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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Gold)과 피(Blood)-36

by 윤금현

36 장.



종환은 손목 시계를 들여다 보았다. 시간은 12 시 10 분.

‘이제 올 때가 됐는데.’

식당 문을 쳐다보는 종환의 눈에 진영이 들어왔다. 종환은 손을 들어 진영에게 흔들었고, 진영은 인사를 하면서 종환에게로 걸어왔다.

“늦었습니다.”

“아니. 아직은 괜찮아.”

“들어가 봐야 되지 않습니까?”

진영의 말이 끝나자마자 아줌마가 두 명의 식사를 가져왔다.

“이 집이 설렁탕이 유명해. 괜찮지?”

“예. 저, 설렁탕 좋아합니다.”

종환과 진영은 숟가락을 들었다.

“먹으면서 얘기하지.”

“예.”

“진영이 자네가 선경이를 마음에 두고 있다고 하던데.”

진영은 이런 이야기를 예상했었지만, 막상 닥치자 뭐라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선경이도 자네를 좋아하나?”

“아니요. 아마 안 좋아할 겁니다.”

진영은 담담히 말했다.

“그럼 어떻게 한다?”

종환은 진영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저는 계속 좋아할 겁니다.”

“그런데, 세상에 여자는 많은데……. 게다가 자네는 부자집 아들 아닌가? 선경이가 끝까지 싫다고 하면 어떡하려고 그러나? 난 자네가 걱정되서 그래.”

“아버님, 선경 씨는 준영이 형을 좋아합니다. 제 생각으로는, 그 이미지를 좋아하지 않나 합니다. 어렸을 때 여동생들은 으례 오빠를 좋아하는 법이지요.”

종환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맞는 말이야.”

“저는 준영이 형과 일란성 쌍둥이입니다. 이미지는 같지요. 그리고 제가 선경 씨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 순수함 때문입니다. 저라고 여자를 안 만나 봤겠습니까?”

“순수라…….”

“아버님은 제가 어떻습니까?”

이번에는 진영이 종환에게 질문을 던졌고, 종환은 진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참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군.”

“그렇죠. 그렇지만 저, 그렇게 나쁜 놈은 아닙니다.”

종환은 숟가락을 놓았다.

“모든 건 선경이 마음에 달렸지. 난 자네를 특별히 반대할 마음은 없어.”

진영도 숟가락을 놓으며, 싱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감사합니다. 제가 잘 하겠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슨 문제?”

“선경 씨가 저를 안 만나려고 할 겁니다.”

종환은 손을 들어 계산서를 청했다.

“그건 나도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걸.”

“그래도 이렇게 저를 만나주셔서 감사합니다.”

“난 자네가 진실하기만을 바라네. 딸 가진 부모 마음이 다 그렇지.”


* * *


준영은 진영이 다시 돌려준 손목 시계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참 이 시계가 물건은 물건이군.’

“어이, 형! 나 왔어.”

진영이 카페 문을 열면서 들어왔다.

“어서 와라. 그래 잘 만났냐?”

“아버님이 참 좋으시던데…….”

“그래, 좋은 분이시지.”

“그런데 가출을 했단 말이야?”

진영은 준영의 아픈 과거를 건들었다.

“너……. 그 얘기는 하지 말자. 어떠시더냐? 아버지는?”

“좋아 보였어. 건강해 보이시던 걸. 그런데 선경이하고 어떻게 할 거냐고 물으시길래, 나는 포기 안 한다고 했어.”

“그래?”

준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니 형이 도와줘야 해. 선경이를 만나게만 해 줘.”

“야, 야. 그게 쉬운 일이냐? 끌고라도 올까?”

“차라리 그래 줬으면 좋겠어.”

준영은 손을 흔들었다.

“안 된다. 선경이한테 더 이상 상처를 줄 수는 없어.”

“그럼 어쩌란 말이야? 형이 안 도와주면 방법이 없는데.”

준영은 답답하기만 했다. 진영이와 선경이 둘 다 동생이다. 참으로 곤란한 입장에 처한 준영은 생각에 생각을 했지만,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형, 아주 고전적인 방법으로 할까?”

진영의 제안에 준영은 인상을 찌푸렸다.

“네가 생각하는 게, 어디 좋은 게 있었냐? 이 녀석아! 그래, 선경이를 데리고 호텔을 들어가? 그건 너무 심했어.”

진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알아. 내가 너무 성급했지. 그땐 그냥 그랬어. 뭔가 사고를 치면, 일이 풀릴 줄 알았거든.”

“넌 매사에 그런 식이야.”

“형, 그렇지만 혜정 씨 문제는 그렇게 해서 풀렸잖아.”

“뭐? 그건 네 문제를 나한테 떠넘긴 거잖아. 나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혜정 씨 문제는 일단 놔두고……. 아버지가 지금 태화에서 돈을 빌리려고 하잖아.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마.”

“나도 그 정도는 알고 있다.”

“형, 형이 선경이를 데리고 어디를 가 있어. 그럼 내가 우연히 지나가다가 들를께.”

준영의 눈이 커졌다. 그러더니 웃어버렸다.

“하! 하! 야, 겨우 그 생각이냐? 그래 한다는 것이, 우연을 가장한 만남을 하자고?”

“어쩔 수 없잖아. 일단 그거부터 해 보자. 도와줄 거지?”

준영은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진영이와 선경이, 둘 사이를 화해시키는 것이 급선무였으니까.

“좋아. 그럼 다음 주에나 내가 자리를 만들지. 어디 야외라도 놀러 가자고 해서, 그 다음 네가 거기를 오는 거야. 참, 혼자 오지 말고 친구들 몇 데리고 와라. 그래야 얘기가 되지? 안 그러냐?”

진영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고마워.”

그 순간 준영의 머리에 퍼뜩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송영구 실장 어떠냐?”

“왜?”

“너 그 사람 믿냐?”

“왜 그러냐니까?”

“실은 옥수수를 사라고 한 사람이 송영구 실장이야. 나한테 그 정보를 주었지. 그래서 내가 회장님한테 알렸고. 회장님, 아니 아버지는 나한테 뭔가를 해 주고 싶었나 봐. 그래서 아무 것도 안 알아보고, 그냥 내 말을 들어주셨고.”

“얘기가 그렇게 된 거였어? 송 실장이…….”

진영의 얼굴이 근심스런 표정으로 바뀌었다.

“아버지는 송 실장을 완전히 믿으시는데…….”

“너, 아버지한테 물어봐라. 사채를 누구한테 빌렸는지?”

“그건 또 왜?”

“응, 내가 느낌이 이상해서 그래. 너, 내가 예전에 사채업 했다는 거 알지?”

진영의 얼굴이 점점 심각해졌다.

“사채업자들은 말이야, 절대 못 믿어. 잘못하면 회사가 넘어갈 수도 있다.”

“알았어. 내가 아버지한테 물어볼께.”

이 말을 끝으로 진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진태는 스마트폰을 들어 전화를 걸었다.

“현석아, 나다.”

“어떻게 됐냐?”

“방금 백 오십 억 보냈다. 일단 불을 끄고, 그 다음에 해결하자.”

“정말 고맙다. 정말 고마워.”

진태는 전화를 끊은 다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여보, 혜정이는 뭐하고 있지?”

“지금 자기 방에 틀어박혀서 꼼짝도 안 해요.”

“걱정 되는군. 당신이 잘 해 줘. 여자들끼리는 통하는 게 있잖아.”

“알겠어요. 참, 여보, 아리랑 도와주는 거에요?”

“벌써 송금했어. 그 문제는 나한테 맡겨 줘. 걱정 마. 태화가 그렇게 쉬운 회사가 아니야.”

진태의 말투는 너무나 진지했지만, 정화는 그래도 걱정을 완전히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전화를 끊은 정화는 혜정의 방으로 갔다. 문을 두드린 다음 살짝 열었다.

혜정은 침대에 누워 있었다.

“얘, 어디 아프니?”

그 순간 혜정이 우엑 하는 소리를 지르며, 방에 딸린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고, 정화는 바로 눈치를 챘다. 얼른 혜정에게로 달려간 정화는 혜정을 잡은 다음, 등을 살살 쓰다듬었다.

혜정은 변기에 나오지도 않는 토악질을 몇 번 하더니, 엄마의 손을 꽉 잡았다.

“너, 애기 생겼구나.”

혜정은 정화의 얼굴을 보더니, 살짝 웃어 보였다.

“엄마도 나 가질 때, 이랬어?”

“그럼. 아마 너도 나를 닮았으면 입덧이 좀 있을 거야.”

정화는 혜정을 부축하여 침대에 눕혔다.

“엄마, 이제 두 달 되었어.”

“그렇구나. 우리 딸이 이제 엄마가 되는 거네. 여자는 엄마가 되면서 달라진단다.”

“어떻게?”

“세상에 무서운 것이 없어지거든. 호호호.”

혜정은 다시 정화에게 웃어 보였다. 정화의 말이 혜정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었다.

“아이 아빠는 누구니?”

“엄마, 아직은 비밀이야.”

“진영이는 아니구나?”

“엄마, 나 믿지?”

혜정은 정화에게 의지하고 싶어졌다.

“그럼. 믿지.”

“엄마는 내가 결혼도 안 하고, 임신부터 해서 기분 나쁘지 않아?”

“어쩌겠냐? 결혼하고 했으면 더 좋았겠지만, 이왕 벌어진 일이니, 해결을 잘 해야지.”

“나, 낳을 거야.”

혜정의 눈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나, 낳아서…….”

그 다음 말을 혜정은 꿀꺽 삼켜 버렸다. 차마 무서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아빠한테는 비밀로 해 줄까?”

“그래 줘. 엄마, 고마워.”

정화는 혜정의 눈을 감긴 다음, 양 볼을 쓰다듬었다. 애기 때 이후로 이렇게 해 본 적이 언제였던지 이제 기억도 안 났지만, 양 볼의 감촉만은 그때와 똑같았다.

“한숨 자거라. 저녁 먹을 때 깨울께.”

정화는 혜정의 숨소리를 한참동안 듣다가 살며시 방을 나갔다.


* * *


현석은 진태가 보내준 돈에서, 백 십 억을 수표로 인출했다. 회사로 가지고 온 수표를 봉투에 넣은 다음, 윗면을 테이프로 봉했다. 그 다음 그 봉투를 다시 조금 더 큰 봉투에 넣은 다음, 역시 윗면을 봉했다. 그걸 현석은 책꽂이 아래 서랍장에 부착되어 있는 금고에 넣었다.

현석은 준영에게 땅 값 4 억 5 천 만원을 송금한 다음, 전화를 걸어 처리하라고 했고, 준영은 바로 처리하겠다고 했다. 현석은 일단 이걸로 한시름 놓았다.

“이제 주식을 팔아야겠군. 손해를 보더라도 어쩔 수가 없어.”

모니터를 바라보면서 현석은 중얼거렸다.


* * *


“소희 씨, 오늘 정말 예쁜데…….”

“칫, 왜? 뽀뽀가 하고 싶어?”

소희의 말에 병승의 얼굴이 빨개졌다.

“아니. 그런 건 아니야.”

“호호, 난 해줄라 그랬는데…….”

병승은 깜짝 놀라며, 소희를 쳐다보았고, 소희는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병승은 용기를 내어 소희의 얼굴 가까이 자기의 얼굴을 가져갔으나, 소희는 뒤로 물러나 버렸다.

“버스 갔네요.”

“휴우.”

“병승 씨, 요새 무슨 일 있어? 어째 분위기가 이상해.”

“집이 좀 복잡해.”

소희는 조수석에서 병승의 운전석 쪽으로 돌아앉았다.

“나한테 말해 봐. 내가 도와줄께.”

“그게……. 말해도 소용없어. 누나 일이거든.”

“언니가? 남자 문제구나.”

“야, 귀신이다. 어떻게 알았어?”

“남자는 여자한테 문제를 가져오는 존재지. 난 그걸 아주 잘 알거든.”

“그럼 나도?”

“몰라.”

병승은 소희의 손을 잡았다.

“누나가 걱정이야. 진영이 형하고 완전히 끝났나봐.”

“어째야 쓰까?”

소희도 혜정이 걱정되었다. 그 성격을 미루어 짐작하건데, 보통 일이 아닌 게 분명했다.

“우리 어디 가서 저녁 먹을까?”

소희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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