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그리면 기분이 나아졌다
가끔 힘들었다.
하지만 직장생활이 늘 괴로웠던 것은 아니다. 아니, 좋은 날들도 많았다. 동료들과 함께 고생하면서 일하는게 좋았고, 일이 잘 풀리면 뿌듯했고, 힘든 날에도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그러나 서른 중반이라는 나이가 되고, 내가 했던 일들이 어느 정도 반복되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난 이 일을 할머니가 되어서도 하고 싶은 걸까?'
나만의 길을 가고 싶다는 생각을 가끔 했다. 정든 직장 동료들과 서로 의지하며 비틀비틀 앞을 나아가는 여정도 더없이 좋았지만, 종착점이 안개에 쌓여 보이지 않았다. 우리가 모두 같은 곳에 도달하여 인생의 마침표를 찍는 그날까지 행복하게 공생하는건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30대 초중반을 달리던 시점에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지사로 옮기게 되었고, 미국에서 여기저기 이직을 하며 힘들게 커리어를 유지했다. 미국 생활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적지 않은 나이에 겪는 이민 생활은 결코 핑크빛은 아니었다. 그 시절 내 일상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들이 지나치게 많아지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만 하고 원하는 방향으로만 갈 수 없다는 게 인생이라고들 하지만, 내가 희망하는 바와 현실이 지나치게 불일치하면 우울증이 온다는 걸 몸소 겪었다. 숨을 참고 너무 오래 물속에서 버티는 기분이었다. 언젠가는 이러다가 죽을지도, 아니 내가 내 자신을 죽일지도 모르겠다는 무서운 생각들을 자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1년에 한두 번 정도 했던 그림을 다시 그려보면 어떨까 싶어, 2B 연필과 잠자리 지우개를 샀다. 집중하며 그림을 그리니 기분이 좀 나아지는 것 같았다. 그림 한 장에는 시작과 끝이 있었고, 내 인생에서 아무것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더라도 그림만은 내 마음대로 그릴 수 있었다.
그림을 그리면서 답답함이 해소되는 기분이 들었고, 울고 싶은 날들도 줄어들었다. 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워서 좀 더 잘 그려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어디에 가면 그림을 배울 수 있지?’
집 근처 미술학원들을 뒤져보기 시작했다.
-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