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에세이
[ 만수천에서]
지난밤 거친 꿈이
눈꼽처럼
마뜩잖다
아침 새 울음에
찻잔을 기울이는 내 손목은
왜 부끄러운가
딱정이로 마른 것들
털어야겠다
오래된 부적들도 떼어
던져야겠다
간 밤 쏟아진 빗물에
萬壽川 냇바닥이 뒤집혔나
오래 살다 보니
큰 돌마저 저만치 굴렀더라
비 그치고 날 저물면
등 딱딱한 곤충으로
늙은 나무의 자식이 되어
나이테 어디쯤에 숨어야겠다
essay
때로 꿈은 내가 땅을 파고 묻어버린 것들을 사정없이 파헤쳐 꺼내 놓는다.
그것들은 책상 위에 순서 없이 펼쳐 놓은 여러 장의 스냅사진처럼 어수선하게 시선을 어지럽힌다. 장면 속의 어떤 것은 모양이 과장되거나 일그러져 있기도 하고, 어떤 것들은 다른 색깔이 입혀져 있기도 하다. 유추할 수 있는 것들이 있는가 하면, '나의 무의식이 왜 이런 영상을 지어냈을까?'하고 갸우뚱하게 만드는 것들도 있다. 회피할 수 있는 것들은 아니다. 다가오면 마주해야 한다.
막 잠에서 깨어 커피잔을 들고 가라앉은 마음으로 꿈 조각들을 뜯어본다. 우울한 감정과는 조금 다른, 조용히 침잠하는 것과 유사한 기분일 것이다. 과거의 일들이 머릿속을 배회하고, 배회하는 광장에서 대체로 죄의식과 열패감이나 후회 같은 것들을 줍게 된다.
늘 그렇지는 않지만 문득 이런 아침을 맞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의례를 치르듯 이 시간을 가진다.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남아 있던 몽롱함이 사라져 가면 기억 저 편에서 지저귀듯 새소리가 들려온다. 생동감 넘치는 새들의 수다소리, 개울에 넘쳐흐르는 물소리, 얼굴과 손등을 어루만지는 부드러운 바람과 빗살로 부서지며 공간을 가득 채운 햇살이 자아낸 아침. 오늘의 선물이 도착했다. 선물보다 값진 하루가 시작된다.
산 가까이 살아서 번뇌가 사라진다면 십수 년을 살았으니 지금쯤은 도인이 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그저 만날 때마다 달래고 야단치고 설득해야 하고, 젖은 것은 볕에 말리고, 허울은 벗겨 가면서 조금씩 조금씩 털어내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어 보인다. 다만 피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가끔은 도망치기도 한다. 그러면 다시 만나야 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구상시인의 싯귀처럼 '꽃자리'가 따로 있겠나. 업보를 더하지나 말자고 조심하면서도 어김없이 업보를 지으며 또 하루를 즐겁게 살아갈 뿐이다. 어느 즈음엔가 단단해질 날이 올까? 한 가닥 지혜라도 얻어 마음 의지하며 살 날이 올 것이라고 공상하며.
#꿈 #번뇌 #산 #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