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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Gold)과 피(Blood)-37

by 윤금현

37 장.



송영구와 이현석은 마주보고 소파에 앉았다. 현석이 영구에게 수표 한 장을 건넸다.

“이걸로 사채를 갚아. 백 십 억이야.”

영구는 수표를 들어 금액을 확인했다.

“회장님, 힘드셨지요?”

영구의 말에 현석은 씁스레 웃었다.

“진태가 도와준 덕분에 해결할 수 있었어.”

“네, 그러셨군요.”

영구는 속으로 ‘이건 낭팬걸.’ 이라고 생각했다. 이걸 못 갚아야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아리랑이 흔들려야 했는데, 영구의 계획대로 일이 진행이 되지 않는다. 그러면 다음 계획을…….

현석은 자리에서 일어났고, 영구는 인사를 하고 방을 나갔다.

영구가 나가자마자, 영구와 엇갈려서 진영이 현석의 방으로 들어왔다.

“어? 네가 갑자기……. 무슨 일이냐?

현석의 말에 진영은 서둘러 온 듯 숨을 가쁘게 내쉬었다.

“아버지, 사채를 어디에서 빌렸습니까?”

“왜? 나도 잘 모른다. 그건 송 실장이 알아서 구해온 거니까.”

진영의 양 눈썹이 올라갔다.

“준영이 형이 이상한 얘기를 해서…….”

“왜? 준영이가 뭐라 하던?”

“네. 준영이 형이 예전에 사채업에서 일했잖아요. 혹시 그 회사가 아닌가 해서요.”

현석은 책상 뒤로 돌아가 자기 의자에 앉았다.

“상관없다. 방금 송 실장에게 전액 갚으라고 수표를 줬다. 다 끝났어. 아무런 문제도 없다.”

진영의 얼굴에 밝은 빛이 떠올랐다.

“아, 그러셨군요. 갚았으면 된 거지요.”

“준영이에게 아무 걱정말라고 해라. 앞으로 더 열심히 일해서, 이제 태화 투신에 갚아야 한다.”

“알겠습니다.”

진영은 현석에게 인사를 하고 방을 나갔다.


* * *


영구는 지하 주차장의 차 안에 앉아서 전화를 걸었다.

“부장님, 송영구입니다.”

전화기 너머에서 반가운 기색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가지고 있습니다. 보낼까요?”

영구는 상원의 성격을 떠볼 요량으로 미끼를 던졌다.

“그렇지요. 아직 삼 일 정도 남았습니다.”

영구의 얼굴 표정이 편안해졌다.

“부장님, 백 십 억이라면 적은 돈이 아닙니다. 이걸 가지고 둘이 한 번 해볼까요? 책임은 공동으로 지는 걸로 하고. 이득도 반반씩 나누기로 하고. 어떻습니까?”

전화기에서 상원의 장황한 말이 이어졌다. 그러나 영구는 묵묵히 상원의 말을 들었다.

“좋습니다. 그럼 거래가 성립되었습니다. 제가 5 십 5 억을 부장님 계좌로 보내겠습니다.”

영구는 전화를 끊고,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걸로 총알은 재어졌다. 이제 언제 쏘느냐 하는 것만 남았다.


* * *


준영은 과천 서울대공원으로 선경을 불렀고, 선경은 나간다고 했다. 그래서 준영은 이른 점심을 먹고 서울대공원 지하철 역을 나와, 대공원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서 있었다. 2 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10 분이 지났으나, 아직 선경은 오지 않았다. 준영은 전화를 꺼내 선경에게 전화를 했고, 선경이 바로 전화를 받았다.

“야, 지금 기다리고 있는데……. 어디까지 왔냐?”

“오빠, 급하기도 해라. 나 도착했어.”

“그런데 왜 안 와?”

“화장실이야. 급하게 오느라……. 지금 말 시키지 마.”

뚝 하고 전화가 끊겼다. 그리고 다시 십 여 분이 지나자 선경이 화난 얼굴로 지하철역 계단을 올라왔다.

“왜 보자고 했어? 오늘 다행히 수업이 없어서 망정이지, 안 그랬음 못 나왔어.”

“선경아, 학교 방학 안 하냐?”

“응, 아직 두 주 정도 더 해야 해. 근데 왜 보자고 했어?”

“어, 아니. 오늘 그냥 너하고 놀려고. 그동안 고생했으니, 마음도 좀 풀어주고 그러려고 불렀지.”

선경은 준영의 말에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준영에게 옛날처럼 팔짱을 낄 마음은 나지 않았고, 준영도 그런 선경의 변화를 눈치챘다. 둘은 약간의 거리를 두고 대공원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저기서 코끼리 열차를 탈까? 아니면 거 뭐냐? 위로 가는 거 있잖아.”

“리프트.”

“그래, 맞다. 그걸 탈까?”

선경은 준영을 돌아보더니, 찬찬히 얼굴을 보았다.

“뭔가 수상해. 우리 걸어가.”

“야! 거기까지 걸어가려면 상당한데.”

“멀쩡한 두 다리가 있는데, 뭐 어때서? 가자.”

선경은 앞장서서 걸었고, 준영은 뒤를 따라갔다. 그렇게 둘은 대공원으로 걷다가 동물원을 만났고, 계획을 바꾸어 동물원 구경을 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준영의 계획대로였다. 입장권을 산 준영은 선경을 데리고 동물원으로 들어갔고, 진영은 미리 와서 준비하고 있었다. 준영과 선경이 입장하는 것을 저 멀리서 보고 있던 진영도 서둘러 표를 사서 동물원 안으로 들어갔다.

“선경아, 저기서 뭐라도 먹을까?”

준영은 선경을 데리고 동물원 내에 있는 자그마한 카페로 들어갔고, 둘은 거기서 커피를 주문하여 마시기로 했다.

“형!”

선경은 낯익은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고, 거기서 진영을 보았다. 순간 선경의 얼굴이 복잡미묘해졌다. 선경은 준영을 보고, 다시 진영을 보았다. 내가 좋아하는 남자, 나를 좋아하는 남자. 똑같이 생긴 두 남자. 두 남자가 선경의 시선에 들어와 있었다.

‘짰구나.’

선경은 금방 눈치를 챘다.

진영이 천천히 선경에게로 다가왔다.

“선경아, 그때는…….”

“말 하지 마.”

“정말로 미안했어. 난 지금도…….”

“말 하지 마.”

“널 좋아해. 아니, 사랑해.”

진영의 사랑한다는 말에 선경은 당혹스러웠다. 옆에는 준영이 이 모든 것을 보고 있었다. 준영은 둘에게 와서 커피를 내밀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석 잔을 들고 있었다.

“저기 앉자.”

할 수 없이 선경은 두 오빠들을 따라 자리를 잡았다.

“선경아, 너는 남자의 마음도 모르냐? 진영이가 널 얼마나 생각하는데…….”

선경이 얼굴을 들었고, 그 눈빛은 준영을 찌를 것만 같았다.

“그러면, 좋아하면 그렇게 해도 돼?”

“우리 천천히 다시 시작하면 안 될까?”

진영이 선경에게 말을 했다.


* * *


종환은 신발을 벗고 거실로 올라왔고, 그런 종환을 순화가 맞았다.

“여보, 피곤해요?”

“아니. 난 괜찮아. 선경이는 좀 어때?”

“그런대로 괜찮아요. 오늘 준영이 만나서 저녁 먹고 온데요.”

“그래?”

종환은 종환대로, 순화는 순화대로 준영과 선경에 대한 걱정이 마음 속에 가득 차 있었다.

“준영이는 일을 잘 하고 있을까?”

종환이 말을 하자, 순화는 식탁을 차리다 말고 종환을 보았다.

“잘 하고 있을 거에요. 준영이가 일은 잘 하잖아요. 난 오히려 선경이가 걱정돼요.”

“그렇지. 나도 그래.”

종환과 순화는 식탁에 앉아 저녁을 먹기 시작했다. 달그락거리는 그릇 소리만 났다.


* * *


준영과 진영 그리고 선경은 강남의 어느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셋은 맥주를 주문하고, 가장 안쪽에 있는 칸막이가 쳐져 있는 룸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웨이터가 병맥주 다섯 병과 과일 안주 한 접시를 가지고 왔다.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웨이터는 힘차게 인사하고 룸을 나갔다.

“선경아, 아직도 마음이 안 풀어지냐?”

준영은 선경에게 미안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래. 그날 내가 얼마나 놀란 줄 알아?”

“선경아, 솔직히 말하자. 너 그날 각오하고 호텔에 간 거 아니었어?”

준영은 선경을 몰아세웠다.

“아니. 난 방에는 따라갔지만, 설마 오빠가 나를 어떻게 할 거라고는 생각 안 했어.”

“그럼?”

“난 손만 잡고 잘 줄 알았어. 그리고 그러려고 따라간 거야.”

선경은 준영에게 쏘아붙였고, 준영은 선경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선경아, 실은 말이야. 나도 그냥 손만 잡고 자려고 한 거야. 믿어 줘.”

진영은 선경에게 사정을 했고, 선경은 그런 진영을 째려보았다.

“흥! 말도 안 돼. 뭐? 손만 잡고 잔다고?”

선경은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그러나 진영은 포기하지 않았다.

“진짜야. 만약 아니었다면, 네가 방을 나갈 때, 왜 내가 가만히 있었겠어? 힘으로라도 어떻게 하려고 했겠지? 안 그래?”

이제 진영은 대화의 주도권을 잡은 것 같았다.

그리고 선경은 자신이 방을 나갈 때, 진영이 가만히 있던 장면을 떠올려 보았다. 정말 그랬다. 진영은 너무나 나약하게 아무 것도 하지 못했었다.

‘그런가?’

선경의 마음이 살짝 흔들렸으나, 선경은 다시 마음을 잡았다.

“그래도 안 돼. 난 용서가 안 돼.”

선경은 고개를 돌리다가 준영의 손을 보았다. 선경이 준 시계가 준영의 손목에 채워져 있었다.

‘어? 시계가 있네?’

“오빠, 시계.”

선경의 말에 준영은 시계를 보았다.

“아, 그거, 내가 다시 돌려줬어. 원래 주인에게로.”

진영이 선경에게 설명을 했다.

“오빠들, 이제 시간도 늦었고. 나는 집으로 갈래. 두 분이서 마시다 와.”

선경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준영과 진영도 황급히 따라 일어났다.

“선경아, 집에 데려다줄께.”

준영과 진영은 선경을 데리고 택시를 탔고, 선경이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 다음, 둘은 둘만이 사는 빌라로 발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