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쓰는 마음
모든 시작은 불안(不安)을 수반한다. 불안은 희망과 두려움의 중첩(重疊) 상태다. 불안은 양자역학의 입자와 달리 관찰만으로 확정되지 않는다. 행동과 시간선(時間線)이 관찰자 효과(the observer effect)를 만든다. 고로, 불안의 맛은 가끔 달고 자주 쓰다. 불안의 크기는 원하고 바라는 강도와 같다. 간절할수록 불안은 짙다.
몇 년에 한 번씩 글쓰기 발동이 걸린다. 한두 편 달아 쓰는 일은 종종 있어도, 열댓 개씩 이어 쓰는 시기는 가끔 찾아온다.
브런치 작가 선정이 본격적인(?) 내 글쓰기의 시작이었다. 예상(이라 쓰고 착각이라 읽는다)과 달리 작가 선정까지 오래 걸렸다. '작가님'이란 실체 없는 달콤한 유혹에 빠져 열심히 썼다. 첫 번째 시기였다. 선정과 탈락의 불확정 상태가 주는, 긴장과 설렘이 뒤섞인 불안이 동력이었다. 세상 많은 것들처럼 '작가님' 타이틀도 막상 손에 쥐고 보니 아무것도 아니었다. 갈증에 바닷물을 마신 것 같았다. 노트북은 아주 가끔 만지는 '사물'이 돼버렸다.
엔데믹이 곧 올 거란 희망과 팬데믹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절망 사이를 오가던 코로나 시기에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두 번째 시기다. 내가 어찌해 볼 방도는 없고, 그저 인내만 강요받던 그 불안을 견딜 약이 필요했다. 책 한 권 분량만 채우면 출간작가가 될지도 모른다는 환각제, 어서 시간이 흘러 코로나가 종식되면 당장 예전 매출을 회복할 거라는 진통제가 간절했다. 육 개월을 매달려 원고지 604매의 글을 썼다. 당연히 출간은 하지 못했고, 코로나만 끝났을 뿐 반토막난 매출도 회복하지 못했다. 새옹지마일까. 머리와 손, 엉덩이를 동원한 경험이 주는 귀한 깨달음은 얻었다. 망외(望外)의 소득이다.
글쓰기는 한 생각의 종결이다. 책이나 영화 후기를 써보면 안다. 다 이해했다고 책을 덮었고, 충분히 공감했다고 생각하며 엔딩 크레딧을 봤는데, 하얀 모니터에 글자를 처넣으려면 머릿속도 하얘진다는 것을. 평론가들이 왜 읽고 또 읽는지, 왜 보고 또 보는지 그제야 알게 된다. 일도 그러하다. 차고 넘칠 만큼 숙고를 거듭하고 계획을 세웠어도 작은 변수 하나에 머릿속이 하얘진다. 골백번을 씹고 뜯고 맛봐도 이 방향이 맞다는 확신은 담배연기처럼 덧없다. 글로 쓰려면, 느낌을 시각화하는 궁리의 시간이 필요하고 나의 생각을 설득의 언어로 번역하는 고민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 과정을 통과하면 불안 속 희망이 물 잔 속 잉크처럼 짙게 번져나가는 확정을 경험하게 된다.
또한, 글쓰기는 셔터 스피드를 올리는 일이기도 하다. 노인에 비해 아이들이 시간의 흐름을 느리게 경험하는 것은 초당 촬영 프레임 수, 즉 세상을 인식하는 횟수가 어른보다 많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루당 2회 촬영은 사진과 다름없다. 초당 120회 찍고 일반 속도로 재생하면 슬로 모션이 된다. 천천히 그리고 자세히 세상을 본다는 뜻이다. 글쓰기가 그렇다. 하루의 일기를 쓰더라도 어떤 순간의 느낌, 기분, 감정을 곱씹어 자세히 글로 쓰면 그 하루는 초당 120 프레임으로 기억에 남는다. 여느 날과 같은 24시간이 48시간, 72시간처럼 아주 천천히 흘러가는 하루로 저장할 수 있다는 말이다.
해가 바뀔 때, 세 번째 시기가 왔다. 뭔가 결심하기 좋은 새해. 독서 모임 대책회의는 목표로 삼은 숫자에 이르지 못했지만, 상황과 정황으로 보아 오프라인 진출을 개시해야 할 때라고 판단했다.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다. 훗날 내가 읽고, 내 아이들이 읽으면 좋겠다는 마음. 성공과 실패의 불안은 크지만, 사실 결과는 어느 쪽이라도 상관없다. 1월부터 '나는 대책이 있다' 매거진을 쓰기 시작했고, 나의 글쓰기 세 번째 시기를 열었다.
시간 자원이 부족한 나이다. 하지만, '안 해 본 일'은 최소로 줄이고 싶다. 세 번의 글쓰기 시기는 모두 불안이 지배한 때다. 해보기라도 하자, 지금 아니면 언제란 마음이 컸다. 불안의 중첩을 깨고, 생각의 속도를 높이는데 글쓰기만 한 게 없다.
생각대로, 계획대로 일이 풀리기를 바란다. 혹은 그렇지 못한 결과를 받아 들더라도, 글로 남기려는 마음은 변함없다.
한 꼭지씩 쓰면서 불안을 줄인다. 꼼꼼히 생각하고 음미하며 낙관에 거름을 준다. 글 하나에 내 모든 꿈과 한숨을 녹여 넣고 초당 120 프레임으로 쓰고 있다.
먼 훗날, 내가 주인공으로 연기한 장면들을 늘어놓고 편집을 할 것이다.
미래의 내 관점에서 에피소드의 중요도를 다시 평가하고 플롯을 짜겠지.
스토리가 완성되면, 나는 표지에 굵고 진한 글씨로 '인생'이라고 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