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펙트 큐(Perfect Cue): 보이지 않는 신호들
'물리적' 쓰레기를 치운 현서의 다음 타깃은 '심리적' 쓰레기다. "메뉴판은 '선언문'입니다." '돈까스'와 '제육'을 메뉴판에서 삭제하는 순간, '송정옥'은 '분식집'에서 '전문점'으로 다시 태어난다.
"사장님, 이거... 정말 괜찮은 거유?"
박 여사는 이른 아침, 반짝거릴 정도로 닦인 홀을 보며 불안한 듯 물었다. 벽은 휑하고, 테이블은 깨끗했지만 휑했다. 60년의 세월이 묻어난 기름때와 함께, 가게의 '정'마저 닦여나간 기분이었다.
이태웅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어제 차현서가 휘몰아치고 간 자리는, 마치 태풍이 휩쓴 듯했다. '버리는 것'이 '제거'의 전부라면, 이건 성공이 아니라 실패처럼 보였다.
"차라리 벽에 달력이라도 다시 걸까유? 너무 없어 보이는데..."
"아뇨."
이태웅이 고개를 저었다. "일단... 둡시다. 그 사람이... 오늘 다시 온다고 했으니까요."
그는 '컨설턴트'라는 직함 대신 '그 사람'이라고 불렀다. 아직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영역이었다.
'딸랑-'
10시 정각, 차현서가 어김없이 나타났다. 오늘은 더플백 대신, 깔끔한 브리프케이스 하나만 들고 있었다. 그녀는 휑해진 벽과 반짝이는 테이블을 쓱 훑어보더니,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1단계 트리아지(Triage)는 끝났군요. '물리적 부정 증거' 제거. 악취와 끈적임은 잡혔습니다."
그녀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만족'과 비슷한 감정이 스쳤다.
"이제 2단계입니다."
그녀가 브리프케이스에서 얇은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어제 버렸던, 너덜너덜한 A4용지 메뉴판이 아니었다. 심플한 크라프트지에 단정한 명조체로 인쇄된, 마치 고급 한정식집의 그것 같은 메뉴판 '시안'이었다.
"이게... 뭡니까?"
"사장님의 새 '명함'입니다."
현서가 시안을 테이블 중앙에 놓았다.
"어제 우리는 '눈에 보이는' 쓰레기를 버렸죠. 오늘은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쓰레기를 버릴 겁니다."
그녀가 구겨진 진단서의 다른 항목을 가리켰다.
[3. 심리적 증거: 위험 (-60점)]
'국밥 전문점' vs '돈까스/제육' 메뉴 혼재. '전문성' 신뢰도 저하.
[5. 정보적 증거: 조잡 (-75점)]오탈자 및 수정테이프로 얼룩진 A4용지 메뉴판.
"사장님." 현서가 태웅을 바라봤다. "어제 48팀이 이탈했습니다. 그중 10팀은 돈까스와 제육이 안 된다는 말에 나갔죠."
"거 봐요! 그 메뉴들이 있어야..."
"그 10팀은 애초에 사장님의 '고객'이 아닙니다."
현서의 목소리가 단호했다.
"그들은 '국밥 전문점'에 '분식집' 메뉴를 기대하고 온, '잘못된 타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끌어들인 건, 사장님의 조잡한 메뉴판(정보적 부정 증거)입니다."
"그게 왜..."
"메뉴판은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요리 리스트'가 아닙니다. 메뉴판은 **'고객이 반드시 먹어야 할 단 하나의 이유'**를 제시하는 '선언문'입니다."
그녀가 제시한 새 메뉴 시안은 처참할 정도로 단순했다.
[송정옥(松亭屋)]
송정 곰탕
송정 곰탕 (특)
한우 수육
주류 및 음료
"이게... 다입니까?"
이태웅의 목소리가 떨렸다. 돈까스, 제육볶음, 심지어 해장국까지, 아버지 대부터 내려오던 '곁다리' 메뉴들이 전부 사라져 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고객은 '전문가'에게 돈을 씁니다. '한식+중식+일식+분식'이 다 되는 백화점식 메뉴는, '우리는 아무것도 제대로 못 하는 아마추어'라는 최악의 '심리적 부정 증거'입니다. 고객에게 '선택의 과부하'를 주는 건, '불신'을 파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박 여사! 학생들이 제육을 얼마나 찾는데!"
태웅이 다급하게 박 여사를 찾았다.
"맞아유! 젊은 양반. 국밥집에서 수육만 팔면... 젊은 애들은 무거워서 안 시켜유. 제육이라도 있어야..."
"그럼, 제육 전문점을 하셨어야죠."
현서가 두 사람의 말을 잘랐다.
"사장님은 '곰탕'의 전문가입니까, '제육'의 전문가입니까?"
"..."
"사장님은 '곰탕'에 인생을 걸었습니다. 그렇다면 메뉴판은 '우리 집은 곰탕 말고는 팔 필요가 없다'는 '자신감'을 보여줘야 합니다. 그게 '전문성'에 대한 가장 강력한 '심리적 증거'입니다."
그녀는 어제 뜯어낸 포스터 자리를 가리켰다.
"저 휑한 벽을 조잡한 메뉴판 대신, '60년 전통의 곰탕 철학'이라는 스토리보드로 채울 겁니다. 고객은 '돈까스'가 없어서 실망하는 게 아니라, '곰탕'에 대한 '진정성'을 보고 감동할 겁니다."
"오늘부로, 돈까스와 제육볶음에 쓰던 식자재 발주... 끊으세요."
그것은 태웅의 '맛'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은 아니었지만, 그의 '경영' 방식에 대한 사형 선고였다.
이태웅은 어제 닦아낸, 끈적임 하나 없는 테이블을 바라봤다. '청소'는 시작에 불과했다. '버리는 것'은 이제 '물건'이 아니라, 아버지 대부터 내려온 '안일한 습관' 그 자체였다.
그는 현서가 내민 심플한 메뉴판 시안을 집어 들었다. 가벼운 종이 한 장이었지만, 60년 가게의 무게보다 더 무겁게 느껴졌다.
9화에서 계속......
메뉴판은 '당신이 할 수 있는 요리 리스트'가 아니다.
그것은 '고객이 반드시 먹어야 할 단 하나의 이유'를 제시하는 '선언문'이다.
'선택의 과부하'를 주는 '백화점식 메뉴(정보적/심리적 부정 증거)'는
"우리는 아마추어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과 같다.
고객은 '모든 것'을 원하지 않는다. '최고의 하나'를 원한다.
'선택과 집중'은 단순히 효율적인 경영 전략이 아니다.
그것은 고객에게 '전문성'을 증명하는 가장 강력한 '심리적 긍정 증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