넝쿨만 늘려갈 뿐, 벙그러진 꽃 한 송이 내놓지 않는 호박 줄기를 바라보며 남편이 말했다.
애초부터 늦된 호박이었다. 지난 오월, 아는 분이 잘 키워보라며 호박씨를 놓고 갔다. 하지만손바닥만 한 텃밭에자두나무그늘이 드리워지는 바람에 어떤 작물도 시원찮았기에 심드렁했다. 결국 한참 후에야 호박씨를 심었느냐고 재차 묻던 그분이 직접 호박씨 스무 개 정도를 꾹꾹 꽂아 심었다. 그날, 우리는 근처 순대국밥집 앞 공터에서 이미 덩굴손을 펼치고 있는 호박을 보았다.
호박 열리기는 애초에 그른 모양이라고 포기할 때쯤, 흙 묻은 고깔을 머리에 쓴호박모종이땅 위로 비죽이 고개를 내밀었다. 머리에 남은 호박씨 흔적을 바라보며 떡잎이 펼쳐지는 순간 퉁 날아가는 호박씨 껍데기를 상상했다. 땅을 열고 올라온 그 생명력을마주하고 있다는 기쁨에 남편을 불러 드디어 새싹이 올라오고 있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며칠 지나 열댓 개 올라온 모종중 튼실한 것으로 골라 다섯 개를 띄엄띄엄 옮겨주었다.
이어 엎드려 땅 위를 달려야 할 호박줄기가 한참을 꼿꼿하게 서있는 것을 보더니 남편은 또 타박을 했다.
"오뉴월 호박 크듯이 큰다는디.... 아닌가벼... 언제 호박이 열리는데?"
"꽃도 아직인데? 꽃이 피어야 호박이 열리던지 할 거 아냐! 그래도 호박넝쿨 덕분에 잡초와 씨름하지 않을지도 모르니 다행이지...게다가 호박잎이라도 먹을 수 있잖아!"
호박잎쌈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남편은 그 말에 한 발 물러섰다.
그렇게 늦된 우리네 호박은 남들 애호박 따먹을 때쯤에야조막만 한 애기 덩굴손을 펼치기 시작했고여름을 맞이했다. 폭염이 왔고 가끔 소나기도 내렸다. 그러던 어느 날 텃밭에 노오란 호박등이 켜진 날,
와, 호박꽃이 피었어!
어디 어디?
요란스럽게 호박꽃마중을 했건만 꽃은 피어도 열매는 쉬 보이지 않았고, 또 며칠이 지나 드디어 구슬만 한 호박이 맺혀있었지만 더 자라지 못하고 누렇게 시들어 똑 떨어져 버리곤 했다. 늦게 심어놓고 애꿎은 호박의 정체성에 대해 묻곤 했다.
호박 맞아?
호박씨 고깔을 쓴 호박모종이 구슬만한 열매를 맺기까지, 애썼다.
점심을 먹고 들어오는 길, 기함을 했다.
하마 전봇대를 탈 기세야!
텃밭 주인의 무정한 타박에도 불구하고 푸른 잎과 덩굴로 자두나무 그늘을 덮던 호박 덩굴은 이제 울타리를 타고 올라 옆에 서있는 전봇대까지 오를 기세였다. 울타리에 한 발을 붙이고 전봇대를 향해 고개를 드밀고 허공을 향해 손을 펼치고 있는 호박넝쿨을 끌어내려 다시 울타리 안으로 집어넣었다.
너 참 애쓴다 .
호박처럼 타박을 하지 않는 것도 없다. 제 때 툭 심어놓으면 기름진 땅이면 더 좋겠지만 야박한 땅 위에서도 햇빛을 향해 잘도 걸어간다. 그리고 올라탈 수 있는 가지가 있다면 덩굴손을 툭 올리고 또르르 감아 또 한발 제 세상을 넓혀간다. 저리도 혼자 툭툭 잎을 늘리고 꽃을 피우고 호박을 맺어놓으니 큰 힘들이지 않고 뜻밖의 좋은 일이나 재물이 들어왔을 때'넝쿨째 굴러온 호박'이라고 하는지 모른다. 애쓰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그저 얻어지는 것, 거기다하나도 아닌 호박잎과 호박 그리고 호박씨까지 가져다준 넝쿨째 굴러온 호박.
호박처럼 스스럼없이 다가오는 단어도 없다. 뭐든 호호 웃으며 내어주고 툭 치고 지나가며 인사를 건넬 것만 같은 둥글둥굴한 이웃 같은 얼굴이 떠오른다.하지만 호박잎을 만져보면 까슬까슬하다. 털과같은 가시로 자신을 외부세력으로부터 지켜내기 위한 최대의 보호막이다. 호박도 애쓴다. 오늘도 용쓰며 울타리를 타고 노란 꽃등을 매달고 벌을 유혹해서 수정을 하고 끊임없이 넝쿨을 달린다.
호박의 달리기는 쉬워 보인다. 하지만 매달릴 곳을 향해 허공을 향해 꼿꼿이 고개를 들어 올리거나 버티지 못하고 툭 떨어진 호박 줄기를 볼 때마다 너도 애쓰는구나 싶다.비록 애쓰지 않은 척 커다란 꽃으로 호방하게 웃고 있지만 그 속내가 안쓰럽다.
그새 호박잎 우렁된장쌈밥을 네 번 먹었다. 비록 애호박 수확은 아직까지 한 개에 불과해서매콤한 고추를 썰어 넣은 애호박새우젓 찌개를 끓였을 뿐이다. 그래도늦게 심어놓고 애꿎은 호박 탓만 하던 우리는 넝쿨째 굴러들어 온 호박덩이 자라는 맛을 쏠쏠히 보고 있다. 울타리 밖으로 손을 내미는 넝쿨을 안쪽으로 들여놓고 아직도 바닥을 기어 햇볕광장인 울타리를 타기 위해 전력질주하는 넝쿨의 세력을 아침저녁으로 응원하고 있다. 여기저기 구슬만 한 호박알이 맺혀 우르르 따야 할 시기가 금방 일 것 같아 미리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