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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Gold)과 피(Blood)-41

by 윤금현

41 장.



빌라의 침대에서 눈을 뜬 준영은 잠시 혼돈에 빠졌다. 어젯밤에 무슨 꿈을 꾼 것 같기도 했다. 아주 길고도 슬픈 꿈. 천천히 몸을 일으킨 준영은 진영의 방으로 가 보았다. 비어 있는 침대. 현실감이 돌아왔다. 지금 진영은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선경이 진영을 지키고 있다.


외출 준비를 마친 준영은 진영의 옷장을 열었다. 옷들을 주욱 둘러 본 준영은 진영이 가장 잘 입던 차림을 하기로 했다. 하얀색 와이셔츠에 파란색 타이를 맨 준영은 위 아래 진한 회색 수트를 걸쳤다. 전신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았다. 진영처럼 몇 가지 제스처도 취해 본 준영은 목을 가다듬으며, 진영처럼 말해 보았다. 준영의 폰은 선경이 가지고 있었다. 화장대 위에 놓인 진영의 폰을 집어든 준영은 앞뒤로 살펴보았다. 별 이상은 없어 보인다. 바지 주머니에 넣고 나서 툭툭 두드려 보았다. 진영의 지갑까지 챙긴 준영은 자동차 열쇠를 서랍에서 꺼냈다.


태화 투자 신탁 회사 본사 건물 앞에 선 준영은 꼭대기층을 올려다 보았다. 저기에 손혜정이 있는 것이다. 준영은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본부장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비서의 전갈에 손혜정은 고개를 갸웃했다. 누굴까?

문이 열리며 준영이 들어오자, 혜정의 얼굴이 곧바로 굳어지고 말았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혜정은 책상을 돌아, 준영의 앞으로 다가갔다. 병실에 누워있을 때는 몰랐지만, 이제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준영을 보니, 그날 밤 호텔에서의 일이 생각났다. 이 비열한 인간! 혜정의 손이 살짝 들리더니 파르르 떨렸다.

“혜정 씨, 나를 때리고 싶어?”

“그래. 진영 씨. 너를 때리고 싶어.”

준영은 살짝 웃었다.

“맘대로. 그렇게 해서 마음이 풀린다면…….”

혜정은 들었던 손을 다시 내렸다.

“아니. 진영 씨는 때릴 가치도 없는 사람이야.”

준영은 바로 앞에 있는 이 여인이 자신의 아이를 가진 여자라는 사실을 깨닫자, 흠칫 놀랐다.

‘정말 대단한 여자야. 그런 일을 겪고도…….’

“혜정 씨, 그 일은 정말로 내가 잘못했어. 난 용서를 바라지도 않아. 하지만 준영이 형은 아무 잘못도 없어. 다 내가 꾸민 일이니까.”

“흥! 그걸 말이라고 해? …….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준영 씨도 동의한 거 아냐? 날 둘이서 속이기로…….”

“형은 혜정 씨를 좋아했어. 아마 지금도 좋아할 거야. 비록 병실에 누워 있기는 하지만…….”

준영은 이순간 만큼은 자신의 본심을 말하고 있었다.

혜정은 준영의 말을 듣자마자, 휙 돌아서 소파로 갔다.

“앉아. 용건은 들어볼께.”

준영은 혜정의 맞은 편에 앉았다.

“송영구 실장이 수상해.”

순간 혜정의 눈빛이 변하며, 입술이 일그러졌다.

“병원에서 말했지? 송영구와 김상원이 아는 사이일 거라는 거.”

“김상원이 누군데?”

“준영이 형이 일했던 사채업 부장. 그리고 태원 새마을 금고 이사장 아들. 거친 놈들이지.”

준영은 아주 나쁜 놈들이라는 말을 돌려서 말했다.

“그래서?”

“아버지가 돈을 빌린 데가 바로 태원이거든. 중간에 송영구 실장이 개입되어 있어. 아버지 돈 심부름을 그 사람이 했어. 갚기는 했지만, 난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찜찜해.”

준영의 말이 끝났지만, 혜정은 입을 열지 않았다.

“혜정 씨가 도와주면 좋겠어.”

“어떻게?”

준영은 고개를 떨구었다가, 다시 들었다. 망설이는 표정이었다.

“내가 도와줄 거라 생각해?”

혜정의 얼굴은 차디차다 못해, 냉기가 흘렀다.

그러나 준영은 애써 혜정의 얼굴을 무시했다.

“구체적으로 뭘 도와달라는 건지 나도 생각이 안 나. 무작정 찾아온 거야. 그래도 내 편이 하나라도 있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진영 씨, 아무 생각이 없구나. 날 찾아와서 한다는 말이 고작 그거야?”

“예전에 형이 김상원 하고 안 좋은 일이 있었데. 그래서 그 조직에서 나온 거고. 또 강남에서 싸운 적도 있잖아. 내 생각에는 그것 때문에 보복한 걸 거야. 병원에 있는 준영이 형한테, 또 찾아가지는 않겠지만, 그자들이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르겠어.”

준영의 말을 듣고, 혜정은 속으로 생각했다.

‘진영 씨도 전혀 내막을 모르는구나. 너희 형제들이 나를 속여서, 내가 지금 복수하는 거야.’

“그래서 어떻게 하려고?”

혜정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준영을 불쌍한 눈으로 보았다.

“솔직히 말해서……. 잘 모르겠어.”

준영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럼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네? 안 그래?”

준영은 혜정의 말에 고개만 끄덕거렸다.

‘실은 진영이와 당신을 화해시키고 싶었는데…….’


* * *


“오빠, 어디 고개 좀 들어 봐.”

선경은 진영의 얼굴을 살짝 든 다음, 베개를 고쳐 주었다. 진영의 입에서 으으 하는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오빠? 아파?”

이제 얼굴의 붕대는 풀었고, 머리에만 붕대를 감고 있는 진영은 아직 말을 제대로 못했다. 그러나 그 눈은 선경만을 보고 있었다.

선경은 진영의 눈을 본 다음, 진영의 오른팔을 살살 주무르기 시작했다. 의사가 혈액 순환을 위하여, 마사지를 하라고 했었기 때문에, 선경은 날마다 오전, 오후로 진영의 팔과 다리를 주물렀다. 특히 마비가 된 오른쪽을 정성껏 만져 주었다. 선경이 몸을 만지면 진영은 두 눈을 감고 조용히 숨을 쉬다가, 그대로 잠이 들곤 했다. 선경이 오른팔을 마치고, 오른 다리를 주무르기 시작할 때, 병실 문이 열리며 미현이 들어왔다.

“어머님!”

선경이 일어서자, 미현은, “아니, 그대로 있어요.” 라고 말하며 선경을 다시 앉혔다.

“잠이 들었어?”

미현은 진영의 얼굴을 찬찬히 보더니, 침대 발치에 있는 소파에 가서 앉았다.

“아가씨가 고생이 많아. 고마워.”

“아니에요. 오빠인걸요.”

미현은 손수건을 꺼내 눈을 눌렀다.

“이제 많이 좋아지고 있어요. 사람을 알아보는 것 같기도 해요. 절 보면 눈에 웃음이 보이기도 하구요.”

미현의 얼굴에 살짝 미소가 어렸다. 미현은 소파 옆에 내려놓았던 과일 주스 상자에서 캔을 한 개 꺼내 선경에게 내밀었다.

“이거라도 먹으면서…….”

“감사합니다.”

“준영이 빨리 나아야, 농업 회사 일이 진행될 텐데…….”

“아, 그거?”

“아가씨도 알아?”

선경은 진영의 발목까지 주무른 다음, 미현의 곁으로 왔다.

“그럼요. 오빠가 얼마나 좋아했는데요.”

미현과 선경은 준영의 과거와 미래에 대하여 오손도손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 * *


영구는 현석의 앞에 서류 더미를 내려놓았다.

“회장님, 이것으로 약 팔십 퍼센트의 사람들이 직원으로 정식 계약을 했으며, 나머지 이십 퍼센트는 입사 후, 바로 퇴사로 처리했습니다. 그리고 퇴직금은 아니지만, 일종의 명예퇴직으로 처리해서 개인 당, 천만 원씩 지급했습니다. 이 금액이 대략 백 억 정도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천 명 정도는 퇴직을 한 셈이고, 나머지 사 천 여 명이 정직원이 되었습니다. 가맹점은 천 백 두 개 그대로 있습니다. 한 곳 당 평균 다섯 명이 근무했는데, 이제 네 명으로 줄었습니다.”

현석은 서류에서 고개를 들어 영구를 보았다.

“잘 했어. 이걸로 일단락 되었군.”

현석은 만족스런 표정이었으나, 영구는 그렇지가 않았다.

“회장님, 이제 회사의 잔고가 거의 없습니다. 이제 정말로 매월 들어오는 매출로 직원들 월급을 주어야 합니다. 잘못하면 부도가 날 수도 있습니다.”

“걱정 마. 일단 사채 백 십 억은 모두 갚았잖는가? 은행은 그동안 발행했던 어음들이 돌아오는 대로 막기로 하면 될 거야. 정 힘들면 내가 은행장들을 만나러 가는 수밖에.”

“예.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영구는 현석에게 인사를 하고 회장실을 나왔다. 복도에서 잠시 생각에 잠긴 영구는 양복 안주머니를 만져 보았다. 거기에 5 십 5 억 짜리 수표가 한 장 들어있는 것이다. 영구는 이걸 은행에 예금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항상 몸에 붙여 두어야만 안심이 되었다. 입술을 꽉 다문 채 영구는 스마트폰을 꺼냈다.


* * *


상원과 영구는 아주 근사한 인테리어가 된 레스토랑에서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부장님, 저녁은 제가 살 테니, 부담없이 주문하세요.”

“하하, 별 말씀을……. 우리는 얻어 먹고는 못 사는 사람들이라서……. 핫핫핫.”

상원은 웨이터를 부르더니, 가장 비싼 양식 코스 요리 2 인분을 주문했다.

“거, 뭐냐? 와인도 한 병 갖고 와. 샤또 들어가는 걸로…….”

샤또는 불어로 포도원이라는 뜻이므로, 샤또가 들어가는 와인은 천 가지가 넘는다. 그러나 영구는 상원에게 잘난 체를 하지 않았다. 그런 거야 아무 상관도 없으니까.

식사가 진행되면서, 분위기는 한층 좋아졌다.

“실장님, 그러니까 지금 아리랑이 총알이 다 떨어졌다 이 말씀이군요. 하하하.”

“그렇습니다. 어디 한 군데에서 삐끗하면 바로 부도가 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실장님, 그때 실장님이 회사를 접수하는 겁니까?”

상원의 말에 영구는 당혹스러워졌다.

‘이 사람한테 자세한 얘기는 하면 안 되겠다.’

“실장님, 그런데 아리랑은 어디서 그렇게 돈을 잘 빌릴 수가 있었습니까? 우리한테 백 억이 넘는 돈을 그렇게 쉽게 갚다니, 참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우리한테 빌렸다가 망한 회사가 어디 한 둘입니까?”

“아, 그거요? 실은 이현석 회장 친구가 손진태라고……. 태화 투신 회장입니다.”

상원의 눈이 왕방울만해졌다.

“오? 그래요? 저도 거기 이름은 알고 있습니다만……. 그랬군요.”

이번에는 영구의 눈이 커졌다.

“어떻게 알고 계십니까?”

“저희 아버님이 그 회사를 욕심내셨거든요. 그래서 좀 조사해 본 적이 있습니다.”

“아? 그렇군요.”

상원의 눈이 가늘어지며, 몸을 앞으로 숙이더니, 영구에게 귓속말을 하는 것처럼 작은 소리로 말했다.

“실은 우리 자본금이 일본에서 왔습니다. 제 아버님 이름 끝자가 ‘원(源)’이고, 제 이름 끝자도 같지 않습니까? 원(源)이란 글자가 일본에서는 아주 큰 의미가 있습니다.”

영구가 호기심이 잔뜩 동한 표정을 지었다.

“남들은 친일파네 뭐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국민들이 똑똑했으면, 나라가 망했겠습니까? 다 자기들이 잘못한 일인데, 애꿎은 친일파네 뭐네 하면서 우리만 괴롭히고 있습니다. 우리도 다 나라를 위해서 한 일인데 말입니다. 아, 까놓고 말해서, 일본이 우리한테 얼마나 많은 투자를 했습니까? 철도도 놓고, 학교도 세우고……. 전, 사람들이 웃기다 이겁니다.”

“아, 그렇군요.”

영구는 상원에게 맞장구를 쳐 주었다.

“일본은 전통적으로, 존경하는 사람의 이름 글자를 따서 자기 이름을 짓는 그런 게 있습니다. 우리 집안은 ‘원’이라는 글자를 대대로 사용하기로 한 거지요. 전 이런 게 마음에 듭니다.”

"전통이라……. 그런 것이 있었군요."

“그러면, 태화 투신이 뭐랄까, 아리랑을 뒤에서 봐주고 있습니까?”

영구는 고개만 끄덕이더니, 와인 잔을 들어 상원에게 건배를 청했다.

상원은 잔을 부딪친 후, 훌쩍 마셔 버렸다.

“실장님, 어디 좋은 데, 2 차 가실까요?”

영구는 상원에게 빙그레 웃어 보였다.


* * *


“야, 오랜만에 다들 모였네.”

진태는 식탁에 혜정과 병승이 오자, 아주 기분이 좋아보였다.

“당신은……. 지금 이 회장네는 초상집인데……. 그런 말이 나와요?”

정화는 진태에게 핀잔을 주었으나 , 진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 정도면 된 거야. 아마 진영이도 금방 회복될 텐데…….”

다들 식탁에 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그런데, 아빠?”

“왜 그러냐?”

진태는 아들 병승을 보았다.

“소희 말이에요.”

“왜? 무슨 일 있냐?”

정화가 병승에게 말을 했다.

“아니, 엄마. 이제 결혼 이야기를 해야 하지 않나 해서요.”

혜정이 고개를 들어 병승을 보았다.

“아빠, 제가 보기에도 소희는 괜찮아요. 저는 찬성.”

진태와 정화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