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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Jul 20. 2018

대책 없이 퇴사했습니다. 괜찮은데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으면 뛰쳐나오세요. 별일 없더라고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저는 좀 쉬어야 할 것 같아요.


  대표와 짧은 면담을 끝냈다. 주말 내내 좌뇌 우뇌를 왕복하던 그 말을 드디어 입 밖에 냈다. 걱정했던 후회도 기대했던 통쾌함도 없었다. 남은 휴가를 털어 쓰고 사직서를 제출했다. 모든 절차는 내 요청대로 빠르게 진행되었다. 짐을 정리하고 동료들과 인사를 나눴다. 회사에서 보낸 마지막 일주일 동안 가장 많이 한 말은 이거였다. 

"이직할 곳이요, 아직 알아보지도 않았어요. 쉬엄쉬엄 하려고요!"



  사실 좀 더 버텨볼 생각이었다. 이직할 곳을 정해 두고 퇴사해야 한다는 건 직장인 상식이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세상 사는 게 생각처럼 되진 않았다. 회사를 조금이라도 더 다녔다면 몸도 마음도 병원 신세를 졌을 거다. 그걸 알아채게 된 건 회사에서 창밖을 보다 '그냥 뛰어내릴까...?' 생각했을 때다. 정말 뛰어내릴 마음은 없었지만 잠깐이나마 그런 충동이 생겼다는 것 자체가 당황스러웠다. 잦은 야근, 비합리적인 업무진행, 한두 단어로 설명할 수 없는 많은 일들이 내 기력을 바닥나게 했다. 화를 내고 짜증을 부릴 힘조차 없으니 사는 게 무색무취 무미건조해졌다.


  재미만 없으면 어떻게든 버텨 보겠는데 당장 건강에도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얼굴에 자꾸 열이 오르고 머리가 핑 돌더니, 말도 안 되는 업무지시를 받고 숨이 막히는 것까지 경험했다. 이렇게 계속 회사를 다니면 분명 큰일이 날 거다. 그럼 회사를 그만두면? 퇴직금이 있으니까 당분간은 큰일이 나지 않을 거다. 답 나왔다. 답 없는 퇴사가 지금 나에게는 답이다.


  그리고 한 달째 시간을 펑펑 쓰고 있다. 하루 종일 휴대폰 게임만 해 보기도 하고, 계획 없이 훌쩍 여행을 다녀오기도 하고, 펼칠 엄두를 못 냈던 두꺼운 책을 큰맘 먹고 읽어치우기도 하고. 평일 대낮이 한가하니 미용실도 병원도 당일 예약으로 다녀왔다. 퇴근 시간보다 일찍 문을 닫았던 도서관도 맘껏 간다. 지갑 하나 달랑 들고 걷는 길, 하늘은 파랗고 스쳐가는 아이는 귀여웠다. 마음에 여유가 생기니 웃을 일이 많이 생긴다.



  처음부터 여유를 즐길 수 있던 건 아니었다. 퇴사하고 며칠 동안은 가만히 침대에 누워만 있어도 죄지은 듯 불편했다. 이렇게 아무것도 안 해도 괜찮나? 정말? 다음 직장이라도 어서 알아봐야지. 그런데 자기소개서 한 줄조차 쓸 수 없었다. 나를 뭐라고 소개해야 할지 막막했다.


  내가 자소서에 아무것도 쓸 수 없었던 건 무엇 하나 확신을 가지고 나를 소개할 수 없어서였다. 새로운 시도에 거리낌 없고, 뭐든 빨리 배우고, 무엇보다 밝은 에너지가 있다는 게 내 장점이었다. 그런데 그걸 지금도 장점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걱정이었다. 파도에 떠밀려 모래사장에 내팽개쳐진 해파리처럼 아무것도 못 하는 게 지금 내 모습 아닌가. 아무리 좋은 말만 쓰는 자기소개서라지만 허세나 거짓말을 담기는 싫었다. 자소서를 쓸 수 없는 취준생이라니. 어쩌면 회사 괜히 나왔나 싶었지만 이미 엎어진 물이었다.


  그 엎어진 물이 마를 만큼의 시간이 지났다. 잘 먹고 잘 자고 푹 쉬었다. 정신을 차리니 어느새 심심해졌다. 뭐든 하고 싶어졌다. 몇 주 쉬다 보니 쉽게 되찾지 못할 것 같던 집 나간 에너지가 어느새 돌아와 있었다. 좋은 책을 읽고 영감을 얻은 것도, 특별한 사건이 있던 것도 아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변화가 생겼다. 어떻게 이게 가능하지? 싶지만 놀랍게도 나는 제법 괜찮아졌다. 뭐라도 하고 싶은 마음에 머리를 굴리는 건 정말 오랜만이다. 일도 다시 시작하고 싶다. 이렇게 글도 다시 쓰고 있다.



  며칠 잠을 못 잔 사람이 기운 없이 비척비척 걷고 꾸벅꾸벅 조는 건 잠이 부족해서다. 원래 매사 긍정적이고 근면 성실한 사람이라도 정신력에는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마찬가지다. 제아무리 한을 웃음으로 풀어내는 해학의 민족의 피가 흐른다지만 밤낮없이 주말없이 메일함만 전전긍긍 바라보는 게 일상이 되면 이상해진다. TED 영상 수십 개 보고 동기부여해 봐야, 최신 기사 수백 개 읽고 자극받아 봐야 이상 상태가 해제되지는 않는 거였다.


  이직할 곳은 정해지지 않았지만 퇴사부터 해야겠다면 열에 아홉은 말린다. 이직 상황에서 직장인과 백수는 내밀 수 있는 협상 카드 자체가 다르다고. 커리어에 이유 없이 공백이 있으면 안 된다고. 맞는 말이다. 그렇지만 커리어보다 더 소중한 건 나 자신이다. 당장 나를 구할 유일한 방법이 퇴사라고 확신한다면 탈출하자. 나 자신을 잃을 만큼 몸도 마음도 상했다면, 그동안 해온 일들로 포트폴리오를 꾸릴 만하다면, 모아 둔 저금이나 퇴직금이 있다면 대책 없이 잠깐 쉬는 것도 생각보다 괜찮다. 일단 나부터 살고 봐야지! 말리지 않을 열에 하나로서 이 글을 쓴다.



* 매주 수요일, 취향 가득 담긴 제 글을 뉴스레터 [여름의 솜사탕]에서 만나실 수 있습니다! 이것저것 공유하는 페이스북 페이지 [매일매일 읽을거리]도 소소하게 운영 중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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