등학교 때였다.
처음으로 집을 나와 기숙사 생활을 하고 집에 갔던 날. 오랜만에 만난 엄마의 얼굴은 왜 그리 주름졌는지, 아빠의 머리는 히끗해졌는지. 가득 차던 집이 이제는 두 사람의 공간이 되어 반찬도, 옷 가지도 모두가 단촐해져버린 그 모습에 속이 상해 맘에 없는 화를 벌컥 냈던 기억이 있다.
아마, 이때부터 부모가 늙어간다는 것에 두려웠던 것 같다.
고등학교를 시작으로 대학에 그리고 지금까지, 이제는 집에 가는 손님이 되어버린 나에게 부모님의 나이 듦은 더 절실하게 와 닿는다. 새삼 작아진 아빠의 키가, 돋보기안경이 필요해진 엄마의 눈이. 그렇게 내가 없는 공간에서 나이 들어 버렸다.
대학의 어느 방학 때, 집에 오래 있었던 시간이 있었다. 그래 봐야 고작 1-2주일이었지만.
그때, 아빠가 좋아하는 닭을 사러 갔었다. 그냥 친구들과 만나서 맥주에 먹는 그런 닭을.
닭을 주문하고 아빠를 기다리는 동안 계산을 묻는 주인의 말에 문득 울컥했다. 말 그대로 나는 쉽게 먹는 이 닭을 아빠랑 먹을 날이 얼마나 될까 싶은 막연한 두려움.
나는 앞으로 아빠한테 얼마나 많은 닭을 사줄 수 있을까 하는 속상함.
순간의 충동에 카드를 내밀어 계산을 하고 아빠를 기다렸다. 계산했다는 나의 대답에 아빠는 왜 그랬냐는 내심 기분 좋은 질책을 하며 집으로 향했다.
아빠의 물음에 대답할 수 없었다.
차마, 당신이 늙어가는 일이 속상해서, 앞으로 남아있는 시간이 무한하지 않음을 깨달아서라고 답할 수 없어서. 직장에 가지 않고 공부하는 나에게 아빠가 좋아하는 많은 것들을 해 줄 수 없지만, 고작 닭 한 마리 조차 사줄 수 없는 건 아니기에. 그렇게 스스로 속으로 대답했다.
그 뒤로도 부모가 늙어가는 일은 예기치 못하게 가끔씩 나를 뒤덮었다. 그때마다 점점 짧아져가는 시간이 두려워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가만히 있기를 잠시, 다시 또 가족 앞에서는 이런저런 화를 내기도 한다.
늙어가는 부모님의 잔소리가 줄어들어 갈 때마다 아니, 그 잔소리에 오히려 큰 소리 낼 때마다 뒤돌아서 나의 폭력에 후회한다. 남은 시간 얼마나 나는 잘할 수 있을까.
이제는 잔소리보다는 애원하는 듯한 부모의 걱정 앞에서 다시금 마음 한켠이 먹먹해진다.
부모가 자식이 크는 걸 바라보는 일이 기쁨과 슬픔 온갖 감정을 느끼게 한다지만, 자식이 크며 작아지는 부모를 보는 일은 한없이 속상하고 먹먹하기만 하다.
누군가는 기약 없는 먼 훗날을 바라보지만, 누군가는 얼마 남지 않은 가늠할 수 없지만 짧을 시간을 기다린다.
그 시간이 하루 더 지났다.
다시 한번, 스스로 그 먹먹함 앞에서 가족은 가족에게 폭력적임을 되새긴다. 머리에 새기고 마음에 새겨 조금은 이 폭력이 멈추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