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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지 Jul 27. 2024

교육의 평등에 대한 속얘기

약간 진지하지만 뻔하고 그렇지만 한 번은 하고 싶었던.

공부를 못 하는 아이들을 싫어한 건 아녔다.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 '성적=노력'이라는 공식은 꽤 어린 시절부터 굳건히 자리 잡았던 것 같다. 나는 놀고 싶은걸, 하고 싶은 걸 참는 '노력'을 하고 '공부'를 한 성실한 사람이니까. 공부를 못 하는 아이들은 그 노력을 하지 않은, 자신의 의무에 최선을 다하지 않은 존재라 생각했다. 열심히 노력한 '개미'인 내가 '배짱이'인 그 아이들보다 덜 벌고, 덜 좋은 집에 산다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는 불평등한 세상이었다.

'노력한 만큼 잘 사는 세상이 평등한 거지!'


7년 전, 지금의 동네에 이사를 와 2살 어린 동네 엄마를 알게 되었다. 170이 넘는 큰 키와 환한 웃음이 파란 하늘처럼 좋아지는 친구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에겐 우리 아이들보다 훨씬 큰 아이가 둘 있는 걸 알게 되었고, 다른 동네 사람들에게 '어린 나이에 애를 낳은 (놀던) 엄마'로 은근히 말이 돈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가끔 운동이 끝나면 나를 자신의 집에 초대해 점심을 차려주었다. 어린아이들을 방패 삼고 있었지만 늘 집이 더러웠던 나는 언제 가도 늘 모델하우스 같은 그녀의 집이 참 신기했다. 내게 점심을 차려주고 이야기를 나누는 와중에도 수선스럽지 않은 부지런함으로 집을 정리하는 그녀가 존경스러워 어떻게 하면 이렇게 살 수 있는 건지 진심 어린 눈으로 물었었다.

"언니도 집 없이 살아봐. 짐 많아지는 거 무서울걸?"


웃으면서 툭 던진 말치곤 한 번에 이해가 되는 말이 아니라서 눈만 꿈벅꿈벅하는 내게 그녀는 무심히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해 주었다. 아버지의 문제로 인해 중학생 때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져 살게 되었고, 자신은 큰언니와 함께 원룸에 월세를 내며 살았는데 언니가 가끔 남자친구와 동거를 하게 되면 자신만 두고 집을 나갔었단다. 그때마다 홀로 남겨진 자신은 월세를 아르바이트비로 감당하거나 더 싼 집으로 옮겨야 했기에 그때의 습관이 몸이 배어 지금도 짐을 편히 들이지 못하고 늘어놓지 못한다는 그녀의 고백. 덤덤한 그녀의 얼굴과 달리 나는 쉽사리 다음 말을 꺼내지 못했다. 내가 전혀 상상하지 못한 10대의 삶이었다. 10대를 그리 힘들게 보내고도 전문대에 입학했으며, 아이를 일찍 갖게 되었지만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 무던히 노력하고 아끼며 사는 그녀의 모습을 알고 있는 내게 '노력한 만큼 사는 세상이 평등한 거지! 그러니까 공부를 안 한 너는 나와 같은 수준으로 사는 걸 용납할 수 없어!'라고 외친다는 게 얼마나 우스운 일일는지. 나는 그날 처음 나만의 알을 깼다.


지방의 제약회사 공장이라는 내 직장 특성 속에서도, 본업 외에 갖고 있는 나의 부캐들 속에서 만나는 많은 아이들 속에서도 나는 '성적=노력'이라는 공식이 이 세상 속 어마 무시한 불평등을 평등해 보이게 만드는 마법의 공식임을 수없이 느낀다. 그 공식이 통할 수 있는 아이들은 이미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본적인 토대가 완성된 가정의 아이들이다. 뻔하게는 재력의 차이부터 지역, 부모의 능력 차이까지. 교육은 결코 평등할 수 없다. 지금처럼 공교육이 무너지고 사회보다 개인이 우선시되는 세상에서는 그 격차가 더욱 심해질 것이다. 그럼에도 이 세상은 끊임없이 노력이 개인만의 능력인 것처럼 이야기하면서 결국 그 노력을 게을리한 사람들을 무시하고 기만하는 분위기를 조성한다. 차라리 언젠가 들었던 어느 분의 이야기처럼 그런 차이를 Lucky와 Unlucky로 보는 것이 백번 천 번 현명한 일이다. 운이 좋게 교육의 기회를 얻은 사람들은 겸손한 태도로 너그러움을 가지고 살아야 하고, 운이 좋지 못했던 사람들도 자신의 상황을 받아들이되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자신의 상황 자체를 좀 더 나아지게 할 수 있는 근본적 문제 해결에 집중하는 게 맞다. 그런 때에 도움을 줄 운 좋은 사람들이 필요한 것이고 말이다. 그런 운 좋은 이와 운이 좋지 않은 이의 합이야말로 교육의 평등을 향한 가장 바람직한 길이 아닐까.

교회 선생님 중 좋지 않은 상황에서 자라고 있는 아이들을 위해 애쓰는 분이 계시다. 하루 종일 부모님의 손길이 닿을 수 없는 아이들을 위해 토요일이면 아이들을 교회로 불러 운동도 시키고 점심도 먹여주려 하시고 주일에도 직접 집 앞까지 데리러 가는 수고를 하시면서까지 방치될 아이들을 품으려 애쓰신다. 그러나 아이들은 그 마음을 모른다. 집에서 핸드폰 하는 게 좋으니까. 친구들끼리 찜질방 가는 게 좋으니까. 부모님들 역시 교회라는 종교단체가 가지는 당연함과 부담 때문인지 감사보다는 회피가 강하다. 그런 상황 속에서 속상해하시는 선생님을 보며, 나는 다시 한번 '교육은 평등할 수 없다'라는 슬픈 지론과 함께 인생을 통틀어 나를 올바른 길로 이끌어주려 진심으로 노력하는 이가 정말 흔치 않다는 걸 아이들이 속히 깨닫고 나아오게 해주시길 기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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