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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자 Oct 17. 2022

공간. 예술. 에너지

결혼 방학 #14

만약 세상에 음악과 미술이 없다면 내가 잃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 

공감, 환희, 위로 의 감정? 혹은 창조의 영감? 함께 나누는 열기? 


공연을 보러 간 칠성 조선소에서 우연히 아는 사람을 만났다. 딱 10년 만의 만남이었다. 나는 그를 선명하게 기억했고, 그는 나의 도움으로 어렴풋한 기억에서 나를 끄집어냈다. 그는 문화예술 기획을 하는 사람이자 교수였고, 지역에서 문화 예술공간을 운영하는 사람이다. 아마 많은 로컬 크리에이터들의 멘토라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다. 그는 평창에서 운영하던, 내가 가보진 않았지만 SNS로 행사 등을 보며 퍽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던 공간을 얼마 전 정리했다고 근황을 알려주었다. 나는 그에게 받았던 창업 교육, 내가 운영하던 공간에서 진행한 교육에 그를 강사로 불렀던 일들을 회상시키면서 여전히, 하지만 웬만하면 온라인으로 교육을 기획하고 운영하는 일을 한다고 내 근황을 전했다. 하지만 그는 그저 나를 비슷하게 매력적인 공간을 운영하던 젊은 친구로 기억하고 있는 듯했다. 그가 되살려낸 기억들을 통해 새삼 내가 그런 일을 했던 적이 있다는 것이 낯설게 다가왔다. 그렇구나 그는 나도, 그도, 그의 옆에 있는 이 공간의 대표도 다 공간에 관심이 많다는 공통점에서 동질감과 반가움을 느끼는구나. 사실 나는 그저 오래간만에 아는 사람을, 무언가 인사나 날씨 이상의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을 만났다는 반가움에 가까웠는데 그 사실이 새삼 내가 취향을 잃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자각을 하게 했다. 아니 취향 자체가 아니라 취향을 나누는 즐거움을 잃은 건지도 모르겠다

.

칠성 조선소에서 아흐레에 걸쳐 진행된 아트페어의 마지막 이틀 동안 나는 퍽 긴 시간을 그 공간에서 보냈다. 이미 나흘 넘게 비가 내린 후라 날은 을씨년스러웠지만 매력적인 작품들로 채워진, 사람들이 붐비는 칠성 조선소는 속초에 온 이래 공연이며, 가이드며 이래 저래 열 번은 왔던 그 많은 날들 중 어느 때보다 따뜻함을 느끼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나는 여전히 전시보다는 공연에 관심을 가지고 이 공간에 방문했지만, 공간을 채운 작품들은 분명 공간을 빛나게 하는 구석이 있었고, 공간 덕에 작품이 더 빛나 보이는 구석이 있다고 느껴졌다. 물론 클라이맥스는 호수의 잔물결 소리, 점프하는 물고기, 가끔씩 지나가는 작은 배들을 뒷 배경으로 하는 그 공간에서 펼쳐지는 연주라 하겠다. 사실 그게 너무 좋다. 아직까지 속초에 와 본 공연들 중에서 이곳에서의 공연이 늘 단연 최고였는데, 물론 매력적인 연주자, 가수들이 오기도 했지만 그 환상적인 무대가 주는 장엄함이 그저 가슴을 뛰게 한다. 이틀 동안 그곳을 배경으로 노래하고 연주한 가수는 몽라, 이랑, 정밀아였다. 셋다 가수는 잘 모르지만 대표곡 한 곡씩은 들어본 적 있는 이들이었다. 갑작스레 기온이 떨어져 날은 너무 춥고 비도 내렸는데 노래가 너무 좋아서, 그곳에서 우리를 위해 노래하고 연주하는 이에게 너무 감사해서, 묘하게 평온하면서도 설레는 그 자리의 에너지가 느껴 저서 차마 자릴 뜰 수가 없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날도 추운데 이틀이나 엄청 방황하고 다녀서인지 저녁을 먹자마자 잠이 들었다. 그리고 다시 일어났을 때는 새벽 1시였다. 창 밖의 거리는 고요했고, 어두운 집도 고요했다. 나는 저녁에 만난 정밀아의 앨범을 틀었다. 그녀는 자신의 노래 중 오늘 이곳에 어울릴 만한 바다, 쓸쓸한 노래가 많다며 노래를 시작했었는데 그녀의 노래는 모두가 잠든 새벽 창 밖 풍경을 보며 듣기에도 참 좋았다. 음악을 틀어놓고 그냥 느리게 사부작 거리며 무언갈 했다. 정리를 하고, 책을 읽고, 스트레칭을 하고, 마치 시간은 멈춰 있는데 나만 천천히 움직이듯 시간의 흐름에 기뻐하지도 노여워하지도 노심초사하지도 않고, 잊은 채 그냥 순간에 온전히 있었다. 아주 오래간만에 새벽 감성으로 날이라도 샐 수 있을 듯했다. 내가 칠성 조선소에서 에너지를 가져왔고, 음악이라는 매체에 실어 그 에너지를 여기에 풀어놓았다. 늦은 밤 아니 새벽 여성 싱어송라이터의 바다 노래를 들으며 빈 거리를 바라보며, 차를 마시고, 글을 쓰는 나는 행복하다. 원래 내 공간이었던 이 집은 그 순간 잠시 정말 나만의 공간이 되었다. 4년 전쯤인가 혼자 인도를 여행하며 읽은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이 생각났다. 내가 이 에너지를 유지할 수 만 있다면 나는 어쩜 작가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 하나 턱 하니 살 여유는 아니란 생각에 그저 구경만 하고 왔지만, 그 그림, 공간의 에너지는 잔향처럼 나를 따라와 감정을 흩뿌리고, 영감을 준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나오는 길, 박스에 정리되던 그림들이 떠올랐다. 걔들은 이제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하게 될까? 누구의 무엇이 될까? 큰 맘먹고 누구 하나 데려오지 못한 게 이제야 크게 아쉬움으로 남는다. 뭐라도 하나 업어왔다면 잔향이 더 오래갔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어쩔 수 없이 이 아쉬움의 감정을 잔향을 걸어 둘 고리로 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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