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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의 쓸모야

누군가의 평가에 자신의 가치를 두고 사는 모두에게

by 지승렬

오늘만 두 사람의 입을 통해 들은 똑같은 이야기가 있다. 다른 사람의 만족을 위해 살지 말고 나의 만족을 위해 살라는 것.


올해 가장 많이 생각한 단어 중 하나는 '쓸모' 였다. 디즈니플러스 드라마 무빙의 몇 화인지는 모르겠으나, 극 중 주인공은 몸을 쓰던 일을 하다 컴퓨터 앞에 앉아 서류작업을 하게 된다. 그 결과 늘 서툴고 욕먹고 낮은 평가를 받는다.


그리고 집에 가 아내에게 이야기 한다. 나는 세상에서 쓸모가 없어진 것 같아. 그러자 아내는 상추쌈을 크게 싸서 그의 입을 틀어막고 얘기한다. 너는 나의 쓸모야. 나는 너의 쓸모고. 그 말을 들은 주인공은 흐느껴 울고, 그 말을 들은 나도 같이 울었다.


속한 집단에서 나의 쓸모는 무엇일까. 나는 내가 할 일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 생각과 달리 많은 것들이 꼬여갔다. 생각하고 실행한 것들은 결과 그대로 평가를 받지 못했고, 결국 다시 시작하기를 여러번 반복했다. 그러며 어느 순간엔 아 내가 쓸모가 없구나에 이르렀다.


이런 얘길 오늘 회사의 누군가와 하는데 그가 말했다. '그건 다른 사람이 내려주는 평가일 뿐. 나는 누군가가 아닌 나의 쓸모여야 하죠.' 저녁에 만난 또 다른 분도 비슷하게 말을 했다. '이제는 다른 사람의 평가가 아닌 나의 평가에 의해 만족하는 삶을 살고 싶다' 고. 나의 쓸모의 기준은 니가 아닌 나여야 해.


누가 나를 좋아해주면, 잘했다 칭찬 받으면, 필요하다 인정 받으면, 아니 인정 받아야 나는 쓸모있는 사람이구나 라고 생각해왔다. 무의식적으로 늘 그랬다.


회사 동료가 말하길, '딸에게 종종 이렇게 얘길해요. 니가 뭔가를 잘해서 아빠와 엄마가 잘했다 칭찬하면 좋지. 근데 그것보다 아주 쓸데없는 일을 해도 너 스스로 잘했다 칭찬하는 일을 많이 하면 그게 더 좋겠어.' 순간 정확한 이유는 몰라도 부끄러워졌다.


어쩌면 너무 익숙해서 이게 잘못됐는지도 모른채 살아왔을 지 모른다. 너의 만족이, 그대들의 만족이 나의 만족이야 라고 늘 생각했고, 그건 아주 가까운 관계에서부터 사회생활이라고 하는 울타리에서까지 마찬가지였다.


이타적인 사고와는 다르다. 다른 사람을 위해 살아왔다는 얘길 하는게 아니다. 결국 나를 위함인데 그 만족의 근원이 누군가의 판단과 반응과 평가인지, 아니면 내 자신으로 부터 온 것인지는 다르다는 것.


그래서 나는 어느 순간 정말 헷갈리기 시작했다. 진짜 내가 잘못 생각해온건가. 내가 틀렸나. 만족감을 주지 못하면 불안하기 시작하는데 실제로 그러했나. 만족감이란 것도 내가 생각한 추측과 허상은 아니었나.


그래도 올해는 어느 누구와도 관계 없이 오롯이 내 만족 하나만을 위한 무언가를 찾겠다고, 연중 어느 시점에 생각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연말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실은 발견을 못했다. 혼자 뭘 해도 별로 즐겁지 않다. 누군가는 마냥 쉬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나는 마냥 쉬면 불안하다. 행복은 뭘까. 어느 때 올까. 뭘해야 가슴이 뛸까.


가장 쉬운 건 그냥 덮는 것이다. 에라 모르겠다, 쇼츠나 보자. 잠이나 자자. 진실을 외면하고 편도체의 스위치를 올리면 마치 잊혀질 것만 갖지. 문제는 사라지고. 근데 그건 거기까지다. 한 순간 일 뿐이다.


하고 싶은게 많았던 욕망의 시절이었던 때도 있었다. 그 때 나는 나의 쓸모였을까. 그런 나는 행복했었나. 모르겠다. 확신이 없다. 기억은 부풀려지고 포장되어 저장된다.


쓸모없다고 느껴지면 그것만큼 마음이 바닥에 떨어지는 기분이 없었기에. 더 이상 그러고 싶지 않다. 나는 정말 나의 쓸모이길 바란다.


스트레스를 급격히 낮추는 방법은 숨을 깊게 마신 상태에서 뱉지 않은 채 힘을 주어 한번 더 마시고, 천천히 내뱉는 거라고 한다. 이게 우리가 잘 때 무의식적으로 하는 호흡이라고.


다같이 이렇게 숨 세번씩 마시고 뱉자.

나는 나의 쓸모다.

나는 나의 쓸모다.

나는 나의 쓸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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