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장.
현석은 자기 책상의 의자에 깊숙이 앉아 있었다. 책상 위에는 서류 몇 가지가 어지러이 널려 있었고, 현석은 그 종이 더미들을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었다. 책상 위의 모니터에는 주식 시세판이 띄워져 있었다.
“음, 계속 떨어지는구나.”
아리랑의 주식이 일 주일이 넘게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 분명히 누군가 대량으로 구매했다가, 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현석은 지금 팔 수도 안 팔 수도 없는 궁지로 몰리고 있었다. 가맹점 보증금을 전부 내어준 지금, 현석의 수중에 현금은 거의 없었다. 아직 태화 투신의 손진태는 자금을 주지 않고 있었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진영이 뛰어들어왔다.
“아버지, 옥수수가…….”
“뭐?”
현석은 벌떡 일어났다. 선물로 구매한 옥수수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이다.
“그것도…….”
“예. 지금 폭락하고 있습니다. 잘못하면 몇 십 억 이상을 날리게 생겼습니다.”
“지금 안 팔고 버티면?”
“장담 못합니다. 반의 반 토막이 날지, 아니면…….”
열린 문으로 이번에는 송영구가 들어왔다.
"송 실장,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면목없습니다. 뭔가 잘못된 것 같습니다. 이거 작전 세력이 끼여든 것 같습니다. 아마 우리가 가맹점들을 전부 직영으로 돌리려고 하는 사이에 한 몫 잡으려는 놈들 같습니다.”
현석은 의자에 주저앉았다.
“좋은 일 한 번 해보자는데……. 세상이 안 도와주네.”
“아버지,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현석은 아리랑 대표이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그건 자기의 책임이다. 지금 이 순간 진영도 영구도 그리고 그 누구도 대신 결정을 내려주지 않는다. 현석은 뱃속이 거북해졌다. 옛날부터 가지고 있는 속쓰림이 지금 다시 시작하고 있었다. 현석은 책상 서랍을 열어 제산제 한 포를 꺼내, 비닐을 찢은 다음, 입에 대고 쭉 빨았다. 당장 몇 시간은 버틸 수 있다.
‘좋아. 이거보다 더 힘든 시절도 겪었는데, 겨우 이것 가지고…….’
갑자기 전화가 울렸다. 현석은 전화를 받았고, 준영임을 알자, 목소리를 낮췄다.
“……. 그래. 괜찮다. ……. 알겠다. ……. 땅 값은 내가 지금 보내마. 그 정도는 있으니까. ……. 어허, 괜찮다니까. ……. 사람이 살면서 실수할 수도 있으니까. ……. 옥수수는 내가 처분하마.”
현석은 전화를 끊고, 진영과 영구를 보았다.
“알겠다. 모두 나가. 이제부터 내가 직접 하겠다.”
진영과 영구는 인사를 하고 방을 나갔다.
“실장님, 대체 무슨 일입니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영구는 진영에게 시치미를 뗐다. 그리고 진영은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다.
“큰일이군. 당장 다음 달 월급을 어떻게 주지?”
진영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러게 말입니다.”
송영구도 짐짓 힘든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럼 이만.”
진영은 영구에게 작별을 하고, 급히 걸어갔다. ‘준영이 형을 만나야겠다. 형은 뭘 알지도 몰라.’
진영이 가버리자, 영구는 다시 회장실 문을 두드렸다.
“회장님, 이제 다음 주에 백 억과 이자 십 억을 갚아야 합니다. 이건 미룰 수가 없습니다.”
현석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생겼다.
“알고 있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태화에서 빌릴 생각이다.”
“빌려 줄까요?”
“거기는 친구니까. 빌려줄 거다. 그건 내가 처리할 문제고, 송 실장은 옥수수를 처분해. 선물, 할 줄 알지?”
“예. 그런데 손해는?”
“할 수 없어. 그냥 지금 당장 처분해.”
영구는 회장실을 나오면서 가슴 속에서 시원함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지난 몇 년 간 아리랑에 충성을 했으나, 이제는 나 자신을 위해서 한 단계 올라가야 한다는 생각 뿐이었다. 손혜정이 생각났다. 그리고 태화 투신도 생각났다. ‘재벌이 되는 거야. 멋진 와이프도 거느리고…….’
* * *
진영은 전화를 꺼내 준영에게 걸었다.
“형, 나야.”
“어, 그래.”
“형, 형 때문에 지금 회사가 난리났어.”
“알아.”
준영의 목소리는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감으로 가득차 있었다.
“대체 왜 옥수수를……. 아니 선물을 들고 나온 거야? 왜? 아버지한테 잘 보이려고?”
진영은 준영에게 따져 물었다.
“아니다. 내가 왜?”
준영은 영구가 옥수수 이야기를 꺼냈다는 것을 진영에게 말하지 않았다. 말해봐야 아무리 그래도 이건 내 책임이라는 생각이었다.
‘제기랄, 내가 미쳤지.’
“형, 그런데 지금 땅도 사야 해?”
“진영아, 이건 지금 지불해야 한다. 아니면 5 천만 원 계약금이 날아가 버려.”
“쳇, 5 천만 원 살리려고 지금 5 억 원을 써야 하는 거야?”
진영은 지금 5 천만 원 가지고 따지는 자기 자신이 서글퍼졌다. 지금 살고 있는 빌라 일 년 치 임대 비용도 5 천만 원이 넘었다. 그제야 진영은 사업하다가 넘어지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단돈 5 천만 원에 자신이 이렇게 쩔쩔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진영아, 미안하다. 그래도 회사가 설마 어떻게 되겠냐? 안 그래?”
“태평한 소리 하고 있네. 이제 태화 투신이 안 도와주면 우리는 끝장이야. 알아?”
준영은 혜정이 생각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가 도와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뭔가는 해야만 했다.
“진영아, 내가 혜정 씨를 만나볼까?”
“그만 둬. 잘못하면 일이 더 커져. 그냥 형은 조용히 있어.”
진영은 준영의 대답도 듣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진영이 전화를 끊자, 준영은 생각을 했다.
‘송 실장은 어디서 돈을 구했을까? 그것도 백 억을…….’
순간 준영의 눈 앞에 강남의 그 거리가 보였다. 자신을 막아선 네 명의 남자들. 주먹과 발로 그들을 순식간에 때려 눕히는 자신이 보였다. 그리고 장면이 바뀌어 경찰서 안. 경찰서 문이 열리며 세 명의 남자들이 들어왔다. 그 뒤에……. 준영은 머리를 쥐어짰다. 기억을 다시 더듬었다. 그 뒤에 분명히 누군가 있었다. 세 명의 남자들 뒤에 누군가…….
* * *
진태는 문을 들어서는 현석을 반갑게 맞았다.
“자네, 조금 늦었군.”
현석은 진태와 악수를 나누었고, 둘은 소파에 마주보고 앉았다.
“끝까지 버틸려고 했는데, 잘 안 되네.”
“현석아, 그거 알아?”
현석의 눈에 의문이 떠올랐다.
“아무리 재벌이네 해도, 돈이 최고야. 현금이 없으면 쓰러지는 건 시간 문제야. 자네 알잖아? 대기업들은 현금이 팍팍 들어오는 사업체를 한 두 개씩은 꼭 가지고 있는 거.”
“그런가?”
현석은 멋적게 웃었다.
“그렇지. 기업 대 기업은 어음도 쓰고 하지만, 기업 대 개인은 그런 게 없단 말이야. 개인은 모두 현금으로 지불하지. 개인이 돈을 지불하고 이용하는 사업. 그게 필요해.”
“진태야, 아리랑도 그래. 사람들이 돈 내고 밥 먹지, 그냥 먹나?”
진태는 허허허 웃었다.
“그럼 그거에 충실하지, 왜 선물을 하고 그랬나? 그리고 자네 말이야. 생각은 좋으나, 가맹점들을 전부 직영으로 돌리면, 그 자금을 어떻게 하려고 하나?”
현석은 마음을 먹고, 아랫배에 힘을 꽉 주었다. 안주머니에서 하얀 편지봉투를 꺼내 진태에게 내밀었다.
“뭔가?”
“내가 보유한 주식 증서.”
진태는 봉투를 열어 보았고, 거기에서는 열쇠가 하나 나왔다.
“은행 대여 금고 열쇠야. 거기에 내 전 재산이 들어 있네.”
진태는 빙그레 웃었다.
“자네 급했군.”
“그래. 백 오십 억만 해 줘.”
진태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이봐, 나도 당장은 그렇게 못 해.”
현석은 말없이 진태를 바라보기만 했다.
진태는 두 손을 번쩍 들더니, 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손해를 보면서라도 선물을 팔지. 아마 그럼 될 거야.”
현석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만약 못 갚으면, 이 열쇠는 내가 가진다.”
“응.”
현석은 방을 나갔고, 진태는 혜정을 불렀다.
잠시 후 혜정이 회장실로 들어왔다.
“혜정아, 오일을 전부 팔아야겠다.”
“네? 아버지, 아직 그건 때가 아닙니다. 아직 이익도 못 봤고, 더구나 한 두어 달만 기다리면 상승세를 탈 텐데…….”
“혜정아, 아리랑이 힘들다. 내가 도와주기로 했다.”
진태의 말을 들은 혜정이 팔짱을 꼈다. 그 얼굴에 찬바람이 씽씽 불었다.
“너, 진영이하고 사이가 틀어졌다고 그러는 거 아니다. 사업은 사업이고, 친구는 친구야.”
“아빠, 전 반대에요. 아니, 절대 안 되요.”
“혜정아!”
“아빠! 나는 아리랑이 쓰러지는 걸 봐야겠어요!”
혜정은 진태에게 악을 써댔다.
그런 혜정을 보면서 진태는 너무 놀랐다.
‘이거 무슨 일이 있기는 있구나. 혜정이가 이 정도일 줄이야.’
“혜정아, 아리랑이 쓰러지면 안 된다.”
진태는 차분히 말했다. 그리고 혜정에게 열쇠 하나를 보여 주었다.
“이거 은행 대여 금고 열쇠다. 여기에 이현석의 아리랑 주식이 들어 있다. 아리랑이 쓰러지면 이것들이 휴지가 된다. 그럼 우리도 쓰러져.”
그러나 혜정은 요지부동이었다.
“아빠, 돈을 안 빌려주면 되잖아요? 왜 우리까지 그런 위험을 감수해야 하나요?”
혜정의 말은 모두 맞는 말이었지만, 진태는 벌써 약속을 해버렸기 때문에,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었다.
“혜정아, 나는 남자 대 남자로서 친구에게 약속을 했다.”
진태에게서 남자라는 말이 나오자, 혜정의 눈에 핏발이 섰다.
“아빠! 그 놈의 남자! 아빠! 그 남자들이 나한테 어떻게 했는데!”
혜정은 목이 터질 듯 고함을 질렀고, 곧 본능적으로 아랫배를 감싸 안았다. 그러더니, 소파에 주저앉고 말았다.
“혜정아, 왜 그러냐? 어디 아프냐?”
그러나 혜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양손으로 자신의 배를 살살 문질렀다.
‘음, 얘가 진영이한테 완전히 데었구나. 이건 내가 잘못한 일이군.’
“혜정아, 아빠가 잘못했다. 네 결혼에 간섭하는 것이 아니었는데, 정말 미안하다. 배가 아프면 병원에 가보는 게 어떠냐?”
진태는 혜정의 속도 모르고 엉뚱한 소리를 했다.
혜정은 두 손을 배에서 얼굴로 옮긴 다음, 두 눈에 대고 가만히 있었다. 이윽고 고개를 든 혜정의 목소리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아빠, 그래. 빌려 주세요. 그 대신 그 열쇠, 저를 주세요.”
진태는 혜정에게 열쇠를 건넸고, 혜정은 열쇠를 받아 핸드백에 넣었다.
“그럼, 지금 당장 오일을 팔겠습니다. 회장님.”
혜정의 태도는 완전히 태화 투신 본부장으로 돌아가 있었다.
* * *
“젠장맞을! 이제 생각났다!”
준영은 부동산 계약서를 들고 거리에 선 채 소리를 질렀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준영을 힐끔힐끔 쳐다보았으나, 준영은 모두의 시선을 무시한 채, 제네시스로 다가갔다. 차문을 여는 그의 눈에 송영구가 떠올랐다.
‘그래, 경찰서에 송영구가 왔었지. 그리고 그놈들을 데리고 나갔어. 김상원이하고 줄이 닿았을 거야. 송영구 이 자식이 김상원이 사채를 끌어왔구나.’
영구와 상원이 모의했다는 것을 준영은 알아차렸다. 그러자 모든 것이 들어맞기 시작했다.
‘나에게 옥수수 이야기를 한 사람도 송영구야. 난 그 얘기를 아버지한테 했고……. 아버지는 나를 믿었어. 나는 송영구를 믿었고.’
준영의 이마에 힘줄이 불끈불끈 솟았다.
‘송영구, 이걸 확 갈아버려…….’
‘김상원이 이 새끼가 아직도 내 인생에 걸리적거리네.’
준영은 양 주먹을 쥐었다 폈다 반복했다. 성질 같아서는 바로 쳐들어가서 작살을 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이걸 어떻게 수습하지?’
‘그래, 그 분을 만나자.’
* * *
웅장한 고급 빌라 앞에 선 준영은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진영과 살고 있는 빌라보다 훨씬 더 좋아보였다. 경비에게 용무를 말하자, 경비는 인터콤으로 누군가를 부르더니, ‘알겠습니다.’를 반복했다. 경비가 정문을 통과시켜주자, 준영은 빌라 로비로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탔다. 7 층에 내리자 딱 한 집이 보였다. 한 층에 한 집. 정말 고급스러운 빌라였다.
“어서 와.”
진태는 준영을 반갑게 맞아들였다. 그 옆에 정화와 혜정 그리고 병승도 서 있었다. 준영은 혜정의 눈을 슬쩍 보았고, 거기서 아무런 감정도 읽을 수 없자, 바로 눈길을 돌렸다. 차마 더 이상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혜정의 얼굴을 본 준영의 심장은 두근두근거리고 있었다.
“자네, 얼굴이 빨개지네?”
“예?”
준영은 진태의 말에 양손으로 자신의 볼을 만졌다. 정말로 열이 후끈후끈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준영을 혜정이 차가운 눈으로 보고 있었다.
“준영이 형, 오랜만입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병승만이 반갑게 준영에게 인사를 했다.
“자, 우리는 서재로 가지.”
진태와 준영은 서재로 가서, 문을 닫았다.
“무슨 급한 일이지?”
“회장님, 아무래도 송영구가 수상합니다.”
준영은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냈다. 그리고 준영은 진태에게 자신이 왜 송영구와 김상원을 의심하는지에 대해서 차분히 말을 했다. 준영의 말이 끝나자, 진태는 가만히 준영을 보았다.
‘참, 괜찮은 놈인데 말이야. 이걸 키워 봐?’
“그래,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지?”
준영은 여기서 거짓을 말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좋아. 그러나 자네가 한 얘기는 모두 정황에 근거한 것들이야. 그리고 아리랑의 문제는 아직 수면 위로 나오지도 않았어. 내가 자금을 투입하면 아리랑은 살아나. 그러니 송영구니 김상원이니 하는 자들이 무슨 음모를 꾸몄다는 것 자체가 조금은 말이 안 돼. 진짜 음모라면, 벌써 아리랑에 무슨 사단이 벌어졌어야 하지. 안 그건가?”
“그건 그렇습니다.”
준영은 솔직히 인정했다. 아직 아무런 증거도 없으니까.
“이런 얘기를 누구한테 또 했지?”
“처음입니다. 저의 친부는 믿지 않을 것 같아서…….”
“잘했어. 아마 현석이는 영구를 철썩같이 믿을 거야. 영구가 아리랑을 키운 일등공신이거든. 자네 말이 맞다면, 현석이는 호랑이를 키운 셈이 되는군.”
“친부에게도 말씀을 드릴까요?”
“아니다. 이제 이 얘기는 누구에게도 하지 마. 준영이 자네가 그들을 잘 살펴봐. 나도 주시할테니.”
준영은 진태의 결정에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이 사람은 뭔가 아는 사람이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 * *
종환은 순화와 식탁에 앉아서 식사를 하다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라도 난듯이 숟가락을 놓았다.
“여보, 진영이 말이야.”
“왜요?”
“내가 한 번 보자고 할까?”
순화는 종환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았다.
“당신도 부자집에 딸 보내고 싶어요?”
“솔직히 말하면 그래. 선경이가 부자로 살면 안 되는 법이라도 있나?”
“여보, 그건 그렇지만, 옛말에 이런 말도 있잖아요.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
“그 말도 맞기는 한데, 나는 아무래도 자꾸 진영이가 생각나. 선경이가 준영이에게 더 이상 얽매이지 않으면 좋겠어.”
“나도 그래요.”
종환은 진영에게 한 번 보자고 해야겠다는 생각을 굳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