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장.
휴대폰이 울리자 김상원은 얼른 받았다.
“네, 아버지.”
“상원아, 백 십 억은 어떻게 되었냐? 소식이 없구나.”
아버지 김태원의 약간은 화가 난 목소리가 전화에서 들리자, 상원은 목을 움츠렸다. 서른이 넘었지만, 아직도 아버지는 무서웠다. 화나면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르는 양반이었으니까.
“그건 모두 받았습니다.”
“그러냐? 잘했다. 그런데 어째 입금이 안 되었구나.”
상원은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버지, 제가 받아서 가지고 있습니다. 걱정마세요. 실은 아직 진행 중인 일이 있습니다.”
“그러냐? 조심해야 한다. 절대 상대를 믿으면 안 된다. 알겠지?”
태원의 말에 상원은 휴 하고 숨을 내쉬었다.
“걱정 마세요. 지금 잘되고 있습니다.”
상원은 전화를 끊었다. 아직까지도 송영구에게서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손혜정을 데려오라고 시킨 부하 녀석들은 아주 작살이 나서 돌아왔고, 보고에 의하면 최준영과 이진영이 바뀌어 있더라는 것이다. 경찰에 신고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당장 치료비로만 몇 천만 원이 들어간 상황이다.
‘이걸 어떻게 해결하지? 그냥은 못 넘어가는데……. 최준영이 이 새끼를…….’
상원은 이를 악물었다. 몸이 근질근질해졌다. 직접 손을 봐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상원은 실제로는 싸움을 못했으니까, 그럴 수도 없었다.
‘최준영이를 잡아올 수만 있으면…….’
상원은 천장을 보면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 * *
영구는 침대에서 눈을 떴다. 창밖이 환하다. 머리가 지끈지끈하다. 술도 얼마 안 먹었는데, 뭔지 모르게 머리가 아파왔다. 꼭 무슨 약을 먹은 것만 같았다. 갑자기 생각이 들어 옆을 보았으나,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건너편 침대에는 영구의 바지와 속옷들이 널려 있을 뿐이었다. 영구는 그제야 손혜정이 생각났고, 어젯밤의 일도 생각났다. 혜정과의 대화도 생각났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수표가 생각났다. 송영구는 얼른 붙박이장의 문을 열고, 양복 상의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보았다. 봉투를 꺼냈으나, 그 속은 비어 있었다.
‘아뿔싸, 손혜정이……. 이 년이 기어코 배신을…….’
영구는 상의 바깥 주머니에서 폰을 꺼냈다. 손혜정의 번호를 눌렀다. 세 번 신호음이 울리고 전화는 연결되었다.
“혜정 씨, 나 송영구요.”
“알고 있습니다. 지금 무척 졸린데 무슨 일이시죠?”
혜정의 천연덕스러운 말투에 영구는 짜증이 확 밀려왔다. 이럴 때는 대놓고 해야만 한다.
“혜정 씨, 돌려 주시죠.”
“뭘 말입니까?”
“꼭 그걸 내 입으로 말해야 합니까?”
“실장님도 바보는 아니지요. 그걸 제가 돌려줄 것 같아요?”
영구의 이마에 힘줄이 솟아올랐다.
“혜정 씨, 그건 아리랑의 돈입니다. 그게 없으면 아리랑은 쓰러집니다. 아시잖아요?”
“그거야말로 제가 바라는 바입니다.”
영구는 자신의 이야기가 혜정에게 전혀 먹히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 사정하는 수밖에는 없다.
“혜정 씨, 우리는 결혼하기로 한 사이입니다. 그렇게 계약을 했지요. 안 그렇습니까? 그 돈은 제가 혜정 씨를 위해 준비한 돈입니다. 저야 횡령으로 감옥에 가서, 일 이 년 살다 나오면 됩니다. 그러면 그 돈은 우리 것이 됩니다. 제 마음을 모르시겠습니까? 저는 빈손으로 혜정 씨에게 가고 싶지 않습니다.”
영구는 진실 반, 거짓 반을 섞어서 말을 했고, 그 말을 들은 혜정은 조용히 있기만 했다.
“그럼 그냥 가지고만 계십시요. 절대 어디에 쓰지 마세요.”
“오늘 태원에서 아리랑에 찾아간다면서요?”
“아닙니다. 그건 제가 그냥 해 본 말입니다. 만약 태원이 정말로 찾아간다면, 제가 횡령한 것이 드러날 테고, 그럼 저는 바로 구속입니다. 제가 왜 그렇게 하겠습니까?”
“그럼 이 돈은 왜 빼돌렸나요?”
영구는 이제 말에 자신이 붙었다. 조금만 더 하면 설득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
“아까 말했잖아요. 혜정 씨를 위한 돈이라고.”
“그럼 어떻게 아리랑을 망하게 하려는 거지요?”
“혜정 씨, 그건 또 다른 생각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직은 말할 단계가 아닙니다.”
“그래요?”
혜정의 말에 영구는 조금씩 안심이 되었다. 당장은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지는 않다.
“혹시 김상원이라고 아세요?”
혜정이 질문하자, 영구는 순간 망설였다.
“…….”
“아세요, 모르세요?”
영구는 혜정이 다 알면서 물어본다는 것을 직감으로 느꼈다.
“압니다. 실은 거기서 아리랑의 자금을 빌렸습니다.”
“송 실장님, 배신은 당신이 했습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의 모든 계약은 깨졌습니다. 이제 각자 제 갈 길을 가면 됩니다. 그럼 이만.”
혜정이 전화를 끊자, 영구는 그만 어이가 없어졌다. 배신이라니……. 나는 배신한 적이 없는데……. 그런데 아까 김상원은 왜 물어봤을까? 혹시…….
영구는 김상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 실장님, 오전부터 무슨 일이신지요? 어째 요새 뜸하다 했는데…….”
“부장님, 딱 하나만 물읍시다. 솔직하게 말해주셔야 합니다.”
“예? 뭘 말입니까?”
“혹시 손혜정에게 무슨 일을 했습니까?”
영구의 질문에 상원은 난감해졌다. 영구와 상의도 하지 않고, 혜정을 납치하려고 했었는데, 그건 완전히 실패로 끝나버렸다. 이제 영구가 혜정에게서 그 이야기를 들은 게 분명했다.
“아, 그건 좀 오해가 있습니다. 우리는 정중히 모셔서 대화를 하려고 했었지요. 그런데….”
“뭐요? 아니 대체 무슨 짓을 한 겁니까?”
영구의 목소리가 커졌다.
“별 거 아닙니다. 태화에서 아리랑에 돈을 대준다면서요. 그걸 막아보려고 한 겁니다. 우리는 아주 신사적으로 행동했습니다. 그렇게 화낼 일이 아니지요. 실장님.”
영구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무슨 일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상원이 혜정에게 엄청난 짓을 하려고 한 것이 분명했다. 영구는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가 않았다. 돈은 잃어버렸고, 혜정도 떠났다. 이제 김상원도 믿을 수가 없다. 이대로 회사에 들어갔다가, 만약 정말로 김상원이 부채를 갚으라고 찾아오면, 영구는 인생이 끝장날 것이다. 영구는 다시 전화를 걸었다.
“여어, 오랜만이야. 우리 송변이 전화를 다 하고…….”
고교 그리고 대학 동창인 전기현의 반가운 목소리를 듣자, 영구는 조그맣게 한숨을 쉬었다.
“부탁이 있어서 그래. 항공권 하나 구해 줘. 지금 당장. 오늘 오후에 출발하는 필리핀 행으로.”
“뭐? 야, 뭔 일이야?”
대한항공 부장으로 근무하는 전기현은 항공권이야 아무 것도 아니지만, 갑자기 친구가 부탁을 하자 걱정이 앞섰다.
“야, 영구, 자세히 말해 봐.”
“미안, 지금 시간이 없어. 항공권 되냐, 안 되냐?”
“그거야 되지. 오늘은 평일이고, 한 장 정도야 얼마든지 있지.”
“그럼, 나 여기 강남인데, 바로 출발할 거야. 세 시간 내로 출발하는 걸로 해 줘.”
“알았다. 공항에 와서 다시 전화해. 내가 직접 줄 테니까. 그래도 얼굴 봐야지.”
“고맙다. 친구야. 정말 고맙다.”
영구는 전화를 끊은 다음, 옷을 전부 벗고 욕실로 들어갔다. 십 분 만에 샤워를 마친 영구는 다시 옷을 입은 다음, 방을 나갔다. 지하철 역으로 들어간 영구는 인천공항으로 달렸다.
* * *
혜정은 늦은 점심을 먹은 다음, 양준희 산부인과로 찾아갔다.
“어서 와. 몸은 어때?”
혜정은 준희의 앞에 앉은 다음, 우아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덕분에. 참, 수면제 처방전은 잘 썼다. 아주 유용했어.”
준희가 하하하 웃었다.
“잘 썼다니 다행이네. 그거 네가 먹은 거 아니지?”
“얘는……. 임산부가 무슨 약이니…….”
“뭐에 썼는데? 설마…….”
“설마? 야, 설마는 아니고, 실은 아주 나쁜 놈이 있었는데……. 아주 재워버렸거든.”
준희가 깜짝 놀랐다.
“재워버리다니? 너, 설마…….”
혜정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자, 초음파나 해 줘. 이제 4 개월 정도 되었으니까…….”
혜정은 마지막 말을 얼버무렸다.
* * *
현석은 비서실에 전화를 걸었다. 송영구 법무실장이 출근했냐고 물었으나, 돌아온 대답은 출근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현석은 개인 전화로도 걸어 보았으나, 전원이 꺼져 있다는 응답이 돌아왔다. 갑자기 송영구가 사라진 것이다. 그래서 현석은 송영구가 남겨 놓고 간 서류를 처리하느라, 각 부서 부장들과 하루종일 씨름을 하였다. 부장들 역시 아무도 송영구의 행방에 대하여 아는 바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현석은 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 아버지, 말씀 하세요.”
“진영아, 송 실장이 안 보인다. 출근도 안 하고…….”
준영은 깜짝 놀랐다. 송영구가 잠적을……. 대체 왜? 혹시 김상원과 틀어졌나?
“아버지, 송영구 실장, 어디 아픈 거 아닐까요?”
준영은 얼른 둘러댔다.
“진영아, 송 실장이 아프면 아프다고 연락을 했겠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건축사 사무실입니다. 농업 건물 건으로 지금 좀 바빠서…….”
“그래. 잘 해라. 형이 나으면 좋아할 거야.”
준영은 전화를 끊었다. 병실에 누워 있는 진영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옆에서 정성스럽게 진영의 팔과 다리를 마시지하는 선경의 모습도 떠올랐다. 둘이 아주 잘 어울렸다. 그래, 잘 된 거야. 준영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다시 눈을 돌려 건축사가 펼쳐놓은 설계도면을 보았다. 눈 앞에 넓은 들판이 펼쳐지고, 그 위에 사면이 모두 유리로 이루어진 높다란 빌딩이 올라가고 있었다. 이윽고 그 안에는 각 층마다 푸르디 푸른 채소들과 각종 색깔의 과일들이 탐스럽게 영글기 시작했다.
* * *
혜정은 아까부터 폰을 들고 망설이고 있었다. 전화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다시 한숨을 내쉰 혜정은 마음을 정한 듯 폰의 연락처에서 하나의 이름을 눌렀다.
“네, 혜정 씨.”
“준영 씨, 우리 지금 만나요.”
“예? 지금 몇 시인데…….”
혜정은 시계를 보았고, 시간은 밤 열 시를 막 지나고 있었다.
“아무래도, 오늘을 넘기면 안 될 것 같아요. 아주 중요한 이야기가 있어요.”
“예, 알겠습니다. 그러면 어디에서…….지난 번 거기?”
“싫어요. 거기 말고, 오늘은 XX 호텔에서 봐요. 로비에서 기다릴께요. 지금 바로 출발해요.”
혜정은 전화를 끊은 다음, 일 층으로 내려갔다.
진태와 정화가 나란히 앉아서 드라마를 보고 있었고, 그 옆에서 병승은 절반쯤 졸면서, 책을 보고 있었다. 혜정이 계단을 내려오자, 정화가 얼른 일어나 혜정에게로 왔다.
“왜? 더 쉬지 그러냐?”
혜정은 정화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엄마, 나 지금 나가봐야 돼. 아마 오늘 안 들어올 거야.”
정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화는 얼른 진태의 눈치를 보며, 혜정의 손을 잡고 주방으로 이끌었다.
“어제도 안 들어오고, 대체 왜 그러냐? 무슨 일 있냐? 너, 홀몸도 아니면서…….”
“엄마, 홀몸이 아니어서 그래요. 진짜 홀몸이었다면, 아마 지금쯤 아무 걱정없이 푹 쉬고 있을 거에요. 아빠는 뭐라 하세요?”
정화는 다시 진태 쪽을 보았다.
“아빠는 대충 눈치는 채신 것 같은데……. 별 말이 없으시구나. 너를 믿는 모양이다.”
“아빠한테 고맙다고 전해주세요. 지금 너무나 중요한 일이 있어서 그래요.”
“엄마한테도 비밀이니?”
정화가 눈을 흘기자, 혜정은 두 입술을 꼭 다물었다가 떼었다.
“아이 아빠를 만나러 가요.”
혜정의 말에 정화의 눈이 커질대로 커졌다가, 다시 사르르 작아졌다.
“그렇다면야 할 수 없지. 조심히 갔다 와라.”
“예.”
혜정은 병승을 보더니, “야, 병승아!” 하고 불렀다.
병승은 혜정이 부르자, 고개를 번쩍 들어 혜정을 보았다.
“병승아, 나 차 좀 태워주라. 지금.”
병승은 멀뚱한 눈으로 혜정을 보다가, 고개를 돌려 진태를 보았고, 진태는 눈은 여전히 드라마에 고정한 채, 고개만 끄덕였다. 마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태도였다. 병승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동차 키를 찾으러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