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판(濟阪)항로 100년] [제주인 일본 정착 史1]
‘제판(濟阪)항로’가 열린지 100년. 세상은 변했다. 아픔이 가시고 인식도 달라졌다고 하지만 그때는, 아직 흉터로 남았다.
메이지 유신 후 산업화와 일본식 자본주의 구축 과정에서 많은 수의 제주인들이 대한해협을 건넜다.
일제강점기였다. 억압과 수탈로 먹고살기 어려워진 상황에서 값싼 노동력이 필요했던 일본의 사정은 ‘기회’라는 이름으로 포장됐다. 바다로 열려있던 제주의 조건까지 맞아떨어지며 당시 제주 인구의 ‘4분의 1’이상(1934년 추산 재일제주인 5만명)이 일본행을 선택했다.
그 때 제주인들이 운명을 맡긴 배는 제주와 일본 오사카(大阪)를 잇기 위해 1923년 취항한 ‘군대환(君が代丸·기미가요마루)’, ‘제판(濟阪)연락선’이다.
단순히 그 관점만으로 바라본다면 ‘이주’라 쓰고 ‘아프다’ 외치면 될 일이지만 그러기에 제주 역사는 ‘기회’라는 열린 구조를 작동한다. 처음 세상이 만들어졌다는 신화에서부터 탐라국이 만들어지고 삼국시대와 고려‧조선을 거치면서 ‘섬 밖’을 향한 동경과 도전을 거둔 적이 없다.
제주의 대표적 창세신화 중 하나인 ‘천지왕본풀이’에서 하늘나라 천지왕은 해도 둘, 달도 둘이어서 고난을 겪고 있는 인간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상으로 내려와 총맹부인을 통해 대별과 소별 두 아들을 두고 간다. 아버지의 존재에 목말랐던 형제는 결국 ‘하늘까지 찾아간다’.
탐라국 시조인 삼을라가 화살을 쏘아 자신들의 땅을 정했지만 여기까지는 채집과 수렵에 의지한 삶이었다. 이후 바다 건너 벽랑국에서 온 세 공주가 씨앗과 가축을 가지고 오면서 농경과 목축문화로 전환이 이뤄진다. 탐라는 별을 보는 국가였다. 5~10세기에 걸쳐 백제·고구려·신라 등 한반도의 고대국가뿐만 아니라 중국 당나라·일본과 바다를 통해 교류했다.
이후의 역사는 조금 어둡다. 1105년 탐라 멸망 이래 고려와 조선이라는 큰 그림 속에 변방이라는 프레임에 갇힌다. 중앙집권 정치를 구사했던 조선에 이르러서는 유배와 고립이라는 족쇄가 바다를 향했던 제주인들의 시선을 꺾었다. 어떤 움직임도 그 이유를 묻지 않았고, 허용되지도 않았다. 섬을 지극히 야만의 시선으로 바라본 여러 자료와 1629년 출륙금지령 등 역사적 흔적들까지 머물고 굽히기를 강요받았던 제주인들에게 ‘개항’은 새로운 문물과 자본이 유입되는 통로이자 그동안 허락되지 않았던 기회를 향하는 숨통이었다.
제판항로의 의미는 거기에 있다. 1876년 개항 이후 섬 안으로 들어온 것들 중 많은 것들이 날을 세우고 공동체를 흔들었지만, 분명 섬에 변화를 줬다. 밖을 향했거나 나갔다 돌아온 것들도 분명 시대적 변화를 이끌었다.
당시와 관련한 많은 이슈들에 대해 ‘왜’를 묻는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누군가의 의견처럼 식민지 시대여서 가능했던 것들에 대한 것들을 물을 줄 알아야 한다.
‘식민지’라는 단어는 지극히 수동적이고 패배주의에 찌든 흙색이지만 그 안에서 살아난 것들은 뿌리가 깊고, 색이 푸르다. 생각해 보자. 일제강점기라는 암울한 현실에서 잠깐 헤맸던 적은 있지만 멈춰서지는 않았다. 조선을 허용하지 않았던 억압된 환경이었기 때문에 항일 운동은 더 필사적이었고 민족교육과 야학의 필요성이 커졌다. 각자가 가진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해 할 수 있는 것을 찾았던 절실함이 제주 섬을 떠나서도 살 수 있다는 용기가 됐고, 극한의 상황에서도 버틸 수 있었다.
제판항로가 열린 배경에는 이문(利文)이 깔려있다. 시절도 그랬거니와 큰 자본이 드는 일이 그저 순수했을 리는 만무하다. 오사카 경제법과대학 아시아연구소 연구원인 츠카사키 마사유키의 <오사카-제주도 항로의 경영과 제주도 민족자본–제우사(濟友社)‧제주도기선‧기업동맹>(제주4‧3연구소‧4‧3과 역사 Vol 10‧2010)의 내용을 보자. 츠카사키 연구원은 오사카-제주 항로 개설과 관련한 일본 신문 보도 내용을 토대로 당시 상황을 들여다 봤다. 특히 일본의 다른 지역과 달리 오사카에 제주 출신들이 많이 살게 된 배경에 대해 흔히 제기하는 ‘기미가요마루(君が代丸)’운항과 ‘동아통항조합(東亞通航組合)’ 외에 제판항로가 열렸던 배경에 의문을 제기했다.
제판항로 개설로 오사카에 제주 출신이 늘어났다고 하지만 수지가 맞지 않는 항로를 선행 투자 개설했다는 것이 맞는지, 오히려 제주도에서 오사카로 가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항로가 생긴 것은 아닌지에서 연구를 시작했다.
사실 제주 관련 자료를 보면 1915년 4월 제주-부산 항로가 개설되면서 부산을 경유해 일본(시모노세키‧下關)으로 건너가는 게 쉬워졌고, 이 즈음 청년 노동자들의 일본행이 러시를 이루기 시작했다. 1917년 5월 12일 자 ‘오사카시사신보(大板時事新報)’에는
“조선인 중에 야망을 이루려는 무뢰한이 있어 감시 매우 엄격”이라는 제목으로 ‘한일병합 후 조선인이 내지(內地)로 들어오는 자가 매우 많았고, 특히 오사카는 가장 많아서 500여 명에 달할 정도였는데, 전라남도‧경상남도 출신이 많은 가운데 제주도에서 건너오는 사람이 과반수를 차지하였다. 그 대부분은 고향에서 방탕에 젖어 성가진 존재라고 보인다. 게다가 오사카의 소굴이라고 볼 곳은 후쿠시마{福島), 난바(難波) 일대로 엿 팔기, 유리.방적 등의 노동에 종사하면서도 거처는 항상 일정하지 않고 전전하면서…’
라는 기사가 실렸다.
오사카에 조선인이 본격적으로 생활하기 시작한 것이 1909년으로 그해 말 42명(『大反府統計書』, 明治四拾貳年版, 26쪽)이 거주하고 있었다는 자료가 나온다. 한일합병 전 일본 내에서 조선 붐이 일었고 그 영향으로 조선 엿이 팔렸다는 기록도 등장한다. 이듬해인 1910년에는 그 숫자가 206명으로 늘었는데 이들이 모두 제주 출신인 것은 확인하기 어렵다고 했다. 다만 1923년 8월 10일자 ‘오사카마이니치신문(大板每日新聞)’의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여름, 오사카 축항 덴보잔(天保山)의 잠수부 청부업 우다집의 주인이 조선 제주도에 잠수부를 고용하러 간적이 있다…첫해 해사(海士)들의 지갑은 두둑해졌다. 그 맛을 알아서 다음해부터 여전히 조금 추운 6월초에 와서 10월까지 일해서 돌아간다’는 기사 내용을 보면 해녀와 관련한 사람들이 계절 노동자로 먼저 일본에 드나들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제주까지 와서 일할 사람을 구했다’는 내용만으로 당시 조직적인 이동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일본에 가면 돈을 벌 수 있다’는 가능성이 공유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물론 이 때만해도 본격적인 도항이란 말을 할 수 없었던 것이 당시 제주 출신들이 일을 하던 유리공장이나 방적공장의 고용 규모가 크지 않았고 밀집해 살았다는 증거가 불충분했다. 일단 ‘자주(自主)’도항에 무게를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