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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Gold)과 피(Blood)-34

by 윤금현

34 장.



준영은 서울 남쪽 경기도의 시골로 가서, 여기저기 땅을 보러 다녔다. 여러 군데 부동산도 들렀다. 마음에 드는 땅도 있었고, 마음에 들지 않는 땅도 있었다. 하지만 눈이 번쩍 뜨일만한 그런 농지는 찾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오늘도 준영을 시골로 향했다. 혼자서 차를 몰고 드라이브 삼아서 국도를 달렸다. 이제 겨울이 되었다. 12 월은 아직 초겨울이지만, 준영의 마음은 눈이 펑펑 내리는 그런 신나는 겨울이 아니라, 얼음이 꽁꽁 얼어붙은 춥디 추운 겨울이었다


* * *


송영구는 김상원의 사무실 앞에 서 있었다. 태원 주식 회사라는 그럴듯한 명판이 붙어 있는 오피스텔이었지만, 영구는 여기가 사채업 사무실이며, 아주 생 양아치들이라는 것 또한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해 관계가 일치하는 그리고 영구가 이용해야 하는 그런 곳이었다.

영구는 문을 두드렸고, 안에서 건장한 젊은 남자가 문을 열었다.

“부장님 계십니까?”

문을 연 남자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영구를 보았고, 그 다음 뒤를 보았다.

“들어오시라 해라.”

안에서 김상원의 걸죽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쩐 일이십니까? 직접 여기까지 오시다니…….”

상원은 최대한 예의를 갖춰 영구에게 말했다.

“부장님, 지금이 팔 때입니다.”

“그렇습니까? 지금 당장 말입니까?”

영구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거렸다.

“아직 한 달이 되려면 2 주나 남아 있습니다만, 너무 빠른 거 아닐까요?”

“아닙니다. 지금이 팔 때입니다. 아주 신속히 대량으로 매도를 해 주세요.”

“그거야 상관없지만……. 그러면 주가가 떨어질 겁니다.”

“부장님, 다 생각이 있어서 하는 겁니다. 이번 일이 잘 되면, 부장님도 분명 이익이 될 겁니다.”

“아니, 저야 지금 팔면 이익을 봅니다만……. 아리랑의 주식이 떨어지면…….”

영구는 손을 들어 상원을 제지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더 이상 얘기하면 곤란해진다.

“그럼 믿고 가겠습니다. 그리고 2 주 뒤에 다시 오겠습니다.”

상원도 자리에서 일어나 영구를 문까지 배웅했다.

“실장님, 2 주가 되기 전에 술이라도 한 잔 할까요?”

“좋습니다.”

영구는 상원에게 웃어보이고 급히 사무실을 나갔고, 그 뒷모습을 상원은 빤히 쳐다보았다.

‘뭔가 이상해. 정말 이상해.’


* * *


진영은 아리랑 상무실에서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오전까지만 해도 괜찮았던 아리랑 시세가 오후가 되자마자 급격히 떨어지고 있었다.

“이거 왜 이러지?”

진영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매출도 괜찮고, 가맹점 건으로 사회적인 지지도 받고 있는데……. 이상하다.”

진영은 전화기를 들고 회장실을 불렀다. 비서가 받자, 아버지를 부탁했다.

“아버지, 주식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그것도 상당히 떨어지고 있습니다.”

“나도 보고 있다.”

“그럼 지금 팔아야 할까요? 아니면 좀 기다릴까요?”

전화기 너머에서 현석의 주저하는 느낌이 전해져 왔다.

“아빠, 지금 결정을 해야 합니다.”

다시 현석의 한숨이 전해져 왔다.

“송 실장이 오면 의논해 보마. 기다려라.”

전화가 끊어지자, 진영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무슨 작전 세력이 끼어든 거 같은데……. 우리가 가맹점을 직영으로 돌리니까, 그 사이에 한 몫 챙기려고 하는 놈들이 있는 것 같은데…….’


* * *


준영은 너른 벌판 앞에 서 있었다. 눈앞에 초록과 회색의 물결이 출렁이고 있었다.

“어떻습니까? 한 만 평 되지요.”

준영의 옆에 서 있는 부동산 중개인이 조용히 말했다.

“예. 좋아 보입니다.”

땅은 나무들과 잡초들로 가득 차 있었다.

“땅도 괜찮습니다. 잡종지니까 오히려 활용도가 높지요.”

준영은 부동산 중개인의 말에 끄덕끄덕했다.

“이 땅에서 뭐를 하실 생각이십니까? 말씀해 주시면 제가 다른 곳을 보여드릴 수도 있습니다.”

“아니, 됐습니다. 여기가 마음에 듭니다.”

중개인은 의아심이 들었다. 거의 쓸모도 없는 잡종지를 왜 사려 할까?

준영은 중개인을 보았다.

“창고를 지을 생각입니다.”

“아, 창고.”

그제야 중개인은 이해가 되는 모양이었다.

“평당 만 원 정도나 할까요?”

“그렇게 싸지는 않고, 평당 오 만 원 정도는 봐야 될 겁니다. 물론 주인의 생각을 들어봐야겠지만…….”

준영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산들이 저멀리 자리하고 있고, 동쪽 끝으로는 하천이 흐르고 있었다. 넓은 평야의 한쪽에 자리한 쓸모없는 땅이었다. 밭이나 일궈서 감자나 고구마를 심으면 딱이었다.

‘높은 산이 없으니, 해를 가릴 일도 없고, 하천이 있으니, 물은 끌어오면 될 테고…….”

준영의 머릿속에 만감이 교차했다.

“그럼 주인을 만나러 갑시다.”

“주인은 서울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요?”

“지금 5 천만 원을 계약금으로 거시면 됩니다.”

“좋습니다. 가시죠.”

준영은 중개인의 차에 타고, 그의 사무실로 향했다.


이제 인생의 첫 발이 내딛어지는 순간이다. 여기에다가 전면이 유리로 된 빌딩을 지어서, 각종 식물들을 심을 생각이다. 백 여 종 이상의 작물을 재배할 수 있을 것이다. 땅 값은 5 억 원이지만, 아마 빌딩을 지으려면 몇 십 억이 들어갈 판이었다. 준영은 친아버지 이현석을 생각했다. 그래도 낳아준 아버지였기에, 나에게 이런 걸 해주려고 한다. 그 마음과, 태어나자마자 나를 다른 집에 입양보낸 그 마음과, 과연 어느 쪽이 더 클까 하는 생각도 드는 준영이었다.

‘몇 십 억을 투자해서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손혜정이 여기 와서 살자고 하면 살까?’

‘아니, 손혜정이 나를 다시 보기나 할까?’

준영은 처음 손혜정을 보았을 때의 화사한 자태를 떠올렸다. 그리고 어두운 암흑 속에서 느꼈던 혜정을 생각했다. 절로 입에서 한숨이 나왔다.


* * *


준영의 전화가 울렸다.

[송영구]

“예, 실장님, 접니다.”

“준영 씨, 급히 알려줄 내용이 있습니다.”

영구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지금 아리랑 주가가 떨어지고 있습니다. 이래서는 회장님이 추진하시는 것들이 잘못될 수가 있습니다.”

“네?”

준영은 깜짝 놀랐다. 아버지의 사업에 문제가 생기면, 지금 계약금을 걸고 온 땅도 날아가는 수가 있다.

“아버님이 땅 값으로 준 돈이 있습니까? 그걸로 옥수수를 사면 어떨까요?”

“예? 옥수수를 사요?”

준영은 영구의 뚱딴지 같은 소리에 어이가 없었다.

“선물입니다. 지금 옥수수가 세계적으로 품귀입니다. 지금 샀다가 한 두어 달 후에 팔면 이득을 볼 겁니다. 잘 하면 회장님께 점수를 딸 기회입니다.”

“예. 일단 알겠습니다. 지금 지방에서 서울로 가는 길이니까, 올라가서…….”

“그럼 이만.”

준영은 제네시스의 가속 페달을 힘껏 밟았다. 진영이 리스해 준 차량. 준영은 만족했다.


* * *


준영은 이현석 회장실 앞에서 잠시 멈췄다. 숨을 천천히 고른 다음, 더욱 천천히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들어오라고 하자, 조심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현석은 준영이 들어오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책상을 돌아나왔다.

준영은 현석에게 인사를 꾸벅했고, 그런 준영을 현석은 따스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앉아라.”

“예.”

“땅은 보았냐?”

“예. 5 천 만 원 계약금 걸고 왔습니다.”

“잘했다. 네가 알아서 잘 했겠지.”

“예. 회장님.”

준영의 회장님 소리에 현석의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이제 그만 회장이라고 불러라.”

“예.”

그러나 현석은 아무 말도 없었다.

“예, 아버지.”

준영은 현석에게 아버지라 불렀고, 현석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아주 평안해 보였다.

“이제 그 땅에 빌딩을 지을 계획을 세워야 한다. 네가 건축사를 소개해줄 테니, 거기 가서 내 생각을 반영해서 설계도를 짜 봐라.”

준영은 현석의 마음 씀씀이가 너무나 고마웠다. 그때 퍼뜩 영구의 전화가 생각났다.

“저, 옥수수를 사면 어떨까요?”

“응?”

“송 실장이 말하길, 선물로 옥수수를 사면 이득을 볼 거랍니다.”

“송 실장이? 그런 얘기를 너한테 왜 했지?”

“제가 잘하면 아버지의 신임을 얻을 거라 했습니다.”

“하하. 난 또 뭐라고……. 그래. 송 실장이 그래도 네 생각을 해주는구나. 그렇게 말했다면 확실한 정보겠지?”

현석은 눈을 가늘게 뜨고 준영을 보았다.


* * *


“어이, 진태, 잘 지내나?”

“허허, 친구. 나야 자네가 나한테 돈만 안 빌리면 잘 지낸다네.”

현석은 진태의 농담이 싫지 않았다.

“그런데 아리랑 주식이 떨어져서 어쩌지? 자네도 손해를 볼 텐데.”

현석은 진태 걱정을 해주었다.

“걱정 마시게. 나는 나대로 생각이 있으니까. 자네는 나한테 담보나 확실히 제공해. 그래야 내가 돈을 빌려주던지 할 게 아닌가?”

“떨어진 주식도 받아주나?”

현석은 진태에게 너무나 미안해졌다.

“장사 하루 이틀 하고 말 건가? 주식이란 올라갔다가 떨어졌다가 하는 거야.”

“참, 진태. 나한테 정보가 하나 있는데 말이야.”

“그래? 말해 봐.”

“선물로 옥수수를 사면 어떨까 해서…….”

“자네가 선물을? 그만 둬.”

진태는 딱 잘라 말했다.

“하지 마. 자네는 선물을 몰라.”

현석은 조바심이 났다.

“그럴까? 그만 둘까?”

“잘 생각했어. 절대 하지 마.”

현석은 전화를 끊고 준영을 보았다. 준영의 얼굴이 심각해져 있었다.

“좋다. 이번은 친구의 말을 무시하고, 네 하고 싶은대로 해 봐라.”

“예. 감사합니다.”


* * *


선경은 스마트폰 화면에 뜬 이름을 보더니, 잠시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았다.

“오빠, 어쩐 일이야? 이제 나한테 전화 안 할 줄 알았는데.”

“선경아, 미안하다.”

준영은 선경에게 진심으로 미안해했다.

“어쩐 일이야?”

“선경아, 나 시골에 땅 계약했다. 이제 새 출발 하는 거야.”

“야! 정말 잘 됐다.”

선경은 준영이 자기에게 했던 일을 잊어버린 듯 정말로 좋아했다.

“선경아, 엄마 아빠에게도 말씀드려. 나 이제 시골로 가서 산다고.”

“알았어. 그런데 그런 이야기는 직접 와서 말하는 게 어때?”

“아니야. 그리고 나 지금 너무 바빠. 건축사 사무실에도 가봐야 해.”

“거긴 왜?”

“야, 생각을 해 봐라. 땅만 사면 뭐 하냐? 건물도 지어야지.”

“와! 오빠 친부가 해주는 거야?”

“그렇단다. 미안하다.”

선경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아니야. 오빠는 그동안 고생만 했잖아.”

“…….”

“집에는 언제 올 거야?”

“조만간 빨리 갈께.”

준영은 선경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제일 먼저 알려주었다. 손혜정에게도 전화를 하고 싶었으나,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직은 참자. 분명히 때가 올 거야.’


선경은 저녁 식사를 하면서, 종환과 순화에게 준영과 시골 땅 이야기며 건물 이야기를 했고, 종환과 순화는 진심으로 기뻐했다. 자신들이 해 줄 수 없는 것을 친부가 해 주는 것에 너무나 감사했다. 이제 준영도 버려졌다는 것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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