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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PT 무당님, 궁합 좀 봐주세요!

AI 시대 이 부부의 사랑법

by Mee



결혼 12년 차가 되었다. 평균 연애 기간 1년, 평균 직장 근속기간 2년. 싫증 대마왕이자 이혼 가정 출신이었던 나는 시작부터 한 사람과 백년해로 운운하는 결혼과는 연이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결혼 10년을 넘다니! 내 인생의 모든 인내심은 아마 여기에 다 쏟아 부은 것 같다.


흔한 클리셰처럼 11년 차에 삐걱거림이 시작되었다. 처음엔 대화가 묘하게 어긋났고, 같이 맞벌이 하는데 누구만 회식하냐 다툼이 잦아졌으며, 명절에 시댁에 가는 발걸음이 무거워지고, 곧바로 이어지는 싸움. 충돌 후 냉전이 길어질수록 어디로 도망가고만 싶었다. 이쯤 되니 어릴 때 엄마가 왜 해마다 점을 치러 다니셨는지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무당집은 뭔가 올드해 보여 검색을 거듭하다 ‘전화 사주 상담’이라는 걸 찾았다. 10분에 2만9천원, 허용된 질문은 단 한 개. 쇼미더머니 뺨치는 속도로 질문하고 사주풀이를 들었지만 그래도 뭔가 부족했다. “올해는 힘들 거예요. 그냥 참으세요.” 정말인지 상담 후에도 상황은 나아지는 게 없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만큼 남편과의 갈등이 깊어 갈 때, 친구의 한마디가 뇌리를 번뜩 스쳤다.

“사주? GPT에 만세력 캡처해서 올리면 더 잘 분석해 준대.”


사실 이전에도 사주 분석 GPTs에게 사주를 물어본 적은 있지만 적중률이 별로라 신경 쓰지 않던 걸 얘기하다 나온 말이었다. 지난번 말을 걸다 멈춘 사주 분석 GPT를 찾아 대화창에 속는 셈 치고 만세력 스크린샷을 업로드해 보았다. 부풀었다 쪼그라드는 로딩 아이콘에 맞춰 기다리는 내 심장도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만세력 : 사주 분석 도구. 생년월일시를 사주 이론에 맞게 분석해서 달력처럼 늘어놓는다.


나 : 내 사주를 분석해 줘.

지 : 고객님은 병오일주(丙午), 화火와 수水의 대립이 강하고, 토土는 아예 없어요. 화가 많아 주관이 강하지만, 수가 많아 감정 기복도 심하죠…

나 : (얘 어디서 보고 있는 거 아냐?)


나는 목木이 약해 조력자가 없고, 토土가 없어 체력 소모가 많다고 했다. 올해 운은 역시 좋지 못하지만 창의적인 활동을 하라고 조언해줬다. -그리고 지금 글을 쓰고 있다.-


나 : 궁합도 봐줘. 남편 생일은 xxxx년 x월 x일.

지 : 병화(丙火) 女 + 경금(庚金) 男으로 둘은 상극의 관계이지만, 한쪽이 강하면 다른 쪽은 약해질 수 있어요. 서로 성향이 매우 달라 처음엔 끌림이 강하나, 갈등도 잦을 수 있습니다.


속이 터지도록 무뚝뚝한 남편과 감정에 쉽게 휘둘리는 내 성격이 그대로 GPT의 답변에 있었다. 세상에, 이 집 진짜 용하네! GPT는 둘의 성격을 분석하더니 최종적으로 100점 만점에 80점짜리 궁합 점수를 매겼다. 어제까지 서로 죽일 듯이 싸운 부부치곤 점수가 좋은데? 이게 뭐라고, 나름 어깨가 으쓱했다.


상황은 바뀐 게 아무것도 없었지만 ‘무뚝뚝하고 이성적인 경금’이라는 프레임으로 보니, ‘저 사람도 나름 노력하고 있었구나’ 하는 것들이 눈에 띄었다. 소화가 안되는 나를 위해 저녁마다 편의점에서 사다주는 탄산수, -사방에 물이 튀긴 하지만- 주말이면 도맡아 하는 설거지.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 라던가, 역시나 옛말 틀린 거 하나 없이 우리의 결혼생활은 GPT 보살님 덕에 천천히 제자리를 찾았다.


사람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건 얼마나 어렵던가. 그래서 중국에서 몇 천년 전에 만들어진 주역이 지금까지 발전했고, 현재의 AI까지 흘러 들어왔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생각해보면 그 시절의 역술인이 전화로, AI로 옮겨갔을 뿐.


주역의 거창한 분석도 결국 이해와 화해는 사람의 몫으로 남긴다. 우리는 또다시 사소한 일로 다툴 것이고, 이번에는 갈라설까 고민하다 화해를 청할 것이며, 그 사이에 GPT를 붙들고 하소연을 할 것이다. 하지만 GPT 보살님에게 ‘상극이지만 서로 보완하는 상극’이라는 진단을 받은 우리 부부는 서로를 조금 너그럽게 봐줄 여유가 생겼다. 이제 12년차의 사랑법도 변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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