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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딩: 숨을 고르고 기다려라

일잘러의 어휘력

by 이승화
희망고문


*팀장: 회의 결과, 이번 A 프로젝트가 펜딩됐습니다.


이 말이 어떤 의미일까요?

첫째, A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로 했다.

둘째, A 프로젝트를 그만하기로 했다.

셋째, A 프로젝트를 잠시 보류하기로 했다.


무언가를 매듭짓기 좋아하는 성격인 저는, 이 세 번째 상황이 가장 힘들었습니다. 새로운 프로젝트를 진행하지도 못하고, 깔끔하게 잊고 새로운 도전을 하지도 못합니다. 아직 기회가 있다는 희망을 안고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결정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은 말 그대로 희망고문이었어요.


이전에는 집요하게 상사에게 결정해달라고 조르기도 하고 투정도 부리고 했지만, 연차가 쌓이면서 결정과 책임의 무게에 대해 알게 되었어요. 모든 일이 깔끔하게 결정될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죠. 선택을 위해선 굉장히 복잡한 문제들이 얽혀 있고, 누구나 더 나은 판단을 위해 노력한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펜딩’의 순간은 꼭 필요한 숨고르기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좀만 기다려 주세요


펜딩(Pending)의 사전적 의미는 ‘미정인, 보류 중인, ~을 기다리는 동안’입니다. ‘pend’가 매달리다, 의존하다는 의미인데, 현재진행형의 의미를 담은 ‘-ing’와 결합하여 ‘매달려 있는’ 상태를 뜻하는 펜딩이 됐어요.

철봉에 매달리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떠올려 보세요. 땅에 내려온 상황을 결론이라고 보았을 때, 우선 철봉에 의지하며 머물러 있는 상태입니다. 철봉에 매달린 상태에서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겠네요. 철봉이 아니라 난간에 매달려 있다면, 올라오거나 떨어지거나 둘 중 하나의 결론에 이르기 전 과정이에요.


비즈니스 상황에서도 ‘어떤 일이 아직 결정되지 않은 상태’를 의미해요. 결재 서류 확인이 지연되고 있거나, 서버의 오류 등으로 작업이 보류되고 있는 상황, 대기중인 상황을 주로 의미해요.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해 잠시 멈춘 상태입니다. 승인되거나 취소된 것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이라는 사실을 인지해야 합니다.


*프로젝트 승인이 아직 펜딩 상태입니다.

*네트워크 문제로 해당 작업 펜딩 중입니다.


홀딩해 주세요.


비슷한 의미로 자주 활용되는 말은 홀딩(Holding)이 있어요. 사전적 의미로는 ‘잡고 있는, 보유하고 있는, 유지하고 있는’이라는 뜻이에요. 명사형으로는 가지고 있는 물건, 재산 등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그래서 회사 이름 중에 ‘홀딩스’가 붙는 것은 상품이나 서비스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회사의 재산(주식)을 보유하고 관리하는 곳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어떠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느냐, 얼마나 잡고 있느냐에 따라 일시적인 보류 상태, 중단의 과정으로 활용되기도 해요. 무언가를 쥐고 있는 이미지를 떠올리면 됩니다. 대신 완전히 소유한 것인지, 던지거나 놓기 전에 잠시 쥐고 있는 상태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겠죠.


비즈니스에서는 ‘일시적인 중단, 보류, 대기’의 의미로 많이 쓰입니다. 회사에서 해당 프로젝트를 홀딩하기로 결정했다면, 하던 일을 잠시 멈추기로 한 상황이에요. 적절한 타이밍을 잡기 위해 잠깐 멈춘 것일 수도 있고, 고여 있던 문제가 터져서 제 기능을 하지 못할 수도 있죠. 자본 문제로 은행이 계좌를 일시적으로 막아두는 상황, 네트워크 문제로 잠시 음식 주문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모두 홀딩 상태입니다. 완전히 막힌 것이 아니라 잠시 보류 중인 상황이니까요.


예상하지 못한 문제들


새로운 프로젝트를 기획하기 위해 많은 협력사들을 만났습니다. 팬데믹 시기에 큰 인기를 얻었던 유초등 디지털 교육 콘텐츠들을 모아 플랫폼을 구성하기 위해 여러 출판사, 영상 콘텐츠 제작사, AR/VR 교육 업체 등을 만나며 기획을 구체화했습니다. 오랜 회의와 피드백 끝에 샘플 콘텐츠도 만들었어요. 샘플을 보고 나니 이제 출시가 기다려졌어요. 그렇게 차근차근 다음 단계를 밟아가고 있는데, 갑자기 프로젝트가 보류되었습니다.


회사의 상장이 미끄러지면서 현금 투입이 쉽지 않은 상황이었어요. 거기다 팬데믹이 끝나고도 유초등 디지털 교육이 계속 인기가 있을지 전망이 불확실하다고 판단했어요. 진행자 입장에서 매우 아쉬운 결정이었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았을 때 그 판단은 현명했어요. 팬데믹 시기가 끝나자 대면 교육이 활성화되기 시작하면서, 디지털 콘텐츠의 인기는 급격히 줄어들었답니다. 그대로 진행했으면 손실이 컸을 겁니다. 그렇다고 단칼에 정리했으면, 그동안 쌓아온 지적 자산을 활용할 수 없었겠죠. 보류한 상황에서 이때의 프로세스를 활용하여 기업 교육, 성인 교육으로 전환하여 차별화된 프로그램을 개발할 수 있었어요.


숨을 고르고 기다려라


일잘러하면 어떤 그림이 떠오르나요? 빠르게 여러 프로젝트를 동시에 해결하는 바쁜 사람들이 그려집니다. 한국 사람들 성질이 급하기도 하지만, 요즘 시대가 빨리 변하면서 더 조급한 마음으로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경주마처럼 맹목적으로 달리다 보면 놓치는 것들도 있어요. 주변을 되돌아보기 힘들고, 스스로를 객관화할 여유도 없어요. 그럴 때 잠시 숨을 고르며 때를 기다리는 순간도 필요해요.


진행된 프로젝트가 보류되면 우선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거기다 언제 다시 진행될지 모르는 불안감도 있어요. 하지만 이 순간을 건강하게 보내야 해요. 잠시 멈추었을 때는, 왜 멈추었는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다른 팀이나 상급자가 보았을 때 어떤 점이 부족한지 고민하고, 스스로 놓친 것은 없는지 살펴야 합니다. 보완할 내용이 있다면 수정해서 다시 도전해야 하고, 빠진 부분은 채워 넣어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적절한 때를 기다리는 일이에요.


수많은 히트곡들이 모두 따끈따끈한 신곡은 아닙니다. 오래 전에 만들어 두었던 곡을 때에 맞추어 발매한 경우도 많아요. 소설도 마찬가지입니다. 떠올랐던 이야기를 쓰고 묻어둔 뒤에, 시기에 맞추어 발행하기도 합니다. 내가 하는 일들에도 다 때가 있다는 여유로운 마음도 필요합니다. 적절하게 숨을 고르고 정돈하는 태도도 소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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