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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애할 권리 Jul 21. 2016

뮤지컬 <페스트>

주크박스 뮤지컬의 한계와 가능성

서태지 음악

거두절미하고 뮤지컬 <페스트>의 첫 번째 방점은 '서태지'다. 서태지의 곡으로 주크박스 뮤지컬을 만든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시작부터 많은 기대와 관심을 받았다.


'아... 서태지라니! 서태지라니!... 그게 가능해?'


가요로 뮤지컬을 만드는 게 놀라운 건 아니다. 이영훈 작곡가의 곡으로 만든 <광화문 연가>나 김광석의 곡으로 만든 <그날들>과  <디셈버>, 90년대 히트 곡을 메들리로 엮은 <젊음의 행진> 등 주크박스 뮤지컬은 그동안 꾸준히 시도됐었고 어느 정도 흥행도 따랐다. 이미 만인이 사랑하는 검증된 멜로디와 서정적이고 서사적인 노랫말은 관람 장벽이 높은 뮤지컬에서 대중을 사로잡을 수 있는 탐나는 자재이기도 했다. 이런 작품에는 대부분 고인이 된 뮤지션에 대한 추모나, 복고적 트렌드를 따르는 기획 의도가 깔려있었다. 마케팅 흥행 포인트 역시 그 시절에 대한 '추억'과 '기억'에 맞춰있었다.


그런 면에서 '서태지'의 음악은 매력적이면서도 도전적인 선택으로 볼 수 있다. 90년대 음악과 문화를 선두하고, 활동 중단을 선언한 그 순간까지도 엄청난 영향력이 따랐던 그다. 그런 서태지의 음악을 변주한다는 게 결코 만만한 작업은 아니었을 터. 창작자 입장에서는 조심스럽고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그를 따르는 마니아층은 여전히 존재하고, 그의 움직임은 지금도 유효한 힘을 가지기 때문이다.


서태지 음악의 장르적인 성향은 퍼포먼스나 쇼에 최적화되어 있거나, 당시 시대를 반영한 반항과 사회 비판의 메시지를 담은 곡이 많다. 이런 도발적인 서태지 음악이 뮤지컬 안에서 어떻게 녹아들 수 있을지, 수많은 히트곡 중에 어떤 곡이 넘버로 구성될지, 편곡은 어떻게 될지... 그 모든 게 초미의 관심사였다. 뮤지컬은 결국 음악과 드라마. 서태지의 강렬한 음악을 소화하려면 드라마 역시 그 접점이 자연스럽게 맞물릴 만큼 컨셉추얼 하고 강렬해야 했다.



소설 '페스트' VS 뮤지컬 '페스트'

ⓒ 뮤지컬 <페스트> 공식 이미지

결국 소설 '페스트'가 이야기 모티브로 안착했다. 프랑스 작가 알베르 카뮈가 1947년에 발표한 작품이다. 뮤지컬 <페스트>의 프로듀서는 한 인터뷰에서, 여러 가지 대본을 만들다가 카뮈의 '페스트'를 읽게 되었는데 '암울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면서도 희망을 전하는 방식이 서태지의 노래와 닮았다'고 전하며 '페스트'를 선택한 동기를 밝혔다.


원작의 지리적 배경인 '오랑'과 주요 인물인 '리유', '그랑', '타루'의 캐릭터는 대체로 유지했다. (일부 인물은 축소되고 성별이 바뀌기도 하였다) 도시에 퍼진 전염병과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권력에 대항하는 시민들의 노력을 통해 정의와 희망을 보여주겠다는 주제 의식도 유사하게 올라탄다. 노우성 연출은 '저항을 잃어버린 시대'라는 접점으로 원작의 줄기를 따라가고자 했다. 그 시작의 하나로 시대를 미래로 돌렸다. 뮤지컬 속에서의 '오랑'은 인간의 감정을 시스템이 통제하고, 기술과 돈을 가진 권력자가 모든 걸 지배하는 세상이다. 시민들은 외부 정보와 차단된 채 중앙 시스템이 지시하는 대로 수동적으로 살아간다.


하지만 이런 단순한 설정이 무리한 전개를 만들었다. 뮤지컬 <페스트>가 취한 미래적 상황은 지금의 시점에서 다소 낡은 상상이다. 정보와 기술력의 진화 과정을 무시하고 '통제'만 남겼다. (차라리 카뮈가 활동하던 시기에 이렇게 썼다면 설득력 있게 다가왔을지도 모르겠지만....) 막이 열리고, 해설자를 맡은 랑베르가 등장해 장황하게 배경을 설명하지만, 사전에서 쏟아져 나온 듯한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단어들은 극에 몰입하기도 전에 피로도를 주었다.


ⓒ 뮤지컬 <페스트> 공식 이미지

드라마가 과거를 배경으로 하면 역사적 정보에 충실한 만큼 섬세한 극이 나온다. 미래를 배경으로 할 경우 작가가 통제할 수 있는 기발한 상상에 완성도가 달린다. 아직 세상에 없는 무의 세계를 그리기 때문에 작가는 모든 걸 새로 만들어 배치시켜야 한다. 그래서 더 치밀해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뮤지컬 <페스트>의 세상은 추상적이고 모호하다. 인간의 마인드까지 컴퓨터로 조종하는 고도화된 세상을 설정해두고 이를 관리하고 움직이는 상황은 지극히 원시적이다. 일례로 임상 실험도 안 한 신약을 (도덕적이고 신중한) 의사가 생중계로 치료해 보이는 것이나, 이를 본 사람들이 죽어가는 환자의 고통에 공감하고 용기 내 희망을 갖게 된다는 전개는 이런 시대적 배경에서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러다 보니 인물은 입체적으로 살아나지 못하고, (생존이 걸린 혼란 속에서도) 작위적이고 상투적인 행동만 보인다.


장황하게 펼쳐진 극한 상황을 두고 서브 플롯은 단순한 로맨스에 그쳤다. 장면의 상황을 변환시키는 동기가 전부 멜로인 것도 극을 단순하게 만들었다. 더구나 그 어려운 환경 속에서 피어난 사랑의 감정도 커브 없이 한결 같다. 애정 표현을 하는 방식마저 아주 원초적으로 반복된다. 단조로운 감정선과 표현적 한계는 서브 드라마의 재미도 반감시켰다.


등장인물의 활용도 아쉽다. 의사, 기자, 정치인, 공무원, 신부 등 원작 안에 등장하는 인물은 저마다 사회 풍자를 담아 명백한 역할을 한다. 약자와 강자, 통제와 자유 등 그들의 직업과 가치관은 시대와 사회를 대변한다. 인물들이 자신의 위치에서 겪는 내적 갈등도 주제에 효과적으로 접근할 수 있게 도와준다. 반면 뮤지컬에서는 원작의 직업적 포지션을 일부 가져왔지만 그 이상을 보여주지 못했다. 박물관 큐레이터나 식물학자 등 시대를 접목한 새로운 롤을 주기도 했지만, 결국 전형적인 러브 라인을 만들기 위한 매개체로만 쓰일 뿐이었다. 극 속에서 인물들은 그들의 직업적 열망과 개인의 욕망을 드러내지 못하고 애매하게 변죽만 울려댔다. 자신이 해야 할 말을 잃어버린 인물들이 매력적이긴 어렵다.


ⓒ 뮤지컬 <페스트> 공식 이미지

주크박스 뮤지컬의 피할 수 없는 한계인 '송 모먼트'는 이 작품에서도 여전히 힘들어 보였다. 노우성 연출은 이전 인터뷰에서 '캐릭터가 노래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주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뮤지컬에서 노래를 부르는 상황은 극적으로 자연스럽게 터져 나오는 '감정의 순간'이어야 한다. 갑자기 '지금부터 노래를 시작할 테니 잘 들어 보라'는 식의 대사나, 리프라이즈를 위해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무 뜬금) 기타 연주를 하는 행동은 드라마를 섬세하게 고려했다고 보기 어려웠다. 이미 독립적인 곡으로 존재하는 가사를 극 속에 딱 맞는 맥락으로 연결하기엔 분명 무리가 있었을 것이다. 전반적으로 가사 텍스트를 직관적으로 연결시킨 부분은 거의 없었다. 전체적인 맥락이 가지는 분위기와 메타포에 집중해 배치했다. 하지만 그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그 노래를 부르는 타당한 분위기마저 조성해주지 못한 건 아쉽다.


ⓒ 뮤지컬 <페스트> 공식 이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빛난 가능성

대본의 아쉬움이 있었지만, 뮤지컬 <페스트>는 기존의 주크박스 뮤지컬이 가지는 음악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과 성과도 보였다. 앞서 말했듯, 이 작품의 최대 장점이자 난관은 '서태지 노래'에 있었다. 작품의 음악감독이자 편곡을 맡은 김성수 음악감독은 서태지 노래가 가진 개성과 시대정신이 깃든 장르적 색깔을 자연스럽게 극 안으로 끌어와 접목시켰다. 얼핏 들으면 이 작품을 위해 따로 만든 '완전한' 뮤지컬 넘버 같다. 그만큼 이음새가 좋다. 한 곡 안에서도, 전체 송 리스트의 구성에서도 드라마의 서사가 느껴진다. 오케스트라 편성을 통해 기존의 솔로곡을 듀엣과 트리플, 합창으로 확대해 대극장에 맞는 볼륨감을 키우는데도 성공했다. 크로스 오버로 변주된 음악은 각각의 상황에 맞게 드라마틱한 서사로 리드했고, 인물의 심리적 긴장과 이완의 매개체로도 제 역할을 했다.


ⓒ 뮤지컬 <페스트> 공식 이미지

무대와 영상의 조화도 돋보였다. (미래적 배경과 어쩌면 가장 잘 맞아떨어진 부분이기도 하다) 정승호 무대 디자이너는 삭막하고 온기 없는 병든 도시와 그들이 꿈꾸는 희망적인 지상 낙원의 모습을 공간적으로 잘 구현해냈다. 영상도 무대 구획에 맞게 안정적으로 적용한 모습이었다.


화려한 캐스팅을 자랑하듯 전반적으로 주조연 모두 안정적인 연기와 노래를 선보였고, 앙상블의 호흡과 연기도 단단했다. 하지만 강렬한 클라이맥스, 그러니까 인상적인 한방이 없다는 건 아쉬운 점이다. 배우들이 활약할 수 있는 모먼트도 충분치 않아 허전함도 있었다.


뮤지컬 <페스트>는 아쉬움도 있었지만 가능성도 보여준 창작극이다. 뮤지컬에서 귀에 익숙한 멜로디가 들린다는 건 굉장한 치트키다. 대중가요의 음악적 베리에이션의 확장을 보여준 만큼, 향후 드라마까지 극적인 조화를 이룰 수 있게 섬세한 접근과 고민이 동반되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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