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클라토비
가을이 깊어질수록 풍경은 말수가 줄어듭니다.
햇빛이 서서히 식어가는 10월의 체코는 공기마저 금빛에 젖어 있습니다.
마치 세상의 모든 노랑이 한자리에 모여 숨을 고르듯 조용히 빛을 고정해 둔 풍경.
잎사귀 하나하나가 작은 조각처럼 반짝이고, 거리마다 부드럽고 따뜻한 노랑이 겹겹이 번져 있습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자작나무의 잎이 반짝일 때면 빛의 파편들이 흩어지는 듯했지요.
클림트의 황금빛이 캔버스 밖으로 흘러나온다면 아마 이런 모습일 것입니다.
너도밤나무와 가문비나무는 밀짚·버터·오커·허니 브라운 같은 톤으로 천천히 깊어져 마침내 가장 어두운 시나몬 브라운의 문턱에 다다릅니다.
가로막는 산도, 높은 건물도 없이 땅과 하늘이 부드러운 선 하나로 이어지고,
라이그래스 들판 가운데 서 있는 작은 나무 몇 그루를 몇 번이고 뒤돌아보게 만들지요.
유럽의 로드 트립이 특별한 건 바로 이런 순간들 때문입니다.
길을 달리는 일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어떤 장면 속으로 들어가는 것,
오늘의 내가 또 하나의 필름을 통과해 느릿하게 다음 장면으로 옮겨갑니다.
클라토비에 도착해 돌담 사이의 작은 문을 지나자 노란 잎들이 바닥을 가득 덮고 있었습니다.
가을이 깔아 둔 카펫을 걸으며 들리는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조용한 리듬처럼 마음에 남았지요.
광장에는 뜻밖의 풍경이 펼쳐져 있었어요.
커다란 스크린 앞에서 사람들이 자동차 경기를 지켜보고 있는데 스폰서가 현대자동차였습니다.
작은 도시의 중심에서 펼쳐지는 레이싱이 이질적인데도 묘하게 어울리는 장면이었습니다.
오후의 클라토비는 마른 벼를 비벼 놓은 듯한 노란빛으로 흑탑과 백탑의 실루엣 너머로 미세하게 굴절된 빛이 천천히 퍼졌습니다.
24시 시계가 흑탑 벽에서 묵묵히 돌고 있고, 도시는 오래된 서랍을 연 듯 고요하고 은근한 향을 뿜어냈지요.
노랑, 연갈색, 빛바랜 황토, 저녁빛의 브론즈 같은 톤이 서로 경쟁하지 않고 한 화면에 고르게 스며 있었습니다.
구시가 골목의 단정함은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과하게 꾸미지 않은 파스텔 건물들,
오래된 상점 문의 금속 손잡이,
누렇게 빛이 든 유리창—
모든 것이 작고 조용하지만 묘하게 깊었으니까요.
과장되지 않은 맛의 잘 구운 돼지 족, 감자, 슈니첼, 적양배추 절임에 200ml의 앙증맞은 필스너 한 잔.
그 담백한 한 끼는 이 도시가 지닌 시간을 닮아있었습니다.
카페 올리버에 들어서자 진한 커피 향이 문틈으로 스며 나왔고,
창가 테이블 위의 노란 잎 한 장이 늦은 오후의 빛을 천천히 받아내고 있었습니다.
커피잔 가장자리를 금빛으로 스치던 햇빛은 도시의 오후를 잔잔하게 정리해 주었지요.
클라토비에서 보낸 오후는 눈에 띄는 장면 하나 없이 조용하게 스며들었습니다.
크게 감탄할 만한 무언가가 없어도, 그 잔잔함이 오히려 다음 여정을 위한 작은 숨결이 되어 주었지요.
가끔은 이런 하루가 필요합니다.
여행자들도 계절처럼 빛이 식어가는 시간을 지나야 다시 새로운 장면을 받아들일 자리가 생기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