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치 못한 험난한 여정과 뜻밖의 위로
어느 가을 오후, 바티와 나는 한국어 과외 수업 일로 처음 만났었다. 우리 집 옆 공원 Jardin des plantes 온실 앞의 벤치에 앉아 어색한 분위기에 가끔씩 말이 끊기기도 하며 둘 중 누군가가 다시 말을 이어 나가고 한 사람 만큼의 거리를 두고 나란히 앉아 시선은 둘 다 앞에 놓인 나무를 향해 있었다.
그 뒤로도 함께 여행을 할 때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 도시의 식물원을 찾아갔다. 여름의 한국에서도, 매서운 겨울의 베를린에서도.
히혼 시내에서 버스를 타고 이삼십여분을 가면 나오는 25헥타르에 이르는 식물 정원에 다녀올 계획으로 셋째 날 아침을 챙겨 먹고 항구를 나섰다. 분명 방향을 잘 확인하고 버스를 탔는데 두 정거장이 채 안돼서 바티가 '우리 반대 방향 버스를 탔어'라고 해서 두 번째 정거장에서 내려 다행히 바로 반대편의 버스 정거장을 찾았다. 그렇게 버스표를 산 지 3분이 지나서 두 번째 버스에 올랐다. 바티는 버스표를 또 살 순 없다며 버스기사에게 사정을 잘 설명하겠다고 했다.
영어로 버스기사에게 표를 내 보이며 사정을 설명했으나 기사 아저씨는 우리 표를 힐끔 보더니 '표를 사야 해' 만 반복했다. 하필 어떤 네고의 여지도 없고 무척이나 원리원칙을 중시하는 완고한 사람이었던 거다. 바티 또한 물러서지 않았다. 우리가 관광객이어서, 스페인어를 못 해서 이러는 것 같다며 흥분했다. 버스는 몇 분 째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고 표를 사지 않을 거면 내리라며 그렇지 않으면 경찰을 부르겠다고까지 했다. 나는 창피했고 버스 안의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 때문에 발이 묶여 있다는 사실에 미안했고 그 둘 사이에 끼어 어찌할 바를 몰랐다. 손님 중 한 여자가 다가와 대체 무슨 일이냐고 영어로 물어 자초지종을 설명했더니 이 도시에서는 버스를 탈 때마다 표를 사야 한다고 했다. 사실 잘못이라면 버스 방향을 반대로 탄 게 잘못인 거고 우리는 선택권이 없어 보였다. 버스 기사는 정말 어딘가에 전화를 해서 경찰을 부르기 시작했고 나는 꽥 소리를 질렀다. 제발 그만 하자고. 그러고는 급하게 동전을 꺼내 두 사람분의 버스값을 냈다. 그러자 버스기사는 바로 출발했다. 나와 바티는 각각 다른 좌석에 앉아 한마디 말도 없이 갔다. 목적지에 도달 해 입장료를 사고 정원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나대로 바티는 바티대로 말들을 쏟아냈다. 우리의 목소리는 점점 커져 갔고 끝끝내 서로를 설득시키거나 이해시킬 수 없는 걸 깨닫고 거리를 두고 걷기 시작했다. 나는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했고 나보다 두 배는 넓은 선인장 잎 뒤를 서성거리며 그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 넓은 공원을 헤매며 걸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만연한 초록 속에 있으니 마음이 점점 차분해졌다. 그러다가 어느 지점에선가 우리는 다시 만났고 같이 말없이 걸었다. 2시가 넘어가고 있었고 하나뿐인 스낵바에 들어갔다. 간단한 샌드위치라도 있을 줄 알았는데 과자나 음료뿐이라 어디에 가면 식사를 할 수 있는지 물었더니 맞은편에 위치한 문화예술기관 안에 식당이 하나 있다고 했다. 그때까지도 완전히 풀리지 않은 기분으로 그 큰 건물을 향해 허기진 배를 안고 15분쯤을 걸어갔다.
건물 안팎을 더 헤매다가 찾아 들어간 식당에선 엉트레, 플라, 디저트에 각각 2개의 초이스가 있었다. 오픈 키친 형태로 길쭉한 맨, 배 나온 맨, 세련되게 젤을 발라 머리를 넘긴 맨 등 검은색 티셔츠를 맞춰 입은 것을 제외하곤 바지도 얼굴도 스타일도 다 제각각인 남자 넷이 서빙을 하고, 요리를 했다. 느낌이 좋았다. 아침의 그 소란에 몸도 마음도 지친 채로 생선과 고기 요리를 하나씩 시켰다. 나무 도마에 받쳐 정사각형의 철판에 각자의 음식이 담겨 나올 때에 난 이미 확신했다. 한 입 먹자마자 단순히 맛있어서가 아니라 그들의 정성과 재료의 선택에 담긴 모든 따듯함이 주는 위안이 느껴졌다. 우리 둘은 '맛있어' 라며 그 날 아침 이후 처음 무방비 상태로 동의의 눈빛을 주고받았다. 우리의 마음은 이미 풀려 있었다.
이번에는 버스를 한 번에 제대로 타고 시내로 돌아와 장을 보러 갔다. 시내 한복판에 위치한 작은 마트여서 그랬는지 몰라도 식재료가 프랑스에 비해 덜 풍부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과일과 야채, 주스 등을 사고 냉장 햄 코너 앞에 멈춰 섰는데 2유로인 잠봉 한 팩을 제외하곤 10유로대로 가격이 뛰는 그 수많은 햄 종류들을 보며 바티가 '그래 여긴 햄 가지곤 장난 안치지 스페인 답네'라고 해서 과연 그렇다며 웃었다. 그렇게 심사숙고해서 고른 햄을 야채와 같이 볶고 그 위에 치즈를 덩이로 잘라 올려 와인과 함께 저녁을 차렸다. 이 날 점심때 사 먹은 것 못지않게 맛있었다.
나는 꽤 당황했었다. 처음으로 우리의 생각이 그 어떤 합일점도 찾지 못하고 두 개의 다른 생각으로 남아 버린 것이었다. 이걸 그냥 놔둬도 괜찮은 건지, 그도 나를 이해하지 못했고 나도 그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이로부터 시간이 조금 흐른 지금은, 이런 거 한두 개쯤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그 자체를 받아들이고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쉽진 않겠지만. 다음에는 좀 더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길 바라며.
-Jardín Botánico en Gijón
Jardín Botánico
Jardín Botánico
저녁 산책. 어쩜 같은 색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건물들의 배색에 감탄하며 히혼 항구에 진입할 때 가장 먼저 눈에 띄었던 모뉴먼트('Elogio del horizonte지평선 찬양'이라는 제목의 스페인 조각가 Eduardo Chillida의 작업)에도 가 보고 어느 가게에 들러 빈티지 사진을 매치한 통조림도 구경하고 밤이 깊어 갈수록 열기를 더해갔던 시내 광장에서 열린 콘서트도 기웃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