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장.
일 주일이 지났다. 지난 일 주일을 어떻게 보냈는지 혜정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이제야 일이 마무리가 되었고, 혜정은 아침 식사를 온 가족과 함께 했다. 진태는 혜정의 배를 힐끔거렸고, 그런 진태를 정화가 살짝 꼬집었다. 병승은 소희 생각을 하느라, 아무런 눈치도 못 챘다.
손혜정은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홀가분한 기분을 느끼며, 혜정은 천천히 자신의 쏘나타를 몰고, [양준희 산부인과]로 갔다. 병원에 들어서자, 간호사들이 정답게 맞아 주었고, 원장인 양준희가 바로 나왔다.
“혜정아, 너, 얼굴이 좋다?”
준희는 혜정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꼭 연애하는 여자 같은데…….”
혜정의 얼굴이 발그레해지자, 준희의 눈이 왕방울만 해졌다.
“진짜구나. 너…….”
“그만. 이제 검사하자.”
혜정은 앞장서서 검사실로 들어갔고, 그 뒤에서 준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따라갔다.
초음파 검사가 끝나고, 프린터에서 사진 한 장이 튀어나왔다.
“음, 혜정아, 이제 확실해졌다.”
“뭐가?”
“쌍둥이 말이야……. 그전에는 긴가민가 했는데, 이제 확실해.”
혜정은 얼른 사진을 받아서 들여다 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알 수가 없었다.
“이거 하고, 이거. 이렇게 둘이야.”
“그렇구나. 맘에 들어.”
혜정은 준희에게 활짝 웃어 보였다.
“몸조심해라. 이제부터가 중요하니까.”
준희는 혜정에게 당부를 했고, 혜정은 초음파 사진을 가슴에 꼭 안았다.
* * *
“오빠, 이것도 챙겨.”
선경은 시계를 든 채 준영에게 손을 뻗었다. 오리엔트 시계. 준영은 시계를 받아서 한참을 들여다 보았다. 이제는 유리에 여기저기 흠집이 뚜렷이 보인다. 너도 고생이 많았다.
준영은 시계에서 눈을 돌려 선경을 한 번 보고, 침대에 누워서 이쪽을 보고 있는 진영에게로 가서, 그의 손목에 시계를 채워주었다. 준영이 시계를 채워주는 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던 진영의 얼굴에 한 줄기 미소가 떠올랐다.
“진영아, 이제 여기서 나가자. 우리들만의 곳으로 가는 거야. 거기 시골집이 근사하더라.”
준영의 말에 진영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준영이 부축해주자, 진영은 힘겹게 일어나 침대 옆의 휠체어로 옮겨 탔다.
선경은 진영의 모든 짐을 챙겨, 커다란 캐리어에 집어 넣고 있었다.
준영은 휠체어를 밀고, 선경은 캐리어를 끌면서 병실을 나왔다.
미현과 윤영이 뒤에서 마지막으로 병실 구석구석을 확인했다.
“준영아, 운전은 누가 할래?”
미현의 말에 준영은 뒤를 돌아보더니, 윤영에게로 눈길을 주었다.
“엄마, 내가 태워다 줄께.”
“윤영이, 네가? ……. 그래라.”
병원 밖에서 미현은 윤영의 차를 타고 떠나는 세 사람을 배웅했다.
“이번 주말에 아빠와 함께 들를 테니까, 그때까지 잘 있어.”
“네. 엄마.”
준영은 미현에게 엄마라고 불렀고, 그러자 미현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미현은 손을 흔들었고, 윤영은 고개를 까딱해 보이더니, 곧 창문을 닫았다. 2 월 말의 차디찬 바람이 맹렬히 불어댔다.
미현은 전화를 꺼내 현석에게 걸었고, 현석이 받자, “떠났어요.” 라고 짧게 말했다.
* * *
현석은 미현과의 점심 약속을 한 다음, 진태에게 전화를 걸었다.
“친구, 잘 지냈는가?”
“어제 통화했는데, 뭘……. 참, 돈은 잘 받았다. 나머지는 천천히 줘도 돼. 걱정하지 말고.”
“그래, 정말 고맙다. 내 한 잔 살께.”
“술이라, 그건 먹으라고 있는 건가? 아니면, 마시라고 있는 건가?”
진태의 농담에 현석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야, 하나도 재미 없다. 이제 그런 건 그만 좀 하지.”
“현석아,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안 된다. 그럼 갈 때가 된 거야. 하하하.”
“알았다. 오늘 저녁에 볼까?”
“나야 좋지. 오늘은 부부 동반으로 모이자. 내 할 이야기도 있으니.”
현석은 진태에게 그러자고 했다. 미현에게는 점심 먹으면서 얘기할 생각이었다.
* * *
종환은 오늘 일찍 퇴근을 했다. 집에 들어가니, 순화 혼자 빈 집에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종환은 그런 순화의 어깨를 감싸안으며 말했다.
“오늘 외식할까?”
그러나 순화는 한숨만 내쉬었다.
“여보, 준영이도 가고, 선경이도 가니…….”
순화는 종환을 올려다 보았다.
“내가 밥 먹으면서 얘기 하려고 했는데…….”
순화의 눈에 호기심이 어렸다.
“나, 이제 구청 그만둘까 해.”
“여보, 갑자기 그게…….”
“명퇴해서, 퇴직금으로 준영이 있는 시골로 가면 어떨까? 근처에 집 사서, 당신하고 나하고 거기서 농사도 짓고, 애들도 보고, 그러면 어때?”
순화의 얼굴에서 환한 빛이 나왔다.
“난 좋아요. 애들이 없으니, 집도 썰렁하고, 사는 재미가 없을 것 같아요.”
“나도 그래. 준영이한테는 미리 말해 놓았어. 준영이가 집을 알아봐 준댔으니까.”
순화는 일어서더니 종환에게 팔짱을 꼈다.
“자, 나가요. 외식하러. 당신, 오늘 술도 한 잔 하세요.”
“그럴까?”
종환과 순화는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집을 나섰다.
* * *
“여어, 여기야.”
현석이 미현과 함께 식당으로 들어가자, 저 안쪽에서 진태가 손을 흔들었다. 그 옆에 정화도 함께 있었다.
“반가워요.”
미현은 정화에게 인사를 했고, 정화 역시 일어나서 미현에게 “오랜만입니다.” 하고 인사를 했다. 그리고 네 사람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식당 직원이 오더니, 음식을 내오기 시작했다.
“내가 먼저 주문해 놨지.”
“허허, 이 사람이, 이건 내가 낼 거야.”
현석이 말하자, 진태는 손을 내저었다.
“돈을 갚았으니, 내가 내야지. 안 그런가?”
진태의 말에 미현이 현석을 보았고, 현석은 미현에게, “그게 말이야. 준영이가 해줘서…….” 라고 말끝을 흐렸다.
“뭐, 준영이가? 오호라, 그래.”
진태의 눈이 반짝반짝거렸다.
“왜 그러세요?”
미현이 진태에게 묻자, 정화가 진태의 손을 잡았다. 그러나 진태는 정화를 한 번 흘깃 보더니, 다시 미현을 보았다.
“내가 준영이를 처음 봤을 때 느꼈는데, 아주 물건이더군. 내 맘에 들었어.”
“언제 자네가 보았나? 준영이를.”
진태는 술병을 들어 현석에게 한 잔 따라주었다. 그러자 미현이 술병을 들어 진태와 정화에게 잔을 쳤고, 정화가 마지막으로 미현에게 술을 따랐다.
“자, 다같이 건배하자.”
진태가 술잔을 들어 모두에게 잔을 부딪치더니, 한 잔을 주욱 마셨다. 탁자에 술잔을 내려놓은 진태의 두 눈이 가늘어지더니, 미현을 보았다.
“사부인, 술 맛이 어떤가요?”
진태의 말에 미현이 깜짝 놀랐다.
“예? 그게 무슨…….”
현석은 술을 마시다 말고, 잔을 내려놓더니, 진태를 뚫어지게 보았다.
“진영이가 그렇게 아픈데……. 혜정이도 다른 사람을 찾아야지, 안 그런가?”
현석은 솔직한 심정으로 말했다.
“혜정이가 임신을 했는데, 한 오륙 개월 되었지?”
진태는 정화를 바라보았고, 정화는 그렇다고 했다.
현석과 미현은 진태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 아빠가 준영이라네.”
“네?”
미현의 입에서 외침이 터져나왔고, 자신의 목소리에 미현은 오히려 더 놀라고 말았다.
현석의 얼굴에도 뭐가 뭔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나도 내막을 몰라. 하지만 혜정이가 말했어. 그럼 된 거지. 안 그런가? 우리가 모르는 일들이 그동안 많이 진행이 되었나 봐. 현석이, 자네도 몰랐지?”
현석은 남아있던 잔을 비우고 나서, 숨을 돌렸다.
“그래, 하나도 몰랐어. 준영이하고 혜정이가 그런 사이였다니……. 그럼 진영이는…….”
“현석 씨, 진영이는 선경이가 있잖아요.”
미현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하자, 현석은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럼 이걸로 된 건가?”
네 사람은 다시 잔을 채워서, 한 잔씩 마신 다음, 식사를 시작했다.
그때, 저녁 뉴스가 식당의 텔레비젼에서 나왔다. 화면의 우측 상단에 자그마한 또 다른 화면이 나왔고, 거기에서는 모자이크 처리된 장면이 비춰지고 있었다. 앵커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오늘 오후 2 시 경, 필리핀 마닐라 시의 외곽 도로에서 한국인이 몰던 승용차가 중앙선을 넘어 마주오던 트럭과 정면 충돌했습니다. 트럭은 승용차를 밀고서 이십 여 미터를 갔으며, 승용차에 타고 있던 네 사람은 모두 현장에서 숨졌습니다. 현지 기자를 불러 보겠습니다…….”
“잠깐만!”
진태가 현석에게 말하자, 현석도 방송을 보았다.
기자는 목격자의 증언을 방송하고 있었다. 화면 아래에 하얀 자막이 흘러나왔다.
‘……. 바로 뒤에서 따라가고 있었는데, 뒤 유리창으로 보이는 거에요…….’
‘……. 뒤의 두 사람이 몸싸움을 하는 것처럼…….’
‘……. 갑자기 방향을 틀어, 중앙선을 넘어 갔습니다…….’
다시 기자의 얼굴이 화면에 나왔다.
“현재 사망자들의 신원은 정확히 나오지는 않았지만, 현장에서 수거된 여권에 네 사람 모두 한국인인 것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신원이 밝혀지는대로 다시 알려드리겠습니다.”
진태는 현석을 보았고, 현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