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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발에 대처하는 열 살의 자세

by 이세이

승우는 느릿느릿 말한다.

“어어, 선생니임, 어어- 저느은- 어어-, 어제에-”로 시작하는 그 애 말은 따라서 온 신경을 집중해야 그 전말을 알 수 있다.


난 요약하자면 별 것도 아닌 그 애의 하루를 충실히 듣는다. 어절 사이마다 놓인 두 뼘 어치의 스페이스바를 견디는 건 쉽지 않다. 나는 두 음절을 동시에 듣고 세 음절을 동시에 말하는 부산 토박이기 때문이다.


답답함에 숨이 꼴딱, 꼴딱, 꼴따락 넘어갈 때쯤이 되면 승우의 말도 끝이 난다. 내 역할은 그 애가 “저어- 그래서어- 잠을 두 시간밖에 못 잤다요?”하고 왠지 의기양양하게 말을 끝마치는 순간을 포착하여 “헤엑-! 잠을 두 시간밖에 못 자면 피곤해서 어떡해?”하고 호응하는 것이다. 그럼 그 애는 “저는 늘 그래서 괜찮아요.” 하고 난세의 영웅처럼 의연히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선다. 매일 두 시간밖에 못 자다니, 열 살의 허세는 이렇게나 통이 크다.


승우는 느릿느릿 말하고, 앞니는 아직 하나가 덜 났다.


울지도 않고 이를 빼던 순간의 영웅담도, 웃을 때마다 훤히 드러나는 새까만 빈 틈도 모두 그 애가 부지런히 자라고 있다는 증거다. 이건 비밀인데, 승우의 다음 말을 기다리느라 숨이 꼴딱, 꼴따락 넘어가려는 순간에 나는 그 애의 앞니를 쳐다본다. 윗입술이 달싹거릴 때마다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그 틈은 가끔 혹부리영감의 노래주머니보다도 통 큰 이야기주머니 같다. 와, 진짜, 어쩜 이렇게 끝도 없이 얘기할까.


승우는 느릿느릿 말하고, 앞니는 아직 하나가 덜 났고, 내 눈을 보고 인사한다.


“아침엔 조용히 교실에 들어와서 각자 할 일을 해요. 인사는 1교시가 시작되면 다 같이 할 테니 교실 들어올 때 하지 않아도 됩니다.”


승우는 그래도 꼭 교실에 들어오면 내 앞에 선다. 잔뜩 매달린 키링끼리 찰랑찰랑 부딪치는 소리가 나다가 내 옆에서 뚝, 멈추면 승우다. 딱 그 순간에 고개를 들면 승우는 내 눈을 보면서 꾸벅 묵례를 한다. 그 애는 하루도 인사를 거른 적이 없다. 말하자면, 하루도 나와 정답게 눈을 맞추지 않은 날이 없다.


승우가 느릿느릿 말하고, 앞니 하나가 아직 덜 났고, 나와 눈을 맞춰 인사하는 건 그러나 열 살짜리 친구들에게 별일이 아니다.


친구들에겐 승우의 출석번호가 4번인 게 별일이다.


무작위 뽑기로 국어책을 읽던 날, “4번! 4번이네. 승우가 읽어볼까?” 하는 내 말이 화근이었다.

“4번. 죽을 사! 죽을 사!”

하랑이는 허락도 없이 내 말꼬리 위에 올라탔다.


그 순간에 눈빛이 덜컹거린 건 승우가 아니라 나였다. 4라는 숫자가 불길하다는 이유로 출석번호를 바꿔 달라는 요란이 권리가 된 세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승우는 하랑이를 잠깐 돌아보고선 아무 대꾸 없이 책을 높게 들고 읽을 준비를 했다.

“하랑아.”

나는 목소리를 깊게 눌러 하랑이 이름을 불렀다. 하지 말라는 경고였다. 하랑이는 입을 꾹 다물었고, 승우는 느릿느릿 큰 목소리로 발표를 마쳤다.

기어이 하루에 할당된 사리를 다 쌓은 후에야 하교시간이 됐다. 부처의 삶에 한 걸음 더 다가갔으나 왠지 더 공허해진 눈으로 아이들이 가방을 싸는 걸 기다리고 있는데 넷째 줄 세 번째 자리에서 경보음이 울렸다.


“4번. 죽을 사! 죽을 사!”


교사 수련이 덜 된 나는 아이의 잘못은 인내하나 잘못의 반복에는 쉽게 눈이 뒤집힌다.


“서하랑!”

다시금 이를 악물고 그 애의 이름을 불렀다. 모르긴 몰라도 검은자위 보다 흰자위가 더 넓었을 거다.


승우는 또다시 자신에게 죽음의 기운을 덮어씌우는 하랑이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이쯤 되니 설사 승우가 독한 말로 되받아치더라도 세 마디쯤은 모른 척해 줄 용의까지 생겼다.


그러나 승우는 아무렇지 않게 느릿느릿 말했다.


“그렇지만- 네잎클로버는- 잎이 네 갠데에- 행운이잖아?”


그리고 그 애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한 마디를 더 덧붙였다.

“‘사랑’할 때에도- ‘사’가 들어가.”


승우는 누군가에겐 꺼림칙할지도 모를 수를 곧장 사랑과 행운의 상징으로 바꾸었다.

4는 어쩔 수 없이 불길한 수이고, 그러니 하랑이의 말은 모욕이며, 따라서 맞공격을 해도 무죄라던 내 무의식도 와르르 무너졌다.


교실 전체에 침묵이 감돌더니, 서호도 조심스럽게 말을 보탰다.


“오! 맞아. ‘인사’에도 ‘사’가 들어가네.”

“와~ 4는 좋은 번호네!”

아이들은 갑자기 ‘사’가 들어간 온갖 예쁜 말로 승우를 장식했다.


난 그 소란을 내버려 두었다. 내가 굳이 지루한 잔소리를 덧붙이지 않았음에도 하랑이는 입을 꾹 다물고 머쓱하게 칠판 쪽을 쳐다봤다.


그리고 그 애는 그 재미없는 친구 놀리기를 포기했다.

감히 사랑을 이길 건 없으니까.


승우는

느릿느릿 말하고,

앞니 하나가 아직 덜 났고,

나와 눈을 맞춰 인사한다.

그리고 그 애는 누군가에겐 별일일 일을 아무렇지 않게 넘긴다.


별 게 다 별 거라 매일이 시끄러운 세상에

귀한 재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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