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펙트 큐(PerfectCue): 보이지 않는 신호들
'맛'으로 증명하겠다 다짐한 태웅. 하지만 '차현서의 저주'는 시작됐다. 난생처음 '손님'의 눈으로 바라본 가게의 얼굴. 그곳엔 60년의 '역사'가 아닌, '관리를 포기한' 깨진 유리창만 남아 있었다.
차현서가 떠난 다음 날 새벽.
이태웅은 평소보다 한 시간 이른 새벽 3시에 주방에 섰다. 어제저녁, 그는 홀로 남아 가게의 모든 테이블을 평소보다 두 배 더 세게 닦았다. 분노 때문이었다.
'데이터? 증거? 4.5초 만에 이탈?'
그는 차현서가 던지고 간 '진단서'를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맛'도 모르는 애송이의 궤변이라고 치부했다.
"맛... 맛으로 증명하면 그만이야."
그는 육수 솥에 평소보다 더 좋은 약재를 넣었다. 불 조절에 모든 신경을 곤두세웠다. 육수는 그 어느 때보다 완벽했다. 이 '진실'의 맛만 있다면, '7가지 증거' 따위의 헛소리는 사라질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오전 11시, 오픈 시간이 되자 그의 시선은 자신도 모르게 주방 밖을 향했다.
그는 어제 차현서가 했던 말을 잊으려 할수록, 그녀가 보여준 CCTV 영상 속 '4.5초'가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점심시간.
손님이 한두 팀, 뜸하게 들어왔다. 모두 수십 년을 다닌 단골들이었다. 그들은 태웅의 완벽해진 육수 맛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저 "어, 맛이 똑같네. 좋아"라고 말할 뿐이었다. 신규 고객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텅 빈 홀의 정적.
어제까지는 그저 '불경기' 탓이라 여겼던 그 정적이, 오늘따라 차현서의 진단서에 담긴 '증거'처럼 느껴졌다.
'사회적 증거: 최악 (-100점)'
그는 자신도 모르게 쓰레기통을 뒤져, 구겨진 진단서를 다시 끄집어냈다.
[1. 물리적 증거: 심각 (-85점)]
파사드(간판) 조명 파손 및 야간 조도 미달.
출입문 유리창 '금(Crack)' 방치.
[6. 시간적 증거: 정지 (-50점)]
4년 전 신문 기사 스크랩 부착.
먼지 쌓인 '여름 특선' 포스터 방치. '현재성' 부재.
"..."
이태웅은 주방을 나와 홀에 섰다. 그리고 처음으로 '손님'의 시선으로 가게 문 쪽을 바라봤다.
어젯밤, 그 커플이 4.5초간 머물렀던 바로 그 자리.
그의 눈에 '금'이 들어왔다.
아버지가 가게를 물려주시기 전부터 있었던, 문 하단의 희미한 금. 늘 '송정옥'의 일부였기에, 한 번도 '문제'라고 생각해 본 적 없던 그것.
그는 홀린 듯 밖으로 나갔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길 건너편에 서서 자신의 가게 '송정옥'을 정면으로 바라봤다.
"...아."
낮에 보는 가게는 그저 '오래된' 식당이었다. 하지만 해가 기울기 시작하고, 타이머에 맞춰 간판 불이 켜지는 순간, 그는 깨달았다.
'송정옥'의 '정(情)' 자 네온사인.
미세하게 깜박거리고 있었다.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그가 기억하는 한, 몇 년은 족히 되었을 것이다. '정'이 깜박거릴 때마다 '송옥'이라는, 정체불명의 가게가 되었다. 그는 왜 이걸 한 번도 인지하지 못했을까.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출입문 옆, 그가 자랑스럽게 붙여놓은 '여름 특선 - 냉콩국수 개시' 포스터.
11월의 찬바람에 가장자리가 너덜너워져 있었다. 햇빛에 바래, 콩국수 사진은 이미 누런 종잇장으로 변해 있었다.
그 옆에는 할아버지가 신문에 나왔던 4년 전 기사 스크랩이 코팅된 채 붙어 있었다. '60년 전통의 맛을 지키다'라는 헤드라인. 하지만 누렇게 변색된 코팅지는 '역사'가 아니라 '박제된 과거'처럼 보였다.
차현서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시간적 증거: 정지. '현재성' 부재.'
'물리적 증거: 파손 방치.'
그는 '맛'을 지키기 위해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났지만, 정작 가게의 '얼굴'은 몇 년째 방치하고 있었다.
"관리를 포기했습니다."
차현서의 말이 아니었다.
깜박거리는 간판과 너덜너덜한 포스터가, 이태웅의 귀에 대고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그는 '맛'이라는 성역 안에 스스로를 가두고, 성문 밖이 폐허가 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완벽한 육수.
그 완벽한 맛은, 이 '깨진 유리창' 너머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단단했던 '신념'에, 어제 본 유리창의 '금'보다 더 선명한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5화에서 계속......
'깨진 유리창 이론'은 비유가 아니다.
고객은 파사드를 '읽는다'. 깨진 간판(물리적 부정 증거)은 '우리는 이 정도 사소한 것도 관리하지 않는다'는 경영자의 태만을 '고백'하는 선언이다.
빛바랜 여름 메뉴 포스터(시간적 부정 증거)는 더 치명적이다. '우리는 현재에 관심이 없으며, 과거에 멈춰있다'는 증거가 된다.
고객은 '박물관'에서 식사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살아있는' 공간에서 '신선한' 음식을 원한다.
당신의 가게는 '역사(History)'를 말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저 '과거(Past)'에 갇혀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