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누웠다 다시 일어나서

하이텔 세대의 공부멘탈 관리법, 브런치숲

by 수필가 박신영

회사에 갔다가 집에 오니 7시 반이다. 밥을 먹고 좀 쉬자니 문 여는 소리가 들린다. 상우다. 하루 무사히 별일 없이 잘 보냈다는 선생님 말씀을 듣고 반갑게 인사드리고 뒤돌아서면, 함께 편의점에 가자고 기다리는 상우.. 수많은 종류의 음료매대 앞에서 고르고 고른 커피를 사서 집에 오는 길에 마시며, 아파트 산책길을 돌아 사진 몇 장을 찍고 집에 온다. 세탁기를 돌리고, 상우가 먹을 밥을 차려두고, 내 방에 오면 9시반. 아직도 정신은 회사나 집 어딘가 중간 즈음에 머물러있다. 화장과 땀으로 덕지덕지된 얼굴을 씻는 김에 따뜻한 물에 머리도 감고 몸도 씻는다. 수건으로 둘둘 머리를 감아올리고 얼굴에 로션을 좀 찍어바른 후 침대에 엎드렸다. 9시 50분.. 공부할 생각에 한숨이 나오는데, 책만 생각하면 그냥 너무 어렵고 한숨만 더 나온다. 하루종일 회사에서 일하고 집에 와서 다시 공부를 할 엄두가 안난다. 이 상태에서 어떻게 하면 될까. 여태까지 돈을 벌었으니 남들처럼 눈감고 쉬며 티비 좀 보다가 자고싶다. 만, 아니, 여태까지 돈을 벌었다면 앞으로의 시간은 내가 꼭 해야하고 하고싶은 일을 하는 시간이다. 어떻게 마음을 다잡아야할까. 그냥 회사일의 연장선 상에서 씻은 김에 새로 옷을 갖춰입고 출근하는 심경으로 도서관을 갈까. 아니 지금 눈 감고 바로 자고 두어시쯤 일어나 출근할 때까지 책을 볼까. 머릿 속으로 온갖 잡생각이 날아다니다 궁여지책으로 인터넷에 들어가 직장인이 퇴근해서 공부하려는데 너무 힘들면... 이라고 검색해본다.

정말, 정말 많은 글과 동영상이 나온다. 글 몇개를 읽고, 동영상 몇 개를 찾아본다. 내 지금 심정을 대변해주는 수많은 말과 글들. 어쩌면 이렇게 똑같을까 그리고 이렇게 내 마음을 잘 표현할까. 김영랑 시인의 내 마음을 아실 이 는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으리라 어릴 때부터 포기하고 살았는데, 아니 바로 여기에 내 마음을 알아주는 이가 있었으니, 답답하고 포기하고 싶고 쉬고싶고 눕고싶다가도 다시 벌떡 침대를 박차고 일어날 힘을 얻는다. 사람은 공감만으로도 어찌어찌 버티고 살아나갈 수 있는거다.

'등 따숩고 배부르고 꼬박꼬박 월급 들어오니 간절함도 없고 필요성도 없어지네요. 너무너무 힘들어요..' 영상에 달린 댓글도 빠뜨리지않고 읽어내려가다가, 수많은 내 나이 또래의 합격자들의 이야기까지 들으면, 갑자기 공부가 그렇게 외롭고 험난하고 절망적이지는 않아지는데... 한 편으로는 생각보다 더, 나 스스로 내 나이에 대한 불안함을 느끼고 있었나보다 고 깨닫게 된다. 힘내야지. 내 나이에 계속 꿈을 찾고, 공부하고 노력해서 직업을 바꾼 분들이 여전히 이렇게나 많은데.

공부일기를 쓰자.

얼마 전에, 풍물시장을 갔다가 하이텔 단말기를 보았다. 95년 여름 즈음, KT지국에 가서 낑낑대며 가지고 온, 뚱뚱한 모니터에 작은 덮개 키보드가 달린 모뎀일체형 하이텔 단말기. 밤새 채팅방에서 채팅을 하고 퀴즈를 풀고 시를 쓰고 글을 읽던 그 때가 생각났다. 사진도 영상도 없이 모든 것은 파란 화면 하얀 글자. 이야기 어뮬레이터.. 그 때 나는 빠른 타자와 채팅의 여왕이었다.


하, 정말 너무 힘들다. 먹고사는 일과 함께, 나의 꿈을 찾는 것은.

하루에도 수십번씩 내가 뭘 하고 있는건지 스스로 반문해보지만, 그래도 이 시간에 다시 책상 앞에 앉아있는 나의 길은 이것뿐. 내가 가고 있는 길이 설령 다른 산일지라도. 얼어붙은 빙하를 가로지르는 타이타닉 선두에 묶은 밧줄을 나홀로 이고지고 길을 만들어 끌고 가야할 지라도. 5년 전에 했으면 좋았을걸. 라는 말을 5년 후에 하지 않고 싶으니.

하여 뭐니뭐니해도 나에게 힘과 위로를 주는 글이 있기에 이렇게 브런치숲에 내 공부일기를 남겨본다. 아시겠지만 직장인은 누구에게도 그리 공부에 대해 털어놓을 사람이 없다. 나와 내 가족 이외에는 나의 합격을 바라는 이는 아무도 없기에 나 홀로 공부하고 온전히 책임져야하지만. 그래도 브런치가 있다.

피아노 공부를 하며 너무너무 힘들고 어려웠지만 브런치에 글을 쓰며 해냈듯이 이번에도 어려운 길을 걸어감에 브런치가 끝까지 함께하리라 기대해본다.

오늘의 마무리는 Robert Frost 의 시로 하련다.

The woods are lovely, dark and deep,

But I have promises to keep,

And miles to go before I sleep,

And miles to go before I sleep

--- Stopping by woods on a snowy evening


오늘의 12가지를 다 마치면 다시 추가할 몇 줄의 글이 더 있다. (여기까지 p.m. 11:19)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