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일본 졸업 05화

8. 일본의 역사 강박증 2편

by 지식공장장

원자탄이 떨어진 날

원래 일본을 굴복시키기 위해 세운 작전은 원자탄 투하가 아니었다. 몰락 작전(Operation Downfall)이었다. 한 마디로 육해공군을 총 동원 100만 대군을 동원 일본을 몰살시키는 작전으로 세계 무역 50%를 책임지는, 물자, 운송망을 갖춘 미국만이 할 수 있는 작전이었다. 굳이 이런 작전까지 입안된 이유는 일본이 ‘1억 총 옥쇄’

즉 최후의 한명까지 저항하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작전엔 부담이 있었다. 우선 나치를 대량학살자로 처분한 미국이 대량학살에 참여하는 꼴이다. 그 순간 정의로운 전쟁에 대한 지지는 비난으로 바뀌며, 정권에 위협이 될 것이다. 또한 일본에 상륙하는 과정에서 희생된 병사들에 대한 인명피해와 보상도 걸림돌이었다.


결국 전쟁을 이해하는 빠른 방법은 돈과 권력의 흐름이다


미국은 싸고 빨리 끝낼 수 있는 방법을 기획한다. 포츠담 선언과 원자탄 투하가 그것이다. 우회책이 원자탄이라는 대목이 의아할 수도 있는데 당시 사람들의 인식에서 원자탄은 우라늄을 사용한 강력한 폭탄이었을 뿐 방사능이 위험하다는 인식이 없었다. 원자탄 실험을 한 비키니섬 주민들, 근처에서 영화촬영을 하던 배우들이 피폭 당하거나 심지어 원자탄을 투하한 파일럿이 피폭 당할 줄은 미국도 몰랐다는 것이다(어쩌면 수뇌부는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오히려 문제는 투하장소의 선정이었다. 전쟁을 거치며 이미 일본 전역이 폭격으로 날아간 뒤라서 충격을 안겨줄 만한 도시가 거의 없었던 것이다. 결국 목표선정위원회는 교토와 히로시마를 선택한다.

이때 당시 전쟁성 장관인 ‘헨리 스팀슨(Henry L. Stimson)’이 제동을 건다. 교토는 일본의 정신적 문화의 중심이므로 이곳을 폭격하면 전후 민심이 동요하여 종전처리가 힘들 것이라는 의견이었다.


이에 오히려 그런 곳을 폭격해야 한 번의 폭격으로 끝난다는 의견이 나왔지만 인간사라는 게 높으신 분이 버티면 어쩔 수 없는 법이다. 게다가 트루먼 대통령이 민간인 거주지역, 옛/현재수도를 제외하라고 지시하는 바람에 교토는 제외되고 결국 히로시마에 원폭투하가 결정되었다.


그리고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되었다. 이 원폭에 대해 일본이 보인 반응은 감당할 수 없는 큰 충격이 다가왔을 때 일본인들이 보이는 전형적인 반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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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정부는 현실을 부정하기 시작했다.


일본 근대물리학의 아버지이자 당시 최고 권위자인 니시나 요시오는 원자탄의 위력이 진짜임을 정부에 보고했지만 정부는 이를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일본은 두 세력으로 나뉜다.


1. 덴노제를 유지할 수 있다면 모든 걸 받아들이고 항복해야 한다는 화평파

2. 연합군은 일본을 최단기간 점령해야 하며, 무장해제, 전범재판은 일본이 하는 조건을 내세우는 강경파


우리가 원하는 걸 다 들어주면 항복하겠다는 강경파의 상식밖의 주장덕에 의견을 조율할 ‘최고전쟁지도회의(最高戦争指導会議)’는 히로시마 원자탄이 투하된 지 3일 후인 1945년 8월 9일에서야 열릴 수 있었다. 답변을 기다리다 지친 미국이 2차 원자탄을 투하하기로 한 날이었다.


이 폭탄을 투하하기전에 미국은 삐라를 살포, 나가사키에 폭격이 이어질 테니 모두 피난할 것을 권고한다. 하지만 일본정부는 이 피난권고를 수행하기는커녕 묵살한다. 민심이 정부를 비난할 것을 두려워한 것이다. 오히려 내부에서는 미국이 원자탄이 없으니 허세를 부리고 있을 뿐이니 반격할 차례라는 현실인식이 결여된 의견마저 나오고 있었다.


이런 정부의 늑장대응은 나가사키 폭격 성공에 기여한다. 정보부가 원폭으로 추정되는 폭탄을 실은 비행기가 올 것을 보고했지만 상층부는 항복하느냐 마느냐로 싸우느라 정신이 없는 판에 부전조약을 맺은 소련이 선전포고를 하자 판단력을 상실했다. 폭탄을 실은 비행기가 오는 판에 공습경보를 내리긴커녕, 미국이 허세를 부리고 있다고만 믿었다. 이런 무책임한 행보 때문에 4만에서 7만에 해당하는 민간인이 사망했다.


이렇게 일본 우익들이 잊고 싶은 치욕의 순간이 다가왔다.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폭탄이 떨어지자 제 아무리 무능한 일본의 수뇌부도 다음에 폭격할 곳은 덴노가 있는 교토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정신적 수도인 교토만은 잃을 수 없기에 일본은 결국 1945년 8월 15일 항복하고 이후 1945년 9월 2일 포츠담 선언에 의해 GHQ(General Headquarters)에게 신탁통치를 받는다. 이 GHQ의 최고가 더글라스 맥아더였다.

하지만 GHQ의 능력은 한 마디로 낙제점이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동아시아 국가갈등의 불씨를 남긴다


GHQ는 절대적인 권력을 가졌지만 무능했다. 군인의 전문분야는 전쟁이지 통치가 아니라는 점, 일본에 맞는 통치방식을 GHQ가 알 수 없었다는 점이 겹쳐져 일본의 경제는 피폐해졌고 식량은 나날이 나빠졌다(이는 한반도도 동일하게 겪는다).



일본 부활하다

일본은 덴노를 건드리지 않는다는 화평파의 조건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GHQ는 덴노를 그냥 둘 생각은 없었다. 전쟁의 주역인 덴노의 영향력이 살아있으면 전쟁은 언제든 다시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1946년까지, GHQ는 덴노에게 인간선언을 시킨다. 일본 군국주의의 중심인 신토를 격하시켜서 일본인의 의지를 꺾으려 한 것이다. 이런 의도는 제대로 먹혔고 일본은 GHQ에 고분고분하게 굴복했다. 하지만 미국은 항전의지의 핵심이자 군국주의의 상징인 ‘야스쿠니’는 그대로 남겨두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른다(이는 한국, 중국 등의 피해국은 물론 미국을 두고두고 괴롭히게 된다).


GHQ가 원한 것은 아시아의 스위스였다. 이를 위해 다음과 같은 정책을 수행한다.


여성 참정권 부여: 황족, 화족, 귀족이 일본의 권력을 독점하는 것을 막으려 했다.

노동조합 장려: 군국주의 일본의 자금줄인 재벌을 견제하기 위해서다.

교육 자유화: 신격화 교육이 중심이 된 군국주의 교과서 폐지, 덴노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을 막으려고 했다.

비밀경찰 폐지: 노동조합,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는 실행수단을 없앴다.


그리고 이런 수단은 거의 성공할 뻔했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1950년 6월 25일, 한반도 전쟁이 터진 것이다. 미국은 한반도보다는 일본에 관심이 많았기에 거의 병력을 남겨놓지 않았으며, 덕분에 제대로 대응할 전력조차 없던 남한은 부산까지 후퇴하게 된다. 소련의 남하를 막아야 할 미국, 하지만 남한세력이 부산만 남아있는 상황에서 한반도에서 군수물자를 생산할 수는 없었다. 까딱하다가 적에게 노획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미국은 기존의 방침을 바꾸고 일본에게 힘을 실어준다. 일본에서 군수물자를 생산할 것을 결심한 것이다. 이에 일본에 천문학적인 투자가 이뤄지고 일본의 경제는 다시 호황을 맞는다. 그리고 훗날 일본은 아시아 최고의 경제대국을 넘어 세계 1위인 미국을 넘볼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한다.


한국전쟁은 이후 한일 역사에 중대한 분기점이 된다.


태평양 전쟁의 전후 처리를 위해 1951년 9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일본을 포함한 48개국이 강화 회의 후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체결한다. 즉 일본과 연합국간의 조약이며, 일본 총리 ‘요시다 시게루’의 요구로 인해 당초 조약서명국이 될 한국, 대만, 필리핀 등은 참여하지 못했다.


이 조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1. 연합군의 점령지에 불과했던 일본이 공식적으로 국권을 회복했다.

2. 일본은 한반도에 관한 모든 권리, 권한을 포기하고 을사조약, 한일합방조약을 무효화한다.


이렇게 한국은 GHQ가 점령한 일본의 식민지 A에서 졸업, 진정한 광복을 맞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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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콤플렉스

미국은 일본에게 덴노의 인간선언 및 자신들이 수행한 정책을 활용한 헌법을 만들 것을 요구한다. 미국이 법을 만들고 일방적으로 안겨주면 저항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 정치인들이 가져오는 법안은 사실상 일본이 점령전의 일본으로 가겠다는 내용과 다름없었고, 결국 지쳐버린 미국은 자신들이 직접 만든 초안을 제시했다.


당시 총리인 ‘시데하라 기주로(幣原喜重郎)’는 미국이 요구하는 것이 전쟁재발방지임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1946년 1월 '상징천황제'와 '비무장화'가 들어간 헌법을 작성하여 제출한다. 원하는 것만 내주고, 그 외의 것은 지키려고 한 것이다. 맥아더는 이 법안을 아주 마음에 들어 했고 1946년 2월 22일, 각의를 거쳐 일본국의 정식헌법이 태어난다.


문제는 이 헌법이 현재 일본 정부, 극우의 콤플렉스이며
그 피해자 중 하나가 바로 한국이라는 점이다.


현재 일본회의의 멤버가 장악한 일본정부내각의 입장은 현재 일본국의 헌법은 미국이 만든 것일 뿐 일본을 위한 헌법은 아니며 자주국가인 일본의 것은 아니라는 입장이다. 이런 목소리는 현재 일본 내각 전체에서 커져가는 실정이다.


아베 신조(일본 총리): 새로운 교육기본법에 애국심을 넣었다. 현재 학교에서 나라를 위해 죽는 사람은 바보라고 가르치는 교사들이 있는데 이는 매우 부적절하다.


아소 다로 (재무상): (노인에 대해 이야기하며) 건강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세금을 내는 노력은 하지 않으면서 젊은 사람들이 낸 세금을 축내고 있다


이나다 토모미(자민당 전 방위대신): 난 정치는 국민의 생활을 중요시해야 한다는데 동의하지 않는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피를 흘릴 각오를 해야 한다.


고노 타로(자민당 방위대신): 일본 고유 영토인 다케시마(竹島: 일본이 주장하는 독도의 명칭)에 대한 일본의 주장을 (한국에) 확실히 전달해 끈기 있게 대응할 것.


나가세 진엔(자민당 전 법무대신): 국민주권, 기본인권, 평화주의, 이 셋을 없애지 않으면 자주헌법이 아니다.


사토 마사히사(자민당 참의원): 개인의 권리, 개인의 권리, 개인의 권리, 바보 같다. 더 큰 것을 지키기 위해서 개인의 권리를 억누르고 나라를 위해 죽게 한다는 규정이 없다. 긴급조치를 법률에 넣으면 부하에게 죽으라고 명령할 수 있다.


니시다 쇼지(자민당 참의원): 18살에 국방의 의무는 당연히 부여되어야 한다. 국가를 지키는 의무가 있기에 선거권을 갖는 것이다. 현재 헌법에는 국방의 의무는 적혀 있지 않지만 선거권을 가진 주권자에게 국방의 의무가 없는 게 말이 되는가?


보면 알겠지만 이름을 지우고 보면 나치 독일이 한 소리라고 해도 전혀 위화감이 없다.


677185_385083_4818.jpg 아베, 일본회의가 완성시킨 것은 사실상의 파시즘 정권이었다.


강요로 만든 헌법은 극우의 콤플렉스가 되었다.
콤플렉스가 파시즘이라는 열매를 맺어버린 것이다.


전, 현재 내각의 핵심들 그리고 현재 일본의회의 멤버들은 의정활동, 강연, 방송 등을 통해 미국 GHQ의 압력에 의해 만들어진 일본국 헌법,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부정하고 있다. 이 대상은 단순히 한국만이 아니라 러시아, 중국, 대만 등 다른 나라와도 마찬가지다.


왜 이들은 패전을 콤플렉스로 여길까? 그들이 사실상 메이지 정부를 계승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아베 신조가 극우의 별이 된 이유도 유신의 주역인 조슈번의 적통이기 때문이며, 그들의 전성기는 패전 이전이었고, 그때 운영하던 구헌법이 권력을 독점하는데 더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국가위기가 올때마다 권력이 불안한 것은 패전 때문이니 이 흔적을 없애는 것이 살길이라고 믿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렇게 그들은 전범이라는 과거에 콤플렉스를 느끼며 이에서 벗어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고 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목표는 한국이 된다.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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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조선 리더십 경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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