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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볼 일 없는 인생

시&에세이

by 여상

[ 별 볼 일 없는 인생 ]


오른 손바닥을 가로 질러

바닥이 깊은

강물이 흐른다니


슬픔에 빠진다고

사람 목숨 쉽게 가는 게 아니다

죽을만큼 아프지 죽지는 않고

굶지는 않을 만큼 늘 모자라게

돈이 있단다


닭처럼 모이 떨어진 곳을 알고

둥근 콧등 주변으로

사람들이 잘 모여

호되게 외롭지는 않다고 하니


복채는 호쾌하게

오만 원을 내밀었다.


별 볼 일 없지만

별일도 없는

좋은 팔자를 타고 났다는데




essay

동갑내기 여사친은 신기(神氣)가 있다고 했다. 어느 날 저녁에 반주까지 한 잔 걸치고는 느닷없이 손을 내밀어 보라는 것이다. 그리고는 내 손끝을 잡고 유심히 들여다 보면서 점을 보기 시작했다. 그녀는 두루뭉실하게 과거를 맞혀 나갔다. 누구나 그 만큼 성공했을 것이고, 누구나 그 만큼 힘들었을 일들을 읽어 냈으니 내게는 신통방통하게 딱 맞는 점이렸다. 다음은 미래를 점치기 시작했다...


몇 몇 사람이 이어서 점을 보았고, 감탄을 하였고, 강탈 당한 복채를 모아 치킨과 맥주를 샀다. 그날 밤 우리는 늦게까지 떠들석하게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모두 그럭저럭 잘 산다고 했으니 어찌 즐겁지 아니하겠는가! 이런 요망한 점쟁이를 봤나!


그 후로 몇 년이 지났다. 그녀가 점친 나의 미래는 용하게 들어 맞았다. 나는 딱 굶지 않을 만큼 돈을 벌어 썼고, 여전히 두드러지게 생산적이지 못했으며, 그래도 죽지는 않았고, 별일 없이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었다. 아주 용한 점쟁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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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어서는 별일이 있어야만 했다. 그래서 별일이 없으면 별일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하나 둘이겠는가. 과음 때문에 사고를 치기도 하고, 입 바른말 하다가 미움을 사 승진에서 떨어진 적도 있었다. 잘 다니던 직장을 때려 치우고 뛰쳐나가 창업을 했다가 혼쭐이 나기도 하고, 굳이 안 해도 되는 일을 벌여 산전수전을 겪기도 했다. 당연히 좋은 별일들도 많았다. 해준 것 없는데도 착하고 건실하게 살아가는 두 아이도 별일이 내게 준 선물이다. 그렇게 별일들 덕분에 인생에 추억과 애환이 가득하고, 그 동력으로 여기까지 살아왔으니 그것들을 어찌 미워만 하겠는가.


나이가 들어 한 발 떨어져 지내며 가끔 넘어다 보는 세상에는 별일이 지천이다. 도대체가 만만한 소식이 없는 것은 원만한 일들은 뉴스거리가 되지 않기 때문이겠지만서도, 어떨 때는 소식에 담긴 충격파로 몸이 움찔할 때도 있다. 어느 나라 대통령이 자국의 국방부를 전쟁부라고 호칭할 때는 '이거 큰일이다' 할만큼 염려가 되었다. 지구촌을 뒤흔드는 관세 파동은 또 어떠한가.




작년에 이런 저런 이유로 정기건강검진을 미루다가 급기야 년말이 다 되어서야 밀린 숙제 하듯 달려가 실행하게 되었다. 검진결과는 며칠 후 바로 나왔는데, 나이가 있다보니 특별한 증상이 없는데도 검사지 봉투를 여는 순간에는 살짝 긴장감이 왔다. 결과는 '별일 없음'이었으니 달리 말하자면 퍼펙트 하다는 뜻이 아닌가! 가족력이 있는 심혈관계는 오히려 나이보다 5~6년 젊다는 진단결과가 선물같이 느껴졌다. 어려서 상장을 받은 것처럼 기쁜 마음에 검사지를 곱게 접어 서랍에 넣어 두었다. 다시 꺼내볼 것도 아니면서...

'별일 없음'이 주는 안도감이란!


오늘도 어제처럼 흐르는 개천물, 늘 같은 자리에 앉아 있는 듯한 큰 강돌들, 바람에 살랑살랑 춤을 추는 나무들, 깜박 시선을 놓친 사이 어느새 익어가는 열매들. 바람이 수초를 흔들고, 가을 하늘로 새들이 몇 마리 날아가는 별일 없는 하루이다.


저녁 식사 후에는 가끔 단골카페에 간다. 약속을 따로 하지 않아도 한두 명 가족같은 이웃이 앉아 있기 마련이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들, 마을 소식, 누가 어디 갔다더라, 뭘 샀다더라, 이번 겨울 춥다더라,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다가 가끔 정치 이야기로 번지면 다투기도 한다. 물론 그 다툼이 원한으로 번지지는 않는다. 내일도 우리는 웃으며 만나, 등을 기대며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와 책을 몇 장 넘기다가 마시던 차를 들고 나가 별밤을 올려다 본다. 나는 별보기를 무척 좋아한다. 별은 약속된 방향으로 운항한다. 별일 없이.




"별일 없는 하루를 사는 것이 별일이다." 법정 스님이 말씀하셨다. 이 나이가 되어서야 그 말씀을 뜻을 조금 알 것 같다. 무사시호시(無事是好時)라고 했던가. 또 어떤 글에서 스님께서는 "별 볼 일 없는 사람이 되지 말라."고도 하셨다. 가끔은 밤하늘의 별을 쳐다 볼 정도의 마음 여유는 가지고 살자는 뜻을 우스갯 소리로 말씀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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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그 요망한 점쟁이의 점괘풀이는 오만 원 짜리 치고 아직은 잘 들어맞고 있는 셈이다. 그녀의 신기(神氣)를 빌리자면 별 볼 일 없는 나의 말년은 딱히 별일이 없다고 했으니, 이 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그 축복이 무리없이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오늘밤은 특별히 별님께 빌어야겠다.





#손금 #점괘 #별 #운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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