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에서 살아남는 것이란
영화 시카리오를 관람하고 왔습니다. 예고편으로 살짝 맛봤을 때는 여주인공인 에밀리 블런트가 테러리스트들을 진압하는 역경을 그리는 영화인 줄 알았습니다만.. 역시나 베네치오 델 토로를 에밀리 블런트에게 진압당하는 헐렁한 악당 정도로 그리기에는 아깝지요. 오히려 예상치도 못하게, 베네치오 델 토로가 그려내는 '날 것 그대로의 폭력'에 어안이 벙벙해진 채로 상영관을 떠나야 했습니다. 잠자코 계속 앉아있다가는, 그가 스크린 밖으로 나와서 '자 이제 별점 5개에 서명해' 라면서 저를 고문할 것 같았거든요.
시카리오 얘기를 서두에 꺼낸 이유는, 이제 막 회사를 다니기 시작하는 사회 초년생들이 이 영화를 꼭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상주의자인 에밀리 블런트의 이상이 베네치오 델 토로의 이유가 있는 순수한 폭력에 산산이 부서지는 스토리입니다만, 저는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를 극단적으로 묘사하면 이런 모습이 나온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지구 어딘가에서는 크거나 작거나 실제로 비슷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지요.
회사에 입사하고 나서 1년 만에 퇴사하겠다며 부모님께 눈물의 고백을 했을 때는, 저는 마치 전쟁터에 내몰리고 황폐한 사막에 버려진 느낌이었습니다. 그곳엔 합리성을 잃은 폭력이 여러 가지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고, 저의 이성을 받아들여줄 사람 따윈 없었거든요. 시카리오의 암살자 아저씨들처럼 이미 단만 쓴맛 다 본 능숙한 선배들이 창백한 표정으로 모니터를 응시하는 사무실에서는, 그 표정만큼이나 살벌한 단어들이 총탄처럼 오고 가곤 했습니다.
저는 아직 그런 총탄을 후배들에게 그 암살자들처럼 마구잡이로 날리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가진 나름의 이성의 끈이지요. 끝까지 협조를 못하겠다며 발버둥 치던 에밀리 블런트의 모습에서, 거대한 폭력의 웅덩이에서 헤엄치는 제 모습을 봤어요.
그러나 이런 저도 가끔은 5년이라는 세월의 때를 미처 스스로 필터링하지 못한 채, 허둥대는 후배의 숙인 고개를 향해 고함을 칠 때가 종종 있습니다. 끝내 베네치오 델 토로를 심판하지 못하고, 총구를 거둬야 했던 에밀리 블런트 또한 그렇죠. 그렇게 극단적으로 밀어붙인다면 어떤 사람이 어둠 대신 빛을 선택하겠습니까? 선택한다 한들 그것이 살아남는 것보다 가치가 있을까요.
영화가 후아레즈를 묘사하는 방식은 그런 면에서 매우 재미있습니다. 에밀리 브런트가 첫 공동 임무에서 검은 쉐보레를 타고 후아레즈로 진입할 때, 카메라는 마치 사파리를 구경하는 사람의 시선으로 후아레즈를 바라보지요. 마치 사자들이 사는, 매일 누군가가 잡아먹고 먹히는 동물의 세계를 바라보는 듯이요. 우리는 늘 우리가 사는 세계의 렌즈로, 우리의 본질을 부정할 뿐이라는 듯 비정한 시선입니다.
'당신이 심연을 들여다볼 때, 그 심연도 당신을 바라보고 있다' 는 니체의 말을 곱씹어 봅니다. 그 말대로 우리가 폭력성을 마주하고 부정할 때, 이미 폭력성은 우리 내면에 발걸음을 들이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어쩌면 '그렇고 그러한' 사회에 산다는 것은, 이미 우리가 '그렇고 그런' 인간일 뿐이란 뜻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 세계에서 우리가 단 하루라도 살아나갈 수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