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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태웅 May 10. 2021

셰익스피어가 필요한 때

건너 뛴 근대

  현대 우리 글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거의 모든 문장이 ‘다’로 끝난다는 것이다. 이는 한글 문장을 매우 단조롭게 보이게 하는 큰 이유의 하나로 지적되곤 한다. 옛 글로 올라갈수록 오히려 문장의 형태가 입말에 가깝고 어미도 풍부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송강 정철의 가사.


“이 몸 삼기실 제 님을 조차 삼기시니, 한생 연분이며 하날 모를 일이런가. 

나 하나 졈어 잇고 님 하나 날 괴시니, 이 마음 이 사랑 견졸 데 노여 업다. 

평생애 원하요데 한데 녜쟈 하얏더니, 늙거야 므사일로 외오 두고 글이 난고. 

엇그제 님을 뫼셔 광한뎐의 올낫더니, 그 더데 엇디하야 하계예 나려오니, 올 적의 비슨 머리 얼크ㅣ연디 삼년이라.” 

- 사미인곡 일부 


 ‘~가’, ‘~다’, ‘~고’, ‘~라’로 맺는 문장들이 자못 다채롭다.

만들어져가고 있는 현대 우리 글


 이와 같이 된 연유에 대해, 한 국어학자의 설명을 듣고 고개를 크게 끄덕인 적이 있다. 현대 우리 글은 기실 ‘만들어져가고 있는 도중에 있다’는 것이다. 주요 언어들은 제각기 비약적으로 발전하며 현대적 모양새를 갖추어가게 되는 계기들을 가지고 있다. 가령 독일의 경우 1521년 교황청의 제지를 무릅쓰고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한 마틴 루터를 들 수 있다. 루터는 궁중이나 성 안에서 쓰는 언어가 아니라 백성들의 일반어를 기준으로 삼았다. 그의 번역은 종교개혁의 원동력이 되었을 뿐 아니라 미적이나 표현력에서 현대 독일어에 다대한 공헌을 했다. 영어권에서는 16세기의 셰익스피어가 있었다.


 현대 한글은 조선말에서 개화기로 넘어오면서 이와 같은 발전기를 가지지 못했다. 오랫동안 한자에 밀려 언문으로 불리다 그만 일제 강점기를 맞고 말았던 것이다. 그 결과로 나온 것중 하나가 ‘번역문체’다. 예를 들면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류는 전형적인 영어 번역체다. 


 괴이하게 어려운 한자를 많이 쓰고 있다는 것도 고쳐야할 병통이다. 한자를 쓰다 느닷없이 일제강점기를 거치느라 한글로 된 말로 고쳐 쓸 시간을 갖지 못한 탓이다. 예를 들어 구제역(口蹄疫). 구제역은 영어로는 foot-and-mouth disease ‘발과 입’ 병이다. 한자로도 입 구(口), 발굽 제(蹄), 입과 발굽이다. 소와 돼지 등 가축 전염병이다. 사슴, 염소, 양과 같이 발굽이 두개로 갈라진 가축들에게 감염이 된대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입발굽병이라고 썼으면 누구나 알아들을 말을, 공연히 구제역이라고 쓴 탓에 4년제 대학을 졸업하고도 한자를 보지 않으면 알 길이 없게 만들었다. 미국에선 foot-and-mouth disease라 어린애도 쉽게 알아들을 말이다. 요즈음 초중학생들의 문해력이 이슈가 되고 있는 데도 이런 고약한 한자 이름 쓰기가 제대로 한 몫을 하고 있을 것이다. 터무니없는 노릇이다.   


 김상균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은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입말’을 방송에서도 써야 한다고 지적한다. 방송말과 생활말이 다를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의 인터뷰를 보자. 


 “검찰 용어 가운데 우리도 잘 모르는 일본식 한자가 참 많다. ‘신병을 확보했다.’ ‘신병’의 ‘병’자가 무엇인지 아나? 사람을 짐승처럼 끌고 다닐 때 쓰는 도구가 병(柄)이다. 전봉준을 서울로 압송할 때 머리에 씌운 도구가 병이라는 거다. 이런 표현 모르고 써도 되나?


 방송말연구회에서 정민영 변호사는 ‘검찰 소환에 불응했다’는 표현을 두고 ‘검찰에는 소환권이 없다’고 설명했다. 검찰이 출석을 요구할 수는 있지만 소환권은 판사만 갖고 있다는 설명이다. 기자들이 없는 권한도 검찰에 주고 있다. 지난해 법무부장관과 검찰총장이 다툴 때 시청자들은 알 수 없는 법조 용어들이 보도에 난무했다. 소위 억대 연봉을 받는다는 기자들이 두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단어를 해체하고 분해해서 설명해줘야 할 것 아닌가? 자기들도 모르는 단어를 그렇게 열심히 써야 하나? 검찰 개혁이 시대적 화두라면 그곳에 종사하는 이들의 정신 상태에 자극과 변화를 줘야 한다. 그들이 당연하다고 쓰는 ‘폼 잡는 말’을 우리가 먼저 뭉개버리면 된다. 영장 발부? 그냥 ‘영장을 쳤다’고 하면 되는 것이다. 파기환송심? ‘재판을 다시 하라고 돌려 보냈다’고 하면 된다. 박근혜 탄핵안이 인용됐다는 보도에 태극기 부대가 박수 쳤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도 있다. ‘박근혜가 탄핵됐다’고 보도하면 된다.”


- 한자어에 대한 반감인가?

“우리 입말을 저평가하는 것에 대한 반감이다. 압수수색이라는 표현도 귀에라도 편하게, 집을 뒤졌다거나 정 안 되면 수색했다고만 쓰면 될 것이다. 가격이 저렴하다? 그냥 ‘값이 싸다’고 하면 되지 않나? 우리말을 쓰면 싼 티가 난다고 생각하는 게 문제다. 방송은 방송말을 써야 한다. 더 쉽고 알아들을 수 있게. 물론 처음에는 힘들 것이다. 압수수색을 ‘집을 뒤졌다’고 표현하면 검경에서 ‘시정잡배나 쓰는 말’이라고 반발하겠지. 그런데 시정잡배가 쓰는 말이 어디가 어때서?”


문법은 사후적인 정리다 


 띄어쓰기도 마찬가지다. 본래 한글은 띄어쓰기를 하지 않았다. 최초의 한글 띄어쓰기는 1877년 영국 목사 존 로스(John Ross)가 펴낸 `조선어 첫걸음`(Corean Primer)에서부터다. 서울시체육회가 ‘서울 시체 육회’가 되고, ‘동시흥 분기점’이 ‘동시 흥분 기점’이 될 수도 있는 일이라, 띄어쓰기는 빠르게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문제는 현재의 띄어쓰기 규정이 지나치게 엄격하고, 때로 자의적이라는 데 있다. 게다가 익숙해질 만하면 한번씩 바꿔 혼란을 보탠다. 


 문법도 마찬가지다. 문법은 언제나 ‘사후적’이다. 예를 들어 영어의 복수형을 보자. 끝에 s를 붙일 때가 있다. Apple -> apples. es를 붙여야 하는 경우도 있다. potato -> potatoes. f를 v로 바꾸고 es룰 붙일 때도 있다. leaf -> leaves.  끝의 on을 a로 바꾸기도 한다. criterion -> criteria. 끝의 is를 es로 바꾸기도 한다. axis -> axes. 


 이렇게 된 것은 영어가 본래 서게르만어군의 하나인데, 바이킹의 침략과 함께 북게르만어의 영향을 받고, 노르만 정복으로 프랑스어와 노르만어가 유입하고, 기독교의 전파로 라틴어를 받아들이고, 산업혁명과 함께 라틴어와 히랍어 어근을 바탕으로 한 막대한 과학어휘를 새롭게 만들고… 하는 복잡한 발달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법은 태생적으로 ‘규칙으로서의 법’이라기 보다는 ‘사후적 정리로서의 구분’이다. 애초에 법이 먼저 있었다면 저렇게 불규칙하게 복수형을 만들 리는 없을 것이다. 한글 문법도 마찬가지여서 엄격한 법이 될 순 없다. 문법은 늘 사후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용을 저해하는 지나치게 엄격한 문법과 띄어쓰기는 이치에 닿지 않는 일이 된다. ‘사후적 분류’가 어느샌가 까다로운 법으로 바뀌어서 언어의 사용을 방해한다는 게 대체 어떤 점에서 정당성을 가질 수 있겠는가. 띄어쓰기는 문장이나 단어를 충분히 이해할 수만 있으면 되고, 표기도 가능한 실제로 사용하는 말 그대로 쓸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옳을 것이다. 차라리 그런 복잡한 규칙을 고안하는데 쓸 시간을, 구제역이나 신병과 같은 시대착오적 단어를 쉬운 우리말로 고치는데 쓰는 편이 만 배는 낫다.   


건너 뛴 근대 


 대한민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정체성과 제도들이 기실 모두 한글과 비슷한 발전경로를 밟아왔고, 그런 점에서 제각기 나름의 어설픈 ‘번역문체’들을 가지고 있다. 제 분야의 ‘마틴 루터’와 ‘셰익스피어’들을 필요로 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도 있지만 동시에 2차대전이후의 독립국이기도 하다. 아주 짧은 미성숙의 근대와 현대를 동시에 이고 살아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런  문제들에 대해, 이미 우리에게 제대로 된 제도나 합의가 있는 것처럼 접근해서는 올바른 해답이 나오기 어렵다. 지금부터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것, 우리가 하나씩 합의해 나가야할 문제라는 것을 솔직히 인정하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 해결의 첫 걸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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