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6화. "맛은... 보지 않겠습니다."

퍼펙트 큐(Perfect Cue): 보이지 않는 신호들

by 잇쭌



태웅이 마지막 자존심을 걸고 내민 '완벽한 육수'. 그러나 차현서는 맛보기를 거부한다. "사장님의 '맛'은, 지금 이 가게에선 '존재하지 않는 가치'입니다." 60년 신념이 모욕당하는 순간, 첫 번째 처방이 시작된다.



다음 날 오전 10시.


이태웅은 밤새 한숨도 자지 못했다. 육수 솥을 지키면서도, 머릿속은 온통 차현서가 던진 '7가지 증거'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난생처음으로 주방이 아닌 홀에서 밤을 샜다. 그리고 깨달았다. 새벽 1시의 텅 빈 홀이, 밖에서 볼 때 얼마나 스산하고 '망한 가게'처럼 보이는지.


'딸랑-'


정확히 약속 시각에 맞춰 차현서가 들어섰다. 어제와 똑같은 무채색 재킷, 감정 없는 표정이었다.


이태웅은 이미 카운터에 자신이 있었다. 박 지점장은 없었다. 그가 부르지 않았다. 이것은 이제 은행이 아닌, 자신과 저 여자 사이의 문제였다.


"..."


"..."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태웅이 먼저 입을 열었다.


"차... 컨설턴트님. 일단, 가게의 '본질'부터..."


그는 주방으로 들어가, 가장 아끼는 유기 그릇에 갓 끓여낸 육수를 한 그릇 떠 왔다. 뽀얗고 진한, 한 점의 누린내도 허용하지 않은 '송정옥' 60년의 결정체. 그의 '맛'이자 '신념' 그 자체였다.


"맛부터 보시죠. 이게 우리 가게의 전부..."


"안 먹겠습니다."


차현서의 대답은 칼 같았다.


그녀는 태웅이 내민 숟가락과 그릇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태웅의 얼굴이 굳었다. "네? 아니... 맛을 알아야 컨설팅을..."


"사장님."


현서가 태블릿을 켰다. 어젯밤 커플의 4.5초짜리 이탈 영상이었다.


"어제 48팀이 이탈했습니다. 그들 중 단 한 명이라도 사장님의 이 '훌륭한 육수'를 맛본 사람이 있습니까?"


"..."


"없습니다. 사장님의 '맛'은 훌륭하겠지만, 지금 이 가게에선 '존재하지 않는 가치'입니다. 꽁꽁 잠긴 금고 안의 다이아몬드죠. 고객은 금고가 낡고 녹슬었다는 '증거'만 보고 돌아섭니다. 제 일은 그 '맛'을 평가하는 게 아닙니다."


차현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태웅의 손에 들린 구겨진 진단서를 빼앗듯 가져갔다.


"제 일은, 고객이 최소한 그 '금고'를 열고 싶게 만드는 겁니다."


그것은 이태웅의 '요리사'로서의 자존심이 완벽하게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그는 요리의 '맛'을 평가받을 준비는 되어 있었지만, '맛' 자체가 평가의 대상조차 되지 못한다는 사실에 참담함을 느꼈다.


"그럼... 뭐부터 합니까?" 태웅이 겨우 목소리를 냈다.


"수술 전에 피부터 멈춰야죠. '트리아지(Triage, 응급환자 분류)'입니다."


현서는 1부에서 논의했던 '제거(Eliminate)' 전략을 꺼냈다.


"우리는 지금부터 '부정적 증거'를 '제거'합니다. 돈 쓰는 거 아닙니다. '버리는' 겁니다."


현서는 성큼성큼 걸어가, 벽에 붙어있던 누런 '여름 특선 콩국수' 포스터를 '우두둑' 소리 나게 뜯어냈다. (시간적 부정 증거 제거)


"자, 이것부터죠."


"아니! 차 컨설턴트!"


주방에서 김치를 담그던 박 여사가 기겁을 하며 뛰쳐나왔다.


"그거 사장님 아버님이 직접..."


"박 여사님."


현서의 목소리는 얼음장 같았다.


"이 포스터는 '역사'가 아닙니다. '방치'입니다. 11월에 콩국수 포스터를 붙여놓는 건, '우리는 현재에 관심 없는, 시간이 멈춘 가게'라는 '부정적 시간 증거'입니다. 고객에게 '오래된' 음식을 팔겠다는 신호라고요."


그녀는 멈추지 않고, 태웅이 어제 그렇게 쳐다봤던 '출입문 유리창'을 가리켰다.


"저 '금(Crack)'은요?"


(물리적 부정 증거)


태웅이 망설였다. "그건... 아버지가..."


"사장님."


현서가 태웅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아버님의 '추억'을 지키시겠습니까, 아니면 할아버님의 '가게'를 지키시겠습니까?"


"..."


"추억은 가게가 살아남은 뒤에 해도 늦지 않습니다. 지금 당장 유리 업체 부르세요. 그리고 박 여사님."


현서는 카운터 위에 지저분하게 쌓여있던 A4용지 메뉴판과 수정테이프로 얼룩진 코팅지들을 가리켰다. (정보적 부정 증거)


"이것들, 전부 갖다 버리세요."


"아니, 그걸 버리면 손님들 메뉴는 뭘로..."


"제가 오늘 밤까지 새로 만들어 올 겁니다. '전문가'처럼 보이는 걸로. 일단, 버리세요."


이태웅은 눈을 감았다. '맛'만 알던 그의 세계가, '버리는 것'에서부터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그는 눈을 뜨고 박 여사에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합시다, 박 여사님."


태웅이 직접 누렇게 변색된 4년 전 신문 기사 스크랩에 손을 댔다.


"차 컨설턴트 말대로... 다 버리죠, 일단."


'치이익-'


벽지 한 겹이 뜯겨 나가는 소리가, 낡은 '송정옥'의 홀에 아프게 울려 퍼졌다.






7화에서 계속......




[차현서의 컨설팅 노트] #6


컨설팅의 첫걸음은 '맛'을 보는 것이 아니다.


고객이 '맛'을 볼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원인'을 찾는 것이다.


'맛'은 마지막에 검증해도 늦지 않는다.


가장 시급한 처방은 'Triage(트리아지)'다.


'긍정적 증거'를 더하기 전에, '부정적 증거'부터 '제거'해야 한다.


피를 흘리는 환자에게 '보약'을 먹일 수는 없다.


'역사'와 '방치'는 다르다.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방치된 '깨진 유리창'들이


오늘의 고객을 쫓아내고 있다.


'버리는 것'이야말로 리뉴얼의 진정한 시작이다.

keyword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
이전 05화5화. "아무도 오지 않는다는 증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