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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Gold)과 피(Blood)-45

by 윤금현

45 장.



영구는 술병에 남아 있는 양주를 보았다. 그리고 혜정의 얼굴을 보았다.

“저는 안 마실래요.”

“그럼, 이만 가시죠.”

영구는 일어나서 계산을 하러 갔고, 혜정은 핸드백에서 손거울을 꺼내 화장을 살폈다. 이제 임신 4 개월이 되었지만, 그리 살도 찌지 않았고, 배도 눈에 띠게 나오지 않았다. 꽉 끼는 옷만 입지 않으면 아무도 임산부라고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거울 속의 혜정은 알 수 없는 미묘한 감정으로 가득 차 보였다.


“잠깐만.”

혜정은 심야 약국 앞에서 걸음을 멈췄고, 영구는 의아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뭘 좀 살게 있어요.”

혜정의 말에 영구는 느끼한 웃음을 지었다.

“그거는 필요 없지 않나요?”

혜정은 영구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송 실장님은 여자에 대한 배려가 없으시군요. 저와 결혼하려면, 앞으로 더 배워야겠습니다.”

혜정의 말은 영구를 완전히 무시하는 듯했으나, 영구는 이미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찬란한 미래가 저 앞에서 자기를 부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방문을 연 다음, 카드키를 꽂자 방안에 환하게 전등이 켜졌다. 영구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면서 안으로 걸어 들어가 냉장고를 열었다. 생수를 꺼내서 한 모금 시원하게 마셨다.

혜정이 천천히 걸어 들어와 침대에 걸터 앉았다.

영구는 그런 혜정을 내려다보면서 윗도리를 벗었다.

혜정은 손을 뻗어 메인 스위치를 눌렀고, 그러자 방 안 전체 전등이 모두 꺼졌다. 그래도 창문으로 밖의 휘황찬란한 네온사인 불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영구는 혜정의 옆에 앉더니, 혜정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천천히 혜정을 침대에 눕혔다.


* * *


종환이 병실에 들어왔다. 선경은 아버지를 보고 환하게 웃어 보였다.

“어떠냐? 준영이는?”

“좋아졌어요. 이제는 왼쪽은 손이랑 발이랑 움직여져요. 오른쪽은 아직 아니지만…….”

“네가 고생이 많다.”

종환은 침대에 누워 있는 진영을 보았고, 진영은 눈으로 인사를 했다.

“엄마는?”

“왔다 가셨어요.”

종환은 선경의 어깨를 토닥거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은 엄마더러 여기 있으라고 해야겠다. 너도 집에서 좀 쉬어야지.”

종환의 말에 선경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아빠, 제가 하던 거 그냥 하게 해주세요.”

선경은 행여나 종환이나 순화가 진영을 알아챌까봐 걱정이 되었다. 당분간은 이 모든 게 비밀이어야만 했으니까. 이제 준영과 혜정이 일을 수습할 때까지 이 방은 자기가 지켜야만 한다.

“그럴래? 그래라.”

종환은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고, 병실을 나갔다.


* * *


“소희 씨, 난 여기가 좋아요.”

병승의 말에 소희는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보이는 거라곤 푸른 잔디 뿐이었다.

“여기가 뭐가 좋아요?”

“여기는 사람들이 자기 의견을 말하는 곳이잖아요. 난 그런 민주주의가 좋아요.”

병승의 말에 소희는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러고 보니 그렇네요. 여기 서울시청 앞이랑 저기 광화문 거리랑…….”

“난 요새 가끔씩 권력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생각해 보곤 합니다.”

소희의 눈이 반짝거렸다.

“말해봐요. 병승 씨.”

소희는 병승의 팔짱을 끼고, 병승을 이순신 장군 동상 쪽으로 이끌었다.

“저기 저 사람은 우리나라를 국난에서 구했지만, 결국 임금과의 뭐랄까, 앞으로 일어날 사태, 아니면 임금의 눈에서 벗어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등등, 뭐 그런 거 때문에 죽었다고도 합니다.”

병승의 말에 소희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오호, 그래요? 그런데 그거는 증명된 게 아니잖아요?”

병승은 소희를 보며 즐겁게 웃었다.

“화가들도 그런 게 많아요. 옛날 대부분의 화가들은 먹고 살기 위해서, 부자들의 그림을 그렸답니다. 그림이 마음에 들면 돈을 많이 주었고, 그러면 더 많은 주문이 들어오곤 했지요. 지금은 사진이 있으니, 그림이 인기가 없지만, 옛날에는 자기 얼굴을 남기려면, 화가한테 의뢰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부자들의 마음에 안 드는 그림을 그리면 밥 먹고 살기가 힘들었지요.”

“그거랑 민주주의랑 무슨 관계가 있어요?”

“지금 우리의 민주주의 역시 화가와 부자와의 관계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화가는 우리이고, 부자는 권력을 가진 자들.”

“호, 듣고 보니 그럴 듯해요. 병승 씨도 생각이 있군요.”

“그래서 요새 고민이 많아요. 그림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은데……. 그렇다고 아버지 사업을 포기할 수도 없고……. 나도 만약 결혼이라는 걸 하게 되면, 이제 생활을 해야 하니까…….”

소희는 병승에게 몸을 꼬옥 밀착시켰다.

“이런 사업은 어때요?”

병승은 소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소희의 두 눈에서 별빛이 반짝거렸다.

다시 하늘에서 눈송이가 떨어져 내렸다.

“집을 초기자본 없이 살 수 있게 해 줘요. 이제 막 사회에 진출한 젊은 사람들에게.”

병승의 눈에 알 수 없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이제 막 취직을 한 젊은 사람이 집을 계약하면, 병승 씨 회사에서 집 대금을 지불하는 거에요.”

“그 다음은?”

“그 사람이 일해서 집 대금을 갚으면 되지요.”

병승은 아직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자, 들어봐요. 돈을 모아서 집을 사려면, 일단 시간이 많이 걸리죠. 그리고 그 동안은 월세를 살아야 하는데, 그러면 월세 비용이 꾸준히 나가게 되요. 게다가 이사도 다녀야 하고.”

“…….”

“만약, 자기 집이라면 월세도 안 나가고, 이사도 안 다니게 되지요. 얼마나 좋아요?”

“그럼, 돈 한 푼 없이 집을 장만할 수 있게 해주라 이겁니까?”

소희는 팔짱을 풀고 병승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면 안 될 이유를 열 두 가지 대봐요.”

“하하.”

소희는 다시 병승에게 팔짱을 꼈고, 둘은 그렇게 광화문 쪽으로 계속 걸었다. 하얀 눈을 맞으며.

“만약 못 갚으면?”

병승은 소희에게 질문을 했다.

“그럴 때는 경매에 넘겨서 원금을 회수하면 되지요.”

소희의 말에 병승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너무한데…….”

“병승 씨, 처음부터 자기 집에서 살면서 집 값을 갚아나가나, 남의 집에서 살면서 돈을 모아 나중에 집을 사나, 시간은 똑같이 걸려요. 그런데 차이가 뭔지 아세요?”

병승은 어깨를 으쓱했다.

“바로 월세를 내느냐 안 내느냐 하는 차이에요. 한 달에 가령 삼십 만 원씩 월세를 낸다고 해봐요. 일 년이면 삼 백 육십 만 원이고, 십 년이면 삼 천 육백 만 원이에요. 십 년 동안 모아서 집을 산다고 했을 때, 삼 천 육백 만 원을 아낄 수가 있어요. 어떤 사람은 이십 년을 모아서 집을 사기도 해요. 그러면 월세만 칠천 이백 만 원이 되지요. 알겠어요?”

“그런데, 소희 씨, 다 좋은데, 그러면 은행에서 빌려서 집을 사면 되지, 굳이 내가 할 필요가 있어요?”

“병승 씨, 은행은 이자가 있잖아요. 이! 자!”

병승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럼 이자를 받지 말라 이거에요?”

“빙고! 맞았어요. 병승 씨, 똑똑하네.”

“허어, 참. 그게 어떻게 사업이 됩니까?”

병승과 소희는 광화문 앞까지 다 왔다. 둘은 지하철을 타러 경복궁 역 지하로 내려갔다.

“병승 씨, 그게 사업이 될지 안 될지는 한 번 생각해 봐요.”


* * *


현석과 미현은 나란히 앉아서 텔레비젼을 보고 있었다. 그러나 현석의 눈은 화면에 집중하지 못하고 자꾸만 거실의 이곳저곳을 보았다.

“여보, 왜 그래요? 뭐 안 좋은 일이라도 있어요?”

미현도 요새 회사가 힘들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현석이 프랜차이즈 업계를 완전히 뒤집어버리는 일을 지금 벌이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자꾸만 안 좋은 예감이 들어서 그래. 내일 꼭 무슨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아서 그래.”

미현은 현석의 손을 잡았다.

“여보, 그만 자요.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고. 그런데 요새 진영이는 뭐해요? 집에도 통 안 오네. 병원에서 퇴원했으면 한 번 들러야지.”

“걱정 마. 내가 회사에서 봤으니까.”

현석은 미현을 안심시키려고 했다.

“그만 잘까?”

현석과 미현은 나란히 방으로 들어가려고 했고, 그 순간 윤영이 집으로 들어왔다.

“헛! 분위기 좋아요. 네~~, 아주 좋아요.”

“이 가시내가! 윤영아, 너 좀 빨리 다녀라. 아니면 시집을 가던지…….”

미현이 화를 내보았으나, 윤영은 혀만 날름거리면서 이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 * *


혜정은 눈을 번쩍 떴다. 창 밖을 보았다. 하늘은 완전히 검은 색이었으나, 아직도 바깥은 간판들의 빛으로 그렇게 어둡지 않았다. 아까부터 내리던 눈은 지금도 조금씩 내리고 있었다.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지는 눈송이들. 혜정은 지금 자신의 처지가 바로 저 눈송이 같다고 느꼈다. 드디어 나도 바닥까지 떨어졌구나.

혜정은 눈을 돌려 옆을 보았다. 송영구가 완전히 잠에 취한 채 정신없이 자고 있다. 그래, 열심히 자라. 지금 자두지 않으면, 언제 또 이렇게 편안히 잘 수 있을지 모르거든.

혜정은 천천히 이불을 젖혔다. 온 몸에 싸늘한 냉기가 흘렀다. 천천히 침대에서 빠져나온 혜정은 옆 침대에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는 자신의 옷들을 보더니, 하얀색 팬티부터 하나씩 하나씩 몸에 걸쳤다.

옷을 다 입은 혜정은 침대 옆 작은 탁자 위에 놓여져 있는 물컵을 들어 핸드백에 집어 넣었다. 송영구가 잠들기 전에 물을 한 잔 마신 컵이었다. 혜정이 직접 건네준 그 컵이었다. 그 다음 혜정은 붙박이장을 열어, 영구의 양복 안주머니를 찾았다. 주머니의 단추를 푼 다음, 손을 집어 넣자, 종이봉투가 만져졌다. 혜정은 그걸 조용히 꺼내, 안을 살펴보았다. 빳빳한 종이가 한 장 나왔다. 창문의 빛으로 비춰보았다. 혜정은 만족스런 웃음을 지으며, 봉투는 양복 주머니에 그대로 다시 넣어 두고, 핸드백에 종이를 넣었다. 고개를 돌려 침대의 영구를 한 번 본 혜정은 잠시동안 그대로 서 있었다.

이윽고 마음을 정한 혜정은 그대로 방문으로 간 다음,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폰을 꺼내 시간을 보니, 새벽 세 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혜정은 호텔 프런트로 내려가 택시를 불러 달라 했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핸드백을 열어 물컵을 꺼낸 다음, 세면대에서 깨끗이 헹궈냈다. 그 다음 그 물컵을 화장실 쓰레기통에 버렸다. 혜정이 화장실에서 나오자 택시가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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