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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진 Aug 20. 2023

1995, 1996년

등장인물     

오유자         여자/20~40대

인재남         남자/20~40대

노광수         남자/20~40대

차세라         여자/20~40대

직장 상사      여자/30대

인터넷 강사

앵커/멘트

전화맨         남자

메시지맨      남자


무 대

무대는 세월의 변화를 담을 수 있도록 간소하게 설계한다. 연도로 구분된 장이 바뀔 때마다 이동이 쉬운 장치나 가구가 등장한다. 무대에 대형 모니터 등이 설치돼 필요한 화면을 보여줄 수 있다.     




1995년                    


무대 중앙 테이블 위에 컴퓨터와 모니터가 놓여 있다. LED 모니터와 날렵한 PC 본체가 아닌, 앞뒤로 볼록한 구형 모니터와 386 PC다. 컴퓨터 옆에는 전화기도 있다. 다이얼을 돌리는 방식의 아날로그 전화기다.

오유자(여/20대)가 등장해 테이블 옆에 선다. 


유자(일기 독백이하 ‘Na’)

1995년. 나도 이제 대학생이다! 고등학교를 탈출해서 대학교에 들어갔어요. 갓 스물이 된 내 머리 위로 자유가 쏟아지는 것 같았어요. 뭐든 내 멋대로 해도 될 것만 같았고 세상엔 즐겁고 신기한 게 너무 많았어요. 예를 들면, (컴퓨터를 가리키며) 컴퓨터 같은 거? 이거 컴퓨터 맞죠? 사실, 난 아직 컴퓨터를 못 해요.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고요? 괜찮아요. 지금은 1995년이잖아요!


차세라(여/20대)가 등장해 컴퓨터 키보드를 한 자 한 자 두드린다.


유자

세라야, 뭐 해?

세라

PC통신.

유자

(잘 모르겠다. 자신 없이) PC, 통신?

세라

유자 너, 설마 PC통신이 뭔지 몰라?

유자

(모르지만) 아, 알지.

세라

그래? 난 천리안 하는데. 넌 뭐 해?

유자

천리안? 아, 나는…….

세라

(안 하는구나. 피식) 됐고. 너, 삐삐는 있지? 삐삐번호 알려줘.

유자

삐삐? 있어. 있는데…….

세라

너, 설마 삐삐도 없어? 1995년에 20대인 애가, PC통신도 안 하면서, 삐삐도 없다고?

유자(Na)

(홱 돌아서며) 없어요. 젠장! 그런 게 뭐라고. 삐삐 같은 게 없어도 잘 살거든요? 하지만 난 유행의 최첨단을 달려야 할 X세대였어요! 남들이 가진 건 나도 가져야 했어요. 그게 뭐든지. 그래서 며칠 뒤, 그 삐삐란 걸 큰마음 먹고 샀어요.

 

유자, 주머니를 뒤지더니 삐삐를 꺼내 자랑하듯이 보여준다.     


유자(Na)

이게 바로 그 삐삐란 건데요. 이걸 어떻게 사용하냐면…….     


지징- 삐삐가 울린다.     


유자(Na)

봤죠? 혼자서 막 울려요! 아주 그냥 문명의 첨단 아니겠어요?     


유자, 전화기 쪽으로 다가가서는 수화기를 든다. 삐삐가 멈춘다.     


유자(Na)

삐삐에게 직접 말을 할 수는 없어요. 삐삐에 신호가 오면 번호가 뜨는데요. 그 번호로 전화를 하는 거랍니다. (삐삐를 보고) 어디 보자, 여기로 전화를 걸면? (전화 걸고 기다리는) 여보세요. 삐삐하신 분? (듣고, 김새는) 차세라 너냐? 됐어!


곧바로 전화 탁 끊고, 컴퓨터 앞에 앉는다.     


유자

하는 김에 PC통신도 해보지 뭐! 무슨 회사가 있다고? 하이텔? 천리안? 나우누리?     


유자, 키보드를 천천히 하나하나 집중해서 두드리다가, 속도 빨라지면,

화면에 푸른 바탕에 흰 글씨로 된, PC통신 메뉴 화면이 나타난다.     


유자

짜잔! BBS, 채팅, 뭐가 많네. (보다가) 17번 옆에, 저건 뭐지? (더듬더듬 읽는) 인.터.넷? 저 인터넷이란 단어가 유독 돋보이네?     


메뉴 화면 17번쯤에 ‘인터넷’이 있다. 깜빡깜빡하는데, 세라가 등장한다.     


유자

세라, 인터넷이 뭔지 알아?

세라

(화면 흘낏 보고는) 외국 사람들과 하는 PC통신이잖아.

유자

그럼, 펜팔 같은 거야? 너도 해봤어?

세라

(대답을 피하는 듯 삐삐 보며) 어머, 삐삐 왔네. (급히 나간다.)

유자

안 해봤어. 분명히 안 해봤어. 그러니까, 이건 내가 먼저 해봐야지. 인터넷은 내가 먼저다! (하다가) 그런데 인터넷이 뭐지?     


유자가 어리둥절 서 있으면, 허공에서 두꺼운 책이 한 권 내려온다.

유자가 책을 읽으면서 독백하는 동안 무대는 점점 어두워지고,     


유자

인터넷을 알려면 컴퓨터의 기본을 알아야 해. (펼쳐서 휙휙 넘기며) 아주 옛날에는 컴퓨터가 엄청 커서 방 하나를 채울 정도였다고? 그 뒤로 수십 년이 지난 다음에 386시리즈 컴퓨터가 나오는데, 얼마 전까지 운영체제는 도스(DOS)였구나. 검은 화면에 초록색 글자만 나오는, PC통신 화면처럼 생긴 거. 그다음에, 윈도우가 나왔네? 마이크로소프트 빌 게이츠의 그 윈도우. 그리고 리눅스란 것도 있는데, 이건 봐도 모르겠고. 스티브 잡스가 넥스트스텝이란 걸 만들었는데, 아, 됐다. 컴퓨터 공부는 여기서 끝! 그다음 인터넷으로 넘어가자. (넘기다가 놀란) 뭐야, 인터넷은 원래 미국 국방부에서 개발된 거라고? 국방부?


유자가 독백을 하는 동안 무대는 어두워지고, 스크린에는 초창기 컴퓨터의 거대한 모습과, 진공 카드를 찍는 20세기 초반 컴퓨터, 아르파넷의 설계도 등이 펼쳐진다.     


1996년                    


계속되는 어둠 속에서, 유자의 내레이션이 들린다.     


유자(Na)

1996년. 인터넷을 알기 위해 몇 권의 책을 읽었지만, 1년이 다 되도록 인터넷을 할 수가 없었어요. 내 주위에는 인터넷이 뭔지 아는 사람이 없었거든요. 그렇지만, 잘생긴 사람은, 있었어요.     


불 들어오면, 386 컴퓨터와 모니터도 없이 테이블과 의자에 전화기만 보이는,

아날로그 감성이 풍부한 대학교 동아리방. 유자가 수줍게 앉아 있다.

광수(남/20대)가 기타를 퉁기며 노래한다. 그런 광수를 넋이 나가 보는 유자.     


광수

사랑을 할 거야!

유자

(방백) 풍성한 소울!

광수

사랑을 할 거야~~~!

유자

(라임(rhyme)을 따라) 나도 해~~~!

광수

(유자 보고 기타를 내려놓으며) 어. 유자 있었네.

유자

광수야, 너, 혹시, 인터넷이라고, 아니?

광수

아니. 그게 뭔데?

유자

외국인이랑 하는 PC통신 같은 거야. 인터넷 중에 월드와이드웹이라는 것도 있다는데. 그걸 하면 외국에 있는 사람들이랑 그림까지 서로 순식간에 주고받을 수 있대!

광수

(심드렁) 와우.

유자

나도 아직은 안 해봤지만 곧 할 것 같아. 내가 그, 인터넷이란 걸 배우면, 너한테도 가르쳐줄까?

광수

아니. (삐삐가 울리면, 삐삐 보이고) 난, 삐삐가 있잖아.

 

광수, 기타를 어깨에 둘러메고, 쉬크하게 나가버린다.


유자(Na)

멋져! 무심한데 멋져! (겨우 진정) 내가 만약 인터넷을 보여주면, 바로 눈앞에서 월드와이드웹이란 걸 딱 보여주면, 노광수는 궁금해서라도 나한테 이것저것 물을 거야. 그때 내가 아주 초연하게 전문적으로 알려주면, 내 지성미에 반해서 넘어올 거야! 아자! 그러니까 인터넷을 제대로 배우자!



유자는 인터넷과 사랑, 둘 다 가질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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