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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Gold)과 피(Blood)-49

by 윤금현

49 장.



준영은 제네시스 안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새벽이 된 거리는 가끔씩 지나가는 술 취한 사람들과 그들을 태우려는 택시들만 보였다. 창밖을 보면서, 준영은 옆 좌석에 놓여져 있는 종이 봉투를 쓰다듬었다. 송영구와 김상원의 서명이 있는 종이. 둘 사이의 비밀 계약이 담긴 종이. 준영은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을 하고 있었다.

조수석 창문으로 여자의 얼굴이 나타났다. 손혜정. 검은색 재킷과 역시 검은색 바지를 입은 손혜정은 어둠 속에서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흑의의 천사 같았다. 혜정이 창문을 두드리자, 준영은 창문을 내렸다.

“어떻게 됐어요?”

혜정이 물었다.

준영은 말없이 봉투를 들었고, 혜정은 차에 탔다. 준영이 혜정에게 봉투를 건네자, 혜정은 봉투를 열어서, 속에 든 또 다른 종이를 꺼냈다. 혜정은 그것을 천천히 읽어본 다음, 다시 봉투에 집어 넣었다.

“이걸로 일단 된 거군요.”

“그렇습니다. 이제 태원에서 아리랑에 주장할 아무런 근거가 없는 거지요.”

“김상원이 가만 있을까요?”

“아마……. 그렇지 않을 겁니다. 증거가 없으니, 송영구를 찾으려고 할 테지요.”

“대체 송 실장은 어디로 간 걸까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어디엔가 숨어 있을 겁니다. 송영구가 나와서 김상원 편에서 진술을 하면……. 재판을 해야 할 테고…….”

혜정은 종이봉투를 준영에게 돌려 주었다. 그다음 핸드백을 열어서 하얀 편지봉투를 꺼냈다. 그걸 다시 준영에게 건넸다.

“뭡니까?”

“선물.”

혜정이 싱긋 웃었다.

준영은 편지봉투 속에 든 종이를 끄집어내자마자, 두 눈을 크게 떴다.

“이거……. 이거…….”

“그래요. 5 십 5 억짜리 수표.”

“난 아무 것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이게 어떻게 지금 여기에 있을 수가 있습니까?”

혜정은 손가락을 뻗어 준영의 입술을 막았다. 그녀의 두 눈이 준영을 환하게 바라보았다.

준영은 자신의 입술에 대어져 있는 혜정의 손가락을 보다가, 눈을 들어 혜정의 배를 보았다. 살짝 나온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혜정은 자신의 배를 보는 준영의 눈길을 느끼면서, 천천히 손을 거두어 들였다.

준영의 눈길이 그 손가락을 따라가다가, 혜정의 얼굴에 꽂혔다.

혜정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준영을 쳐다보았고, 그 순간 준영은 얼굴을 혜정에게로 가까이 가져가, 혜정의 입술에 입맞췄다. 그리고 혜정은 준영의 입술을 받아들였다.


* * *


서서히 어둠이 걷히며 도시가 밝아지기 시작했다. 아까부터 새벽 첫 버스는 운행을 하고 있었다. 준영은 조수석에서 잠들어 있는 혜정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다시 앞을 본 준영은 차에 시동을 건 다음,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혜정의 빌라 앞에 도착한 준영은 살짝 흔들어 혜정을 깨웠다.

“음, 음, 준영 씨.”

“이제 집에 들어가야지요.”

혜정은 눈을 뜨면서 다시 한 번 준영에게 웃어 보였다. 준영도 따라서 웃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거에요?”

“먼저 병원에 가서 진영이 상태를 본 다음, 양쪽 집에 찾아가서 진실을 밝힐 생각입니다.”

준영이 말하자, 혜정은 준영을 빤히 쳐다보았다. 눈길이 마주쳤다. 둘은 서로의 눈동자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키스했다. 뜨거운 입맞춤이 끝나고, 혜정은 차에서 내려 집으로 향했다.


* * *


“어? 오빠.”

준영이 병실로 들어서자, 선경이 반갑게 맞았다.

“진영이는 어떠냐?”

“많이 좋아졌어. 이제 왼쪽은 잘 움직여. 오른쪽이 문제지.”

준영은 진영의 침대 옆에 걸터 앉아, 진영을 보았다.

“말은?”

“응, 말은 어눌하게나마 조금씩 할 수 있어.”

선경이 대답했다.

“진영아.”

준영은 진영을 조용히 불러보았다. 그러자 진영이 두 눈을 떴다.

“혀…엉….”

잘 움직이지 않는 입술을 힘겹게 놀리며, 진영이 준영을 불렀다.

“진영아, 지금 시간이 없으니, 간단히 말할께. 나, 이제 시골로 갈 생각이다. 아버지가 해주신 농업 회사에 매진할 생각이야.”

진영이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너는 여기 도시에 있을래? 아니면 나를 따라 시골로 갈래?”

“시…고…올….”

“알았다. 내 생각도 그래. 그럼 우리 같이 가자.”

준영이 진영의 왼손을 잡자, 진영의 왼손이 오므려지며 준영의 손을 더욱 꽉 잡았다.

“시골에서 요양하면 금방 나을 거야.”

선경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오빠, 나도 갈래.”

준영은 선경의 얼굴을 보았다.

“내가 가서, 진영이 오빠, 걷게 하고 싶어.”

선경은 진영을 보았고, 진영도 선경을 보았다. 둘 사이에 뭔가가 이어지는 것 같았다.

“그러자. 우리 다같이 가자.”

준영은 진영의 손을 놓고 일어났다.

“이제부터 양쪽 집에 가서 진실을 알릴 생각이다. 그리고 우리 다같이 시골로 가기로 했다는 것도…….”

침대에 누워 있는 진영의 얼굴이 환해졌다.


* * *


준영은 먼저 아리랑으로 가서, 이현석에게 송영구와 김상원 간의 비밀 계약서를 보여 주었다. 현석은 너무나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리고 준영이 수표를 현석의 앞에 놓자, 현석은 더욱더 놀라고 말았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난 도무지…….”

“아버지, 지금은 그냥 이렇게만 알고 계세요. 시간이 흐르면 차차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수표로 태화 투신에도 갚으십시오. 일단 절반 정도 갚는 거니까, 회사가 숨통이 트일 겁니다.”

현석은 수표를 집어 들었다.

“진영아, 그런데 이 돈은 우리 돈이 아니지 않느냐?”

“아닙니다. 아리랑은 분명히 태원에 빚이 없습니다. 영수증이 있으니까요. 이 돈은 송영구가 빼돌린 아리랑의 자금입니다.”

준영의 말에 현석은 뭐라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준영은 현석이 그냥 넘어가 줬으면 했다. 그래서 얼른 말을 돌렸다.

“아버지, 그리고……. 이제부터 잘 들으셔야 합니다.”

“아직도 뭐가 남았냐? 이제 그만 놀라고 싶구나.”

준영은 씩 웃었다.

“아버지, 저는 진영이가 아니라 준영입니다. 사고 이후에 바뀌었습니다.”

현석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뭐라고?”

준영은 현석에게 어떻게 해서 둘이 바뀌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했고, 현석은 말없이 듣기만 했다.

“저는 이제 시골로 가서 농업 회사에 충실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진영이도 저와 함께 간다고 했습니다. 시골에서 요양을 하면 금방 걸을 수 있을 겁니다. 이해해 주시겠지요?”

“둘 다 가버리면, 회사는…….”

현석의 말에 준영은 가만히 있었다.

“그러면 정말로 소유와 경영을 분리할 수 있겠구나. 나는 이제 회장에서 물러나, 주주로만 남겠다. 회사의 직원들이 회장을 뽑는 걸로 하자. 어떠냐?”

준영은 현석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대단하십니다.”

방을 나가는 준영을 보며, 현석은 미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 * *


“소희야, 이거 어떠냐?”

정화가 들어보이는 야들야들하면서 속이 환해 비치는 하얀색 슬립을 보며, 소희는 눈웃음을 쳤다.

“아이, 어머니도……. 너무 야해요.”

정화는 소희의 말에는 아랑곳하지도 않고, 슬립을 소희의 몸에 대보았다.

“사이즈도 좋고……. 딱이다.”

“흠, 흠.”

병승이 옆에서 헛기침을 했다.

“병승아, 네가 보기엔 어떠냐?”

정화의 말에 병승은 얼굴이 빨개진 채, 소희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어머니, 너무 야하다니까요.”

“그러냐? 그럼 좋은 거지 뭐. 요걸로 하자. 좌우지간 남자들은, 혼을 쏙 빼놓아야 한다니까. 그래야 네가 마음대로 주무르면서 살지.”

“어머니, 시어머니는 원래 아들 편이잖아요.”

소희가 진지하게 말했다.

“난 아니야. 난 여자 편이지. 우리 여자들, 뭉쳐야 한다.”

정화는 소희에게 눈을 크게 떠 보였고, 그걸 본 소희는 다시 웃었다.

병승이 시계를 보더니, 정화에게 말했다.

“엄마, 이러다 날 새겠어요. 지금 백화점에서 몇 시간째인줄 아세요?”

“어머, 얘가……. 넌 집에 가라.”

정화는 소희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소희야, 너, 지치니?”

“어머니, 지치기는요. 이제 시작인걸요.”

정화와 소희는 마주보며 다시 웃었고, 병승은 옆에서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피곤에 절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 * *


저녁이 되자, 준영은 다시 병원으로 갔다. 최종환과 송순화가 와 있었다. 선경이 전화해서 두 명을 부른 것이다. 준영이 병실로 들어서자, 순화가 얼른 일어나 준영에게 다가왔다.

“준영아!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준영은 귀 뒤를 긁으며, 겸연쩍게 웃었다.

“엄마, 죄송해요. 그동안 말 못해서…….”

“아니, 이 놈아, 그래 어떻게 형과 동생이…….”

종환도 말을 잇지 못했다.

“선경이가 다 말했군요.”

준영은 선경을 째려보았으나, 선경은 혀만 낼름거렸다.

“엄마, 아빠, 너무 그러지 마세요. 진영이는 아직도 회복이 덜 됐어요.”

준영의 말에 종환과 순화는 진영을 보았고, 그 얼굴에는 미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진영이도 빨리 나아야 할 텐데…….”

그때 병실 문이 열리며, 현석과 미현과 윤영이 들어왔다. 이제 두 집안이 전부 한 공간에 모였다. 다들 인사를 나눈 다음, 소파에 둘러 앉았다. 한쪽에는 현석과 미현 그리고 윤영이 앉았고, 반대편에는 종환과 순화 그리고 준영이 앉았다. 선경은 진영의 곁 침대에 걸터 앉았다.

종환이 먼저 입을 열었다.

“준영아, 이런 말 하기는 뭐하지만……. 오랫동안 생각해 오고 있었다.”

종환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시작했다.

“이제 친부모에게로 돌아가도 좋아. 난 아무렇지도 않다. 너의 원래 인생을 찾으렴.”

준영보다 현석과 미현이 깜짝 놀랐다.

“선생님, 무슨 그런 말씀을…….”

현석이 말했다. 그러면서 준영의 표정을 살폈다.

준영은 현석을 보았고, 그 다음 종환을 보았다. 그리고 손을 뻗어 순화의 손을 잡았다.

“저는 남들과는 다르게 부모님이 네 분이나 계십니다. 어쩌면 복 받은 건지도 모르겠어요.”

순화의 손을 잡은 준영을 보며, 미현은 손수건을 꺼내 살짝 눈물을 닦았다.


* * *


인천 공항은 밤이 되어도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다. 지금도 입국하는 사람들과 출국하려는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김상원은 젊은 남자 두 명을 대동하고, 보안 게이트를 통과했다. 아주 가벼운 차림이었기 때문에, 보안 검사는 금방 끝났고, 세 명은 탑승 게이트 앞에 있는 의자로 갔다.

“형님, 어쩌시려고요?”

“다 생각이 있다. 벌써 수배해 놓았다. 송영구가 어디 있는지 대충 알아냈으니까…….”

“형님, 송영구를 잡으면, 그 다음은…….”

“참, 너희들, 그쪽에 준비해 놓으란 건 다 해놨냐?”

“예. 걱정 마십시오.”

한 명이 주위를 둘러보면서, 아주 작은 소리로 상원에게 속삭였다.

“총이랑 등등 다 준비되었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송영구를 잡아서, 돈을 내놓으라고 해야지. 그 놈이 절반을 가지고 있잖아. 만약 여기 국내에 숨겨놨으면, 데리고 와서……. 그래야 나도 살고……. 너희들도 산다.”

상원의 얼굴이 잔뜩 굳어졌다. 아버지 김태원을 생각하는 모양이다.

“송영구가 순순히 말을 들을까요?”

“수 틀리면, 한 두 군데 부러뜨려 버리지.”

상원은 잔인한 웃음을 흘리며, 두 부하들을 보았고, 부하들의 눈에서도 마찬가지로 잔인한 기운이 흘러 넘쳤다.

“……. ……. 필리핀 마닐라……. …….”

비행기가 곧 출발한다는 안내 방송이 나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